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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8화 (18/240)

18화

벌써부터 초심을 잃은 것을 반성한 나는 공손하게 덧붙였다.

“저, 처음엔 너무 화려해서 놀랐지만 멋진 곳이라고 생각해요. 저를 위해 여길 준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내의 거처를 마련하는 건 남편의 의무니 감사할 필요는 없어.”

세스는 조금 무뚝뚝하게 답했다. 그렇게 말하면 나도 할 말이 없지만.

머쓱해하는 나를 뻔히 쳐다보던 세스가 말했다.

“이비, 난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줄 생각이야. 보석을 원하면 보석을, 옷을 원하면 옷을. 갖고 싶은 건 무엇이든 사 주지.”

"예?"

방금 전에 저한테 연무장 열 바퀴 돌라고 말씀하신 분, 어디 계시죠?

어이없어하는 내 눈빛에 그가 성긋 웃었다.

"단, 당신이 얌전히 이곳에 머문다면.”

우와, 정말 쉬운 조건이다. 진짜.

울컥한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공작님, 저를 여기 가둬 두실 생각이세요?"

“아니, 아직은.”

"……?"

뒷말이 조금 거슬리지만, 일단 날 가둬 둘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왜 이래?

“당신을 여기 두려는 건, 밖은 위험하고 내겐 적이 많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래서 저를 고용하신 거잖아요. 공작님의 적을 속이기 위해서요.”

“아니, 당산은 여기서 내 아내로 살기만 하면 돼.”

칼로 자르듯이 단호한 목소리였다. 순간 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세스가 널 데려온 건 내 명령으로 자리를 채울 사람이 필요했을 뿐, 너를 방패로 삼을 생각은 없었을 거다.”

갑자기 어깨에 힘이 쭉 빠졌다.

‘자리만 지키는 일이라면 꼭 내가 아니라도 상관없잖아.'

길 가는 사람 아무나 잡아서 시켜도 그럴듯하게 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세스도 그래서 나를 택했는지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노예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니. 딱히 내가 필요하거나, 특별해서 맡긴 역할이 아닌 것이다.

“이비?"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인 나를 세스가 불렀다. 어린애를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 였다. 이러니까 내가 착각을 하지. 속으로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럼 전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해요?"

잠시 침묵하던 세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2년 안에 모든 문제가 정리될 거야.”

"2년……."

어떻게 보면 좋은 기회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2년 동안 놀고먹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좀 달라.’

나는 세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에게 은혜를 갚고,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싶다.

멍하게 갇혀 있는 서간은 지하실에서 보낸 10년으로 충분했다.

"공작님, 전 아직 포기하지 않았어요.”

“무슨 뜻이지?"

“제가 얼마나 유능하고 쓸모 있는 사람인지 보여 드리겠단 소리예요.”

보여 주지도 않고 몰라준다고 실망해선 안 된다. 특별한 자리는 쟁취해서 얻어 내는 거니까!

두 주먹을 불끈 쥔 나를 보고 세스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보여 줄 생각이지, 아가씨?"

“그거 야…….”

연무장 열 바퀴부터 돌아야지, 뭐.

풀이 죽어 시들거리는 나를 보고 세스가 웃었다.

“기대할게.”

“어, 네!"

시키는 거나 제대로 하라고 혼날 줄 알았는데, 기대 한다는 말에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두근거림은 금방 식었다. 계단을 올라가던 세스가 창밖을 가리키며 저기가 바로 연무장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호수 건너편의 연무장은 얼핏 보기에도 거대했다.

안에서 축구, 농구를 동시에 해도 자리가 남을 것 같았다.

……그냥 하지 말까.

갑자기 자신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 * *

세스의 집으로 옮겨 온 뒤 벌써 며칠이 흘렀다.

그동안 연무장 돌기를 살짝 미뤄 둔 나는 새로운 취미를 찾았다. 바로 집 주변을 돌아다니며 어디에 뭐가 있는지 탐험하는 것이었다.

세스의 집은 궁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넓고 넓었다.

원래 이곳은 왕이 사냥할 때 쓰는 궁이었는데, 세스의 선조가 어마어마한 공을 세우자 왕이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고 던져 줬단다.

프리지어 궁이라는 이름도 ‘아, 네가 프리지어에서 사람 많이 죽였으니까 프리지어 궁이라고 하자.’라고 붙였다고 들었다. 그때의 왕은 굉장히 센스 없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세스는 내가 궁 안을 돌아다니는 것을 막지 않았다

내가 미로 정원에서 길을 잃었을 때도 혼내지 않고 몇 번이나 구하러 왔다.

하지만 같은 자리에서 계속 헤매는 나를 보고 걱정 이 되었는지, 나무 사이에 분홍색 리본을 묶어 답을 알려 주는 만행을 저질렀다. 혼자 힘으로 미로를 돌파할 생각이었던 나는 세스에게 약간 삐쳐 있었다.

“어디-보자- 오늘은 어디로 가 볼까-"

나는 품속에서 꼬깃꼬깃 접은 종이를 꺼냈다. 내가 직접 만든 탐험 지도였다. 어디에 뭐가 있다 정도만 표시한 수준이었지만, 정원만 6개나 되는 집에서는 꽤나 유용했다.

”……가씨! 아가씨!“

오늘은 남쪽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하는데, 멀리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 안나잖아?"

안나는 시녀장을 도와 나를 돌봐 주는 시녀 중 하나였다. 평소의 침착함은 어디 두고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이 왠지 불길했다.

“아가씨! 큰일 났어요!"

“혁, 무슨 일인데?"

“아가씨가 주문하신 이서똑? 아, 이사똑이요!"

“아, 이사 떡? 이사 떡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깜짝 놀라는 나를 보고 다급히 고개를 저온 안나가 말했다.

“아뇨, 그걸 총관 어르신이 들고 오셨어요.”

”뭐?!"

나는 새집으로 이사 온 기념으로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 중이었다.

바로 이사 떡 돌리기.

딱히 K-미풍양속을 지키려는 건 아니지만, 얼굴도장을 찍기에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었다.

‘인지도! 인지도가 필요해!'

지금 내겐 사람들의 관심과 지지가 아주 많이 필요 했다.

나를 병풍으로 만들려는 세스에게 저항하기 위해서. 그리고 미래에 쳐들어올 라리사 모어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였다.

‘분명 개싸움이 벌어질 텐데, 그때 내 편이 되어 줄 사람을 많이 만들어야 해.’

나는 밑밥을 부리는 심정으로 가진 돈을 탈탈 털었다.

모두 5,200골드.

이 중 5천 골드는 나를 팔아먹은 노예 상인에게서 압수한 돈이었다. 세스에게 돌려주려고 했지만 그는 내 몸값이니 내가 가져야 한다며 거절했다.

나머지 2백 골드는 내 월급이었다. 세스는 매달 내게 용돈이라며 백금회를 한 개씩 줬다. 딱히 쓸 일이 없어서 지금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렇게 돈을 마련하고, 목록을 만들고, 주문 끝에 이제 완성된 샘플만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 시점에 총관 할아버지가 끼어들 거라고는 정말 생각도 못했다.

‘혹시 돈이 모자랐나? 아니면 너무 낭비 한다고 혼내러 온 건가?'

세스는 내가 돈으로 딱지를 쳐도 신경 쓰지 않겠지만, 공작가의 살림을 맡은 총관의 입장은 다룰 수도 있었다.

“아, 아가씨! 그렇게 뛰시다가 넘어지세요!"

안나의 말에 허둥지둥 뛰어가던 나는 정신을 차렸다.

그래. 당황할 필요 없다 이사 떡이 왜 필요하나는 시녀장도 현란한 말솜씨로 설득했던 나다.

정정당당하게 선동과 날조로 승부하자!

"허허, 이 늙은이가 허락도 없이 자리를 차지해 불편 하게 해 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응접실에 앉아 빙그레 웃는 총관 할아버지를 본 순간, 내 자신감은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엄마, 내 방에 능구렁이가 있어요.

도움을 청하듯 시녀장을 보자 어쩔 수 없다는 눈짓이 돌아왔다. 나는 냉큼 총관의 맞은편에 앉아 활짝 웃었다.

“그럴 리가요. 할아버지는 언제 오셔도 환영이에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호칭을 고민하다가 그냥 할아버지라고 불렀는데 다행히 마음에 든 모양이다. 허허 웃는 얼굴이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사실 이 할아버지는 공작가의 실세다.

원래는 선선대 왕과 선왕을 모신 왕실 시종장이었는데, 갑자기 이곳으로 와서 총관이 되었다고 들었다. 그 야말로 왕실의 고인 물이자 왕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어르신 of 어르신이셨다.

‘거기에 비하면 나는 완전 쪼렙이지. 까불지 말자.'

나는 겸손함을 한껏 끌어모아 일상적인 대회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 이쯤이면 괜찮겠다 싶을 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그런데 무슨 일로 오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참, 그렇지요. 아가씨께서 이것을 주문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할아버지가 하얀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나는 긴장한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네, 제가 주문했어요. 제가 살던 곳에서는 이사 온 사람이 이웃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며 잘 부탁한다고 인사를 하는 풍습이 있거든요.”

“그렇습니까. 참으로 좋은 풍습이군요.”

할아버지가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공격이 들어오나?

눈에 힘을 주는 순간, 상자가 쓰윽 내 앞으로 내밀어졌다.

"완성품을 보고 싶으실 것 같아 서둘러 가져왔답니다. 어서 열어 보시지요.”

어? 나 혼내려고 온 거 아냐?

눈치를 보던 나는 슬그머니 상자에 손을 댔다.

원목의 하얀색을 살린 상자의 뚜껑엔 장미 문양이 있었다. 자개나 금박을 넣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대량 생산을 위해 인두로 찍어 달라고 했는데 아주 자연스럽고 예뻤다.

뚜껑을 열자 붉은 천이 깔린 상자 속에 네 가지 물건 이 담겨 있었다.

유리병에 든 별사탕, 틴 케이스에 담긴 담뱃잎, 상처 에 바르는 연고와 술 한 병이었다.

전생에선 흔하디흔했지만, 이곳에선 아주 비싸고 귀한 물건들이다.

특히 별사탕은 굉장히 고가품에 속했다. 가뜩이나 비싼 설탕을 사흘 동안 계속 굴려서 만드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건빵의 친구 따위에게 이렇게 돈을 뜯기다니, 좀 사기당하는 기분이다.

"실례지만 이 물건들은 아가씨께서 직접 고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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