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이비?"
“……네?”
“왜 그래?"
세스가 울먹이는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어, 엄청 멋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특히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 딱 한 개인 점이요.”
성은 고립된 섬이나 마찬가지였다. 드나들 수 있는 길은 본궁의 뜰과 연결된 다리뿐. 호수를 헤엄쳐서 갈수는 있겠지만, 높은 벽 때문에 기어오르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야말로 환상적인 유배지.
‘필요할 때만 꺼내 쓰셔도 좋습니다.'라는 문구가 딱 어울리는 장소였다.
우중충한 내 표정을 본 세스가 변명하듯 말했다.
"여기가 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야.”
"안전하긴 진짜 안전할 것 같네요.”
완전 은행 금고네, 금고.
백 년 목은 산삼처럼 껄껄 웃자 세스의 얼굴이 아주 미묘해졌다.
“마음에 안 들어?"
“아뇨? 진짜 미치도록 환상적인데요?"
“그렇게 생각하면 어서 내려야지.”
세스의 말에 나는 마차 좌석을 더 꽉 끌어안았다.
"저 그냥 마차에서 살면 안 돼요? 이게 제 애착 마차 같아요.”
“이비.”
“저렇게 귀한 곳에 저처럼 누추한 사람이 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나는 어떻게든 마차에서 안 내리려고 버렸다. 그러자 한숨을 쉰 세스가 손을 내밀었다. 다음 순간, 나는 텃밭의 무처럼 뽕 뽑혀 나왔다.
”으아아악! 안 돼!“
나는 애절하게 마차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세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안은 채 성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안을 보면 좋아질지도 몰라 당신을 위해 새로 꾸미 게 했으니까.”
"……!"
안을 미리 꾸미기까지 하다니, 처음부터 계획적이었구나.
이제 날 감금할 생각이지! 사약 내리는 폭군처럼!
“이비, 지금 우는 거야?"
"흑, 아뇨.”
나는 눈물로 흐려진 눈을 애써 부릅떴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잘 생각해 보면 분명 감금에서 빠져 나올 방법이 있을 거다.
절대 포기하지 말고……응?
나는 사방이 어두워진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넋을 잃고 말았다.
돔형의 천장에 붉은 장미가 새겨져 있었다.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였다. 색유리를 통과한 빛이 붉고 푸르게 공간을 물들였다. 공기까지 반짝반짝 빛나는 듯했다.
깊은 물속에서 수면을 보면 이런 느낌일까.
아름답고 고요하고 평온했다.
“다행히 마음에 든 모양이군.”
나직한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느새 나는 세스의 어깨에 기댄 채 느긋하게 늘어져 있었다.
“헉! 이건, 그런 게 아니라!”
"왜? 마음에 안 들어?"
“아뇨, 그건 아닌데, 그게…….”
버벅거리는 나를 세스가 따스한 눈으로 바라봤다. 마치 새로 산 방석 위에 냉큼 올라간 강아지를 보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위험해 이대로 있다간 진짜 어항에 갇힌 금붕어가 되어 버릴 거야.
아무 생각 없이 주인이 뿌려 준 먹이만 먹다가 생존 능력까지 잃어버릴 거라고.
어서 생각해라 이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을 떠올려!
“아!”
순간 번개처럼 뭔가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공작님, 부탁드릴 게 있어요.”
“부탁?"
의아한 표정이 된 세스가 뭐든 말해 보라는 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저, 폐하의 시녀로 일하고 싶어요!"
시녀가 되라는 왕의 제안이 떠오른 건 신의 한 수였다.
겸업을 하면 꼬박꼬박 외출이 가능하다. 일을 한다는 핑계로 밖에서 자유 시간도 가질 수 있을 테고. 무엇보다 지금 내가 매달릴 수 있는 지푸라기는 이것뿐이었다.
“안 돼.”
그런데 단번에 거절당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세스가 웃었다. 즐거워 보이는 미소는 아니었다.
“왜 시녀가 되고 싶은데?"
“시녀로 일하면 분명 공작님께 도움이 될 거라고…….”
왕에게 들은 이야기를 주섬주섬 꺼내니 세스가 단호하게 튕겨 냈다.
“그런 도움은 필요 없어.”
"……."
나는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역시 세스는 내게 아무런 기대도 없는 것 같았다. 자기를 귀찮게 하지 않고 얌전히 여기 머무르기만을 바라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대로 성에 감금당하긴 억울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서 말했다.
“사실은 제가 하고 싶어서 그래요. 왕의 시녀는 굉장히 명예로운 자리라면서요.”
“폐하를 알현하는 것만으로 쓰러졌으면서?"
세스는 대놓고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쳇. 눈치 빠른 남자 같으니.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나는 면접 보는 취준생처럼 꼭 여기 다니고 싶었다고 우겼다.
“저 진짜 잘할 수 있어요. 허락해 주세요. 네?”
열심히 조르자 세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보다 건강해지면 허락하지."
“지금도 건강한데요?"
지하실에 십 년 넘게 갇혀 있었는데 이 정도면 건강한 거지.
하지만 세스의 기준은 내 예상보다 훨씬 높았다.
"연무장 열 바퀴.“
“네?"
“연무장 열 바퀴를 쉬지 않고 달릴 수 있으면 시녀든 뭐든 해도 돼.”
……차라리 안 된다고 해라.
연무장 열 바퀴라니.
알바를 하려고 연무장 열 바퀴를 뛰어야 한다니.
이게 무슨 소리요, 공작 양반.
‘전생에 운동장 여섯 바퀴 돌고 토할 뻔했는데.'
그때는 생활 근육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의 내 몸은 휴지 쪼가리나 마찬가지였다.
응, 안 된다, 이건.
빠른 결론을 내린 나는 홍정에 들어갔다.
“열 바퀴는 너무 많잖아요. 딱 반 잘라서 다섯 바퀴로 해요.”
“열 바퀴.”
“여섯 바퀴 뛰고 반올림하면 열 바퀴인데요.”
“열네 바퀴 뛰고 반올림할까?"
“그, 그럼 행운의 숫자인 일곱 바퀴는 어때요?"
“유감이군. 내 행운의 숫자는 10이거든.”
야박한 세스는 단 한 바퀴도 깎아 주지 않았다.
시무룩해진 나는 세스의 어깨에 이마를 쿡 박았다. 맞닿은 몸을 통해 그가 웃는 것이 느껴졌다. 와, 이럴 때 웃다니 진짜 성격 나쁘네.
투덜거리던 나는 주변이 점점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비추던 어두운 홀을 벗어나 메인 로비로 들어온 것이다.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든 나는 흠칫 놀랐다.
"헉!“
벽이 온통 호박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황금의 반짝 임이 샹들리에의 빛에 반사되어 나비처럼 날아다녔다. 눈을 찌르는 화려함이란 바로 이런 거라고 보여 주는 듯했다.
‘크헉, 시력 약한 사람은 한 방에 가겠다.'
화려함에 눈이 익은 뒤에야 섬세하게 세공된 벽의 문양이 보였다. 금박을 입힌 프레임 속에 꽃과 동물들 이 모자이크처럼 표현되어 있었다. 중간중간 반짝이는 것들이 신경 쓰인 나는 조그맣게 물었다.
“혹시 벽에 박힌 게 보석인가요?"
“대부분 호박과 토파즈지만, 옐로 사파이어나 다이아몬드 같은 것도 섞여 있지.”
"……."
아니라고 부정해 주길 바랐는데 더 무서운 대답이 돌아왔다 여길 만든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벽에 보석을 박아 넣은 걸까.
“머, 멋있긴 한데 여기만 이런 거겠죠? 설마 성 전체가 이런 건…….”
“음.”
눈을 피하는 세스를 보니 진짜 성 전체에 보석을 처 바른 모양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렇게까지 할 일 인가? 이러니까 죽창을 맞고 교수대로 끌려가고, 사회가 무너지고, 어?
환멸이 담긴 내 시선에 쓴웃음을 지온 세스가 말했다.
“이비, 이 성은 아주 오래된 유적이야. 왕국이 세워 지기 전부터 존재했던 고대의 유산이지.”
“유적이요?”
왕국이 세워지기 전이라면 거의 오백 년은 먹고 들어갈 거다.
그런데 이건 어딜 봐도 반짝반짝한 신축 건물인데?
내 의문을 세스가 간단히 풀어 주었다.
“파괴 불가의 룬을 새겨서 지어졌던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더군.”
“오.”
룬이 뭔지 모르겠지만 무슨 마법적인 요소가 있나 보다. 신기해하며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뒤늦게 오싹 해졌다.
“그럼 이 성은 앞으로도 천년만년 이런 모습이에요?"
재건축도 안 되고, 새로 인테리어도 안 되고, 계속 악취미적인 번쩍번쩍?
떨리는 내 목소리에 세스가 난처한 듯 웃었다.
“예전에 왕가의 재정이 바닥났을 때 여길 분해하려 했지만 실패했지 그래서 내 선조께서 공을 세우자마자 떠넘기듯이 받게 된 거야.”
세스의 말에 의하면 그때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성을 파괴하려고 했단다.
마법도 쓰고, 대포로 쏴 보고, 하다못해 망치와 정으로도 때려 봤지만 성은 끄떡도 안 했다. 결국 성 자체가 꼴도 보기 싫어진 왕이 동생인 공작에게 넘겨 버렸다는 이야기였다.
듣고 보니 완전 애물단지라서 떠넘긴 것 같은데, 그런 곳에 꼭 굳이 반드시 날 살게 해야겠어? 배신감이 가득한 내 시선에 세스가 덧붙였다.
“다시 말하지만 이 성은 궁에서 가장 안전한곳이야. 그래서 역대 공작들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이를 여기 살게 했지."
“야 그래서!”
그런 역사가 있다면 내가 여기서 살기만 해도 사랑 받는 공작 부인처럼 보일 것이다.
"진짜 치밀하시네요. 사람들이 완전히 속겠어요.”
"…….“
엄지를 척 내밀자 잠시 말이 없던 세스가 한숨을 쉬었다.
응?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었나? 아니면 리액션이 부족했나?
‘하긴, 이것도 직장 생활인데 내가 너무 날로 먹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