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
세스의 집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컸다.
멀리서 형체만 보일 때도 장난이 아니구나 싶었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압도될 정도였다.
‘아니, 이게 집이라고?'
눈부실 정도로 하얗게 빛나는 궁전. 삼각형의 지붕 장식과 대리석 기둥이 줄지어 늘어선 모습이 꼭 그리스 신전 같았다.
궁전의 정면은 커다란 호수와 맞닿아 있었고, 뒷면은 끝없는 잔디밭이었다. 지평선까지 펼쳐진 잔디밭을 보니 머리가 아득해졌다.
‘와, 저기에 아파트를 세우면 대단지도 가뿐하게 들어가겠다.’
이 넓은 땅에 농사를 짓거나 건물을 세우는 게 아니라 잔디를 키우다니, 엄청난 낭비였다.
잔디 키우기 대신 할 수 있는 수많은 일을 떠올리던 나는 곧 깨달았다 멀쩡한 땅에 잔디나 심는 일 또한 돈지랄 이라는 것을.
‘공작 정도가 되면 돈지랄의 스케일이 다르구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돈지랄로 생각하자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안에서 굶어 죽기 딱 좋게 생긴 거대한 미로도, 수십 개의 황금색 동상들이 몸매 자랑을 하는 광장 크기의 분수도, 아무것도 키우지 않는 새장 모양의 대형 온실도. 모두 흐린 눈으로 보며 고개를 끄떡일 수 있었다.
돈지랄은 돈지랄일 뿐, 어떤 이유도 실용성도 필요 없으니까.
‘공작이 사는 곳인데 왜 궁이라고 부르나 했더니.’
규모로 보나, 화려함으로 보나 왕궁에 전혀 꿀리지 않았다 그래도 왕의 신하인데 이런 곳에서 살아도 되나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리고 집을 이룬 모든 것이 매우 매우 컸다. 대리석 기둥 하나가 아파트 3층 높이였고, 입구의 문도 2층 정도는 될 듯했다.
‘꼭 거인이 사는 집 같네.'
신기해하며 활짝 열린 문을 통과하자 거대한 홀이 나타났다. 천장은 둥근 돔형이었고 바닥은 오페라 홀처럼 층층이 계단이 있는 구조였다.
계단 한 층, 한 층마다 금과 보석으로 번쩍거리는 장식품들이 가득했다. 벽에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신 같은 인물들이 그려진 채였다. 신화와 유물과 빛이 어울려 하냐의 거대한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우와, 진짜 멋지네요.”
나는 약간 오버하며 감탄했다. 빈손으로 남의 집에 쳐들어왔으니 이 정도의 리액션은 보여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반응은 세스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왔다.
"허허, 마음에 드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나이 지긋한 총관 할아버지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고.
"원하신다면 머무실 곳도 이런 분위기로 꾸며 보겠습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시녀장은 심각하게 말했고.
“어떤 물건이 가장 마음에 드셨는지요.”
외알 안경을 쓱 밀어 올린 시종장은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말만 하면 기둥뿌리까지 뽑아 줄 기세였다.
그 뒤에서 수십 명의 고용인들이 친절한 미소를 짓 고 있었다. 내가 손만 꼼지락거려도 ‘사랑합니다, 고객님!’하고 외칠 것 같았다.
이거 뭐야, 무서워.
당황해서 주춤거리는 순간, 세스가 말했다.
“다들 물러가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절을 올린 사람들이 홀을 빠져 나갔다. 질문도, 망설임도 없었다. 홀이 비기까지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멍청히 눈만 깜빡이다가 세스를 올려다봤다. 그는 왠지 모를 심각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제가 뭔가 실수했나요?"
“아니.”
세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모두가 당신을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보니 기분이 나쁘군.”
엥?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사람들이 날 환영하는 게 싫다는 거야?
“그럼 제가 경멸의 시선을 받고, 감히 공작가에 발을 들이냐는 소리를 듣고, 공작님이랑 헤어지라고 돈 봉투로 두들겨 맞는 걸 기 대하셨어요?"
“……그런 걸 기대할 리가 없잖아."
황당해하는 세스를 보자 마음이 놓였다. 다행히 성격 파탄은 아니구나.
“그럼 왜 기분이 나쁘세요?"
잠시 말이 없던 세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저 발견했는데, 라는 생각이 들어서.”
"네?"
“당신은 내가 먼저 발견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좋아 하는걸 보니 화가 나."
어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스를 쳐다봤다. 슬쩍 시선을 피하는 그의 귀 끝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태클을 걸었다.
“그런데 공작님이 먼저 발견한 건 아니잖아요. 선배님이 절 찾아냈고, 공작님은 확인만 한 거니까요.”
순간 세스의 미간이 꿈틀했다.
“그는 내 부하니까, 내가 발견한 것과 마찬가지지.”
"호오?“
그런 신기한 계산법이?
내 감탄에 세스의 귀 끝이 더 붉어졌다. 그는 억지를 쓰는 걸 그만두고 말했다.
“내가 이상하다는 건 알아."
“이상하진 않은데요?”
독점욕이야 흔하니까. 세스는 나를 My Dog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갑자기 소유욕이 폭발할 수도 있지, 뭐.
선선히 납득하는 나와 달리 세스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지 않다고?"
“네, 의외로 일반적인 감정일걸요?”
나는 신세계를 본 듯한 세스의 반용이 오히려 신기 했다. 어른스럽고 뭐든 다 잘할 것 같은 남자가 유독 감정 쪽으로만 서툰 느낌이었다.
‘이과인가?'
딴생각을 하는 사이, 세스가 지그시 나를 바라봤다. 저건 키우는 개를 잡아다 사진을 마구 찍고 싶어 하는 표정 같은데? 위기감을 느낀 나는 얼른 생긋 웃으며 덧 붙였다.
"물론 일반적이라고 해서 옳다는 건 아니죠. 제가 아무리 예뻐도 집착하시면 안 돼요."
“안 된다라……."
세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갑자기 오싹해진 나는 얼른 무릎을 두드리며 ‘아이고-다리 아프다!' 하고 중얼거렸다. 세스는 마지못해 무서운 눈빛을 거뒀다.
"방으로 데려다주지.”
나는 안도하며 얼른 세스를 따라갔다. 홀을 가로지르던 그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힘들면 언제든 말해. 업어 줄 테니까.”
“네?”
잠시 후, 나는 세스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게 됐다. 화려하게 꾸며진 복도를 지나니 책이 가득 한 방이 나타났고, 길쭉한 방을 가로지르자 도자기로 장식된 복도가 있었다.
‘여기서 방 탈출 게임을 해도 되겠다.’
나는 기회가 되면 꼭 해 보겠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세스가 간간히 나를 확인하는 게 느껴졌다. 꼴사납게 업혀 가고 싶지 않았던 나는 일부러 씩씩하게 걸었다.
"거의 다 왔어.”
세스가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문을 열었다. 그러자 대리석 기둥이 늘어선 회랑이 보였다. 방이 아니라 회랑과 이어진 작은 뜰의 모습에 불안감이 치솟았다.
‘설마 여기에 개집이 있는 건 아니겠지?'
나는 제발 아니길 빌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세스가 불안에 떠는 나를 회랑의 끝으로 데려갔다.
거기엔 꽃으로 장식된 하얀 마차가 있었다. 지붕 대신 햇빛 가리개를 단 마차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예뺐다. 마차를 끄는 말까지 하얀색이었다.
“어, 정말 멋진데요. 저 혹시 여기서 자나요?"
조심스럽게 묻자 세스가 농담을 들온 것처럼 웃었다. 그는 나를 번쩍 들어 마차에 태우며 속삭였다.
“더 좋은 곳으로 모시지요. 부인."
순간 숨이 곽 막히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낮은 목소리가 더 낮아지니 장난이 아니었다.
반쯤 굳어 있던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마차가 달리고 있었다. 깜짝 놀라 옆을 보자 세스가 고삐를 쥔 채였다.
와, 마차도 잘 모네……가 아니라 진짜 마차를 몰고 있어?!
‘이, 이래도 되는 건가?'
귀하신 공작님을 마부로 부려도 되는지 고민하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높은 벽처럼 사방을 감싼 나무 들이 사라지고 커다란 호수가 나타났다.
그리고 호수 한가운데 작은 성이 불쑥 솟아 있었다. 디즈니랜드에 어울릴 것 같은, 당장 불꽃이 솟구치며 꿈과 환상의 메들리가 들려올 것 같은 성이었다.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던 것도 잠시, 마차가 성과 이 어진 다리로 향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 저기. 혹시, 설마?"
불안감에 떨리는 내 목소리에 세스가 확답을 주었다.
“맞아, 당신이 머물 곳이야."
“……네?”
동거하자고 하더니 왜 갑자기 유배요?
***
이곳에 오기 전에 나는 하얀 장미 저택에서 지냈다.
허허벌판에 서 있는 저택은 아주 아름답지만 쓸쓸한 곳이었다.
외출은 금지되어 있었고, 고용인들은 나와 가까워지는 것을 꺼렸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예법 공부와 정원 산책 그리고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세스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조금 외로운 생활이었지만 참을 수 있었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내가 활약할 때가 올 거라 믿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계속 불안감이 쌓였다. 세스에게 필요한 것은 그냥 아내 자리를 채워 줄 사람일 지도 모른다. 이런 기다림이 몇 년이나 이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래서 같이 살자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로 기댔다. 드디어 인턴 끝 정규직 시작인 줄 알았으니까.
‘설마 이런 통수를 준비해 뒀을 줄은!’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성을 바라봤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 반짝반짝 예뻤다. 지금 당장 유리 구두를 신은 신데렐라가 걸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 봤자 유배지일 뿐.
‘겉은 멋지고 속은 편리하고 갖출 거 다 갖춰서 완벽 하겠지. 외출도 못 하고, 대화도 못 하고, 계속 방치 당해도 불평하면 배가 처불렀다는 소리나 듣기 딱 좋은 환경!’
이것이 신종 괴롭힘인가. 돈 처발라서 왕따 시키기 같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