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확답을 받은 나는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말했다.
“그럼 장갑 벗고 머리 쓰다듬어 주세요.”
"……뭐?"
“아, 그리고 잘했다고 칭찬도 해 주세요.”
아주 당연한 요구라고 생각했는데, 세스는 멍하게 굳어 있었다. 보다 못한 나는 그의 손등을 콕 찔렀다. 움찔한 세스가 물었다.
“정말 그걸 원해?"
“네.”
나는 재촉하듯 그의 얼굴과 장갑을 번갈아 쳐다봤다. 한참을 망설이던 세스가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또 손을 들고 머뭇거린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나는 그의 손을 끌어 내 머리에 턱 얹었다.
“자, 빨리 해 주세요. 쓰담쓰담.”
내가 괴로워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세스가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에서 부드럽고 따스한 감정이 전해졌다.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스르륵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온몸이 노글노글해서 그대로 누워 버리고 싶었지만 이대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나는 저절로 감기는 눈을 억지로 떴다.
“칭찬도요.”
“……잘했다.”
성의 없는 칭찬에 입을 삐죽였지만 곧 아무래도 좋아졌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이 너무너무 기분 좋았기 때문이다. 하나도 안 아프면서 시원한 마사지를 받는 느낌이었다.
나는 쿠션 위에 털썩 엎드린 채로 마음껏 쓰다듬을 즐겼다 으으, 진짜 좋다. 세스를 내 쓰다듬 노예로 임명하고 싶다.
“이비.”
“후으응, 네에.”
기분 좋은 감각에 푹 잠겨 있던 나는 겨우 대답했다.
그때, 갑자기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멈췄다. 아니, 벌써 끝이야?
너무 빨리 끝나 버린 보상에 나는 불만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런 나를 세스가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오싹 소름이 돋았다.
‘어? 뭐지?'
뭔가 무섭다. 주춤 물러나는 나를 본 세스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쓰다듬는 손길도, 거기서 느껴지는 감정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나는 완전히 안심하지 못한 상태였다.
세스가 다시 나를 불렀다.
“이비.”
“네, 네?"
“우리 같이 살까?"
”……네?"
느닷없이 동거 신청이 떨어졌다.
* * *
프리지어 궁.
한때 왕실의 사냥용 궁이었으나, 프리지어 전투의 대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엘마이어 가문에 하사된 곳.
그리고 엘마이어 공작의 공식적인 거처이기도 한 이 곳은 지금 난리가 나 있었다.
공작이 갑자기 연인과 함께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다. 별궁에 연인이 머물 것이니 준비하라는 명령과 함께였다.
날벼락 같은 소식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특히 시녀장은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얼마 전 공작의 명으로 별궁을 새로 단장했지만 완벽하진 않았다. 미래의 안주인을 모시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결국 모든 인원이 총출동해서 별궁을 쓸고 닦고 치장했다.
손님을 맞이할 대현관과 그레이트 홀도 마찬가지였다. 전시된 예술품들을 재배치하고 먼지 한 톨도 없이 닦느라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거기! 다시 확인해. 2 열이 비뚤어졌잖아!“
"꽃송이가 너무 작군. 이쪽의 꽃은 모두 버리고 다시 장식해.”
“별궁 정비는 다 끝났나?"
"거의 끝났습니다. 커튼 색이 가구와 조화롭지 않아 교체 중입니다."
“당장 가서 확인해라 별궁 준비가 제일 중요하니까.”
엉덩이가 무거운 총관, 부총관은 물론 시종장과 시녀장까지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윗사람이 이렇게 바브니 아랫사람들은 거의 날아다니고 있었다. 어술렁거리던 기사들까지 하나둘 잡혀와 부려 먹혔다.
“그래서 오늘 우리 예비 마님이 오시는 거요?"
“물어볼 시간에 이거나 날라요!"
“아니, 그것만이라도 말해 주지.”
그때, 웅장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가 행동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정문에 있는 타 워에서 울리는 종소리는 궁의 주인이 귀환한다는 신호였다. 동문, 서문과 달리 정문은 오직 공작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잠시 후, 홀 안으로 뛰어든 시종이 쐐기를 박았다.
“마차가 그레이트 브리지를 지났습니다!"
그레이트 브리지는 궁 앞에 있는 호수를 가로지르는 다리였다.
그건 손님이 도착할 때까지 15분이 남았다는 뜻이 기도 했다. 박수를 쳐서 웅성대는 사람들을 진정시킨 시녀장이 말했다.
“모두 침착하세요. 즉시 하는 일올 마무리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대현관 앞에 모입니다.”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지시에 따라 홀을 빠져나갔다. 마지막까지 남아 홀을 점검하던 총관이 문득 생각 난 듯이 물었다.
“오늘 궁에 남아 있는 게 흑사자 기사단인가?"
"흑사자는 마차를 호위하는 중입니다. 지금 남아 있는 기사단은 금사자군요.”
부총관인 램버트가 심드렁하게 말하자, 총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필 금사자라나 기사단장은 어디 있나? 목줄을 걸어서라도 놈들을 붙잡아 놓으라고 하게.”
“기사단장이 더 신이 난 것 같던데요. 손님을 환영하기 위해 뭔가를 준비한답니다.”
”뭐라고? 당장 중지시켜! 또 종이꽃 따윌 뿌렸다간 가만두지 않겠다고 전해!"
“저도 말은 해 봤습니다만 워낙 막무가내라.”
램버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답답해진 총관이 지팡이를 움켜쥐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하지만 그가 금사자 기사단의 음모를 막기도 전에 마차가 도착하고야 말았다.
“마차가 도착합니다. 어서 이쪽으로.”
시녀장의 재촉에 총관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자리로 가서 섰다.
잠시 후,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마차가 나타났다. 사람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스쳤다.
“대열을 유지하며 정지!"
마차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대현관 앞에 멈춰 섰다. 공작의 부관인 모리스가 손수 마차의 문을 열었다.
“도착했어요?"
새처럼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마차 밖으로 빠져나왔다. 모두의 귀가 쫑긋해졌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이는 공작이었다. 그는 디딤대를 밟고 바닥에 서자마자 마차 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기다리던 손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코트를 입은 아가씨가 공작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녀는 소문처럼 분홍색 머리와 붉은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티 없이 하얀 피부는 평생 햇빛을 보지 못한 사람 같았다.
하지만 소문처럼 요염하고 거만한 미녀는 아니었다. 외려 솜털이 뽀송뽀송한 아가씨였다. 몸에 안 맞는 큰 코트를 입고 있어서 더욱 작아 보였다.
충격을 받은 사람들 속에서 부총관인 램버트가 중얼 거렸다.
“저 옷은 전하의 정복인데…….”
총관이 황급히 그의 옆구리를 쳤다. 하지만 둘을 사람은 들은 후였다 정신이 번쩍 든 사람들은 얼른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으며 숨을 죽였다. 공작이 자신의 정복을 입혀 데려온 아가씨.
그건 아주 노골적인 경고였다. 공작의 상징을 걸칠 수 있는 사람이니, 감히 쳐다보지 말고 입에 담지도 말라는.
‘전하께서 처음부터 세게 나오시는군.'
램버트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마차에서 내린 아가씨는 열심히 주변을 구경 중이었다. 옆에서 기다리던 공작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슬그머니 따라붙었다. 멀리 떨어지는 걸 용납할 수 없는 것처럼.
‘의외로 독점욕이 있으신데?'
흥미로워하던 램버트는 서늘한 시선이 제게 닿자 흠칫했다.
공작이 그를 반히 쳐다보고 있었다. 램버트는 얼른 양손을 들어 항복을 표한 후에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서늘한 시선이 떨어져 나갔다.
‘적의든 호의든 아가씨께 관심을 갖는 게 싫으신 건가.'
하지만 눈치 빠른 램버트와 달리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자들도 있었다.
-뿌아앙!
느닷없이 터진 뿔피리 소리에 아가씨가 펄쩍 뛰었다.
단번에 눈이 날카로워진 공작이 홱 뒤를 돌아봤다. 범인은 황금색 사자기를 펄럭거리는 금사자 기사단이었다.
주군의 시선에 흥분한 기시들이 손에 든 악기를 있는 힘껏 연주했다. 끽끽대는 피들 소리에 음정이 다 틀린 류트까지 섞였다. 꿍꽝거리는 북소리는 덤이었다.
끔찍한 불협화음에 사람들의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이 미친 짓을 말려야 할 기사단장은 앞장서서 종이꽃을 뿌리고 있었다.
“오, 신이시여."
총관은 차마 볼 수 없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 램버트 역시 그러고 싶었지만 저 멍청한 기사단장이 바로 그의 사촌형이었다.
그런데 기사단장은 그냥 미친 짓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곰 같은 몸으로 펄쩍 뛰어올라 빙글빙글 돌더니 아가씨 앞에 척 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종이로 만든 장미꽃을 수줍게 내밀었다.
“젠장."
램버트는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아가씨가 모욕당했다고 발작하거나, 그대로 쓰러지거나, 기사단장의 뺨을 후려치는 암울한 미래만 보였다.
그런데 기겁하며 피할 줄 알았던 아가씨가 활짝 웃으며 꽃을 받았다.
“환영해 줘서 고마워요.”
그야말로 태양처럼 밝은 미소였다. 잔뜩 얼어붙었던 사람들은 순간 눈부심을 느꼈다.
‘천사인가?’
‘성모님이시다.'
감격해서 몰래 성호를 긋는 사람까지 있었다.
물론 가장 감격한 이는 금사자 기사단장이었다. 처참하게 외면당했던 이전까지와는 달리 처음으로 좋은 반용이 돌아온 것이다.
흥분한 그는 제자리에서 솟구치며 괴성을 질렀다. 덩달아 신이 난 금사자 기사들도 다시 끔찍한 연주를 시작했다.
램버트는 총관의 지팡이를 빼앗아 그들을 마구 후려 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모리스.”
그때 끔찍한 소음을 뚫고 공작의 음성이 들렸다. 멍청한 기사들이 연주를 멈출 정도로 분노에 찬 목소리였다.
결국 최후의 심판이 시작되는가 생각하는 순간, 불쑥 튀어나온 작은 손이 공작의 팔을 잡았다.
멈칫한 공작이 돌아보자 아가씨가 제 귓가에 종이꽃 올 꽂았다. 그러고는 양손을 꽃받침처럼 턱 밑에 받친 채로 활짝 웃었다.
“짠!”
"……."
“어때요? 귀여워요?"
공작은 말없이 아가씨를 바라봤다. 얼음이 녹듯 그 의 눈에 서린 싸늘한 분노가 사라졌다. 그는 더없이 다정한 눈으로 말했다.
“아주 예뻐.”
“헤헤.”
수줍게 웃은 아가씨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걷기 시작했다. 공작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뒤로 따라붙었다.
그것을 똑똑히 본 램버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배짱이 보통이 아닌데?'
다른 사람이었다면 분노한 공작의 앞에서 얼어붙었을 것이다. 한데 얼어붙기는커녕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 버리는 아가씨의 담력은 가히 대장군감이었다.
‘어쨌든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아가씨.'
죽다 살아난지도 모르는 금사자들을 힐끗 쳐다본 램버트가 공손히 눈을 내리깔았다. 다른 사람들 역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아가씨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이블린은 의도치 않게 호감을 잔뜩 사며 공작가에 입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