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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4화 (14/240)

14화

순간 웃고 있던 세스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변했다.

“전령인가?"

“아닌 것 같습니다.”

“마차를 세워 내가 직접 상대하지.”

담담하지만 차가운 목소리였다. 나는 불안한 마음을 숨기며 물었다.

“저도 마차에서 내릴까요?"

“아니, 괜찮아 금방 끝날 거야."

달래듯 내 손등을 다독인 세스가 마차의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살금살금 문 쪽으로 다가가서 커튼 틈으로 밖을 엿봤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세스의 뒷모습이었다. 그리고 세스의 앞에 처음 보는 기사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마차를 따라왔다는 사람인 것 같았다.

“무례를 저질러 죄송합니다. 은백합 기사단의 키츠리델이라고 합니다.”

기사는 정말 면목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세스는 아무런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기사가 불편한 기색으로 꿈지럭댈 쯤에야 세스의 입이 열렸다.

"허락 없이 쫓아왔으니 당장 베어 버려도 할 말이 없겠지.“

“노여워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나 폐하께서 이블린 아가씨에게 전하는 말씀이 있어 어쩔 수 없이 결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뭐? 나한테?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세스가 기사의 말을 끊었다.

“듣지 않겠다.”

아니, 뭐요?

나만큼이나 당황한 기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폐하께서 반드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경이 뭐라고 말해도 나는 듣지 못한 걸로 하겠다. 물러가라.”

“이러시면 폐하께 있는 그대로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말씀드려라 폐하께서 내 약혼녀를 빼돌리셨을 때 내 인내심도 바닥났다고 전하면 이해하실 거다."

은은한 분노가 깃든 말에 기사가 입을 다물었다. 오늘의 두 번째 조개였다.

입을 다문 조개를 돌려보낸 세스가 문을 열었다. 나는 재빨리 원래 자리로 돌아가서 시침을 뚝 뗐다. 그런 나를 뻔히 보던 세스가 놀리듯이 말했다.

“이비, 엿듣는 건 나쁜 버릇이야.”

어떻게 알았지.

나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제가 안 들었으면 공작님이 뭘 하셨는지도 몰랐을 걸요 이제 어떡해요? 폐하께서 저한테 뭐라고 하셨는지 알 수 없게 됐잖아요.”

“폐하께서 무슨 말을 하실지도 알고 당신에게 전해 줄 생각인데?”

"네? 안 듣고 어떻게 아세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싱긋 웃은 세스가 마차에 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차가 출발했다. 세스는 마차가 속력을 낼 때쯤에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선 아마 약속을 지키라고 말하고 싶으셨겠지 하지만 정식으로 전령을 보내면 체면이 서지 않으니 몰래 기사를 보내신 거야.”

"약속이요? 저 폐하한테 약속한 게 없는데.”

“잘 생각해 봐.”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봤지만 진짜 왕에게 약속한 게 없었다.

왕은 시녀가 되라고 했고, 나는 공작님에게 물어본 다고 했고. 그게 전부였다.

세스가 내 기억을 되살리듯이 말했다.

“폐하께서 하루를 기다린다고 하셨지?"

"네.”

"당신은 그걸 하루 동안 생각해 보라는 뜻으로 받아 들였고.”

".······아니에요?"

“그건 하루 뒤에 당신의 승낙을 받겠다는 듯이야.”

세스는 내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며 왕의 의도를 설명해 주었다.

애초에 속국의 노예에 불과한 내게는 왕의 제안을 거절할 권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내 보호자인 세스는 대신 거절할 수 있지만, 왕이 치료를 핑계로 나를 다른 궁으로 빼돌렸다. 세스는 왕의 속셈을 알면서도 내 상태가 나빠질까 봐 어쩔 수 없이 넘겨줬다고 했다.

결국 나는 시녀가 되겠다는 말을 할 때까지 계속 궁에 갇혀 있을 운명이었다.

"옷을 가져다주지 않은 시녀도 당신을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을 거야. 물론 시녀장인 피오나를 통해서가 아니라 왕의 은밀한 지시를 들었겠지.”

하긴, 일개 노예가 왕의 제안을 거절하면 영 체면이 서지 않을 것이다. 이해는 하면서도 기분이 나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더러운 왕정 사회 같으니라고.

“그럼 대놓고 명령을 하면 되잖아요. 왜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척을 해요?"

“그게 권력자의 방식이니까.”

담담한 대답에 갑자기 말문이 턱 막혔다. 명령하지 않아도 따르게 한다. 원하는 것을 스스로 바치게 만든다. 나는 그런 방석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대역이 되려면 그런 것도 알아야 하는 거겠지.'

왠지 갈 길이 멀게 느껴졌다.

나는 힘없이 쿠션 위로 늘어졌다. 세스가 위로하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죽 장갑의 느낌은 별로였지만 쓰다듬어 주는 건 좋았다.

"피곤해?“

“피곤하기도 하고, 제가 눈치 없이 군게 창피해서요.”

왕도 얼마나 당황했을까. 눈치없는 노예가 말뜻도 못 알아들어서. 기가 죽어서 투덜거리자 세스가 잠시 손을 멈췄다.

“나는 당신에게 감탄하는 중인데.”

“어떤 부분에서요?"

“당신을 시녀로 만들려는 폐하의 계획도, 몰래 빼내려던 내 계획도 한 번에 무산시켰으니까.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업적이야.”

이거 칭찬이지? 놀리는 거 아니지? 의심스러운 눈으로 관찰했지만 어느 쪽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를 시험하듯 물었다.

“제가 창문으로 탈출해서 감탄하시는 거예요?"

“그래. 나만큼이나 폐하도 기겁하셨을걸.”

세스는 소년처럼 웃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반히 올려다보다가 문득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제가 뛰어내릴 때요. 왜 거기 서 계셨어요?"

“당신이 걱정돼서.”

세스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낯선 곳에서 혼자 눈을 뜨면 불안할 테니까 어쩌면 당신이 창문을 열고 도움을 청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고 흠칫 놀랐다. 왜 이럴 때 두근거리고 난리야.

‘이건 인류애다. 신입사원을 걱정하는 사장님의 마음에 감동한 거야.'

속으로 염불을 외듯 중얼거리는데, 세스가 이상한 눈으로 나를 봤다.

“그게 대체 무슨 표정이지?"

“극도로 감격한 표정이요. 저를 걱정해 주셨다니 놀라고 기뻐서요.”

열심히 둘러 대자 세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당신은 나를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생각하는 모양이군."

“아니, 왜 모함을 하세요? 전 공작님을 좋은 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일중독에 걸려서 남을 방치하고, 맹수 앞에 내던지는 무신경한 변태가 아니라?"

“헉!"

그러고 보니 왕 앞에서 세스가 변태라는 둥, 잘생긴 얼굴만 믿고 막말을 한다는 둥 온갖 소리를 했었다.

‘공작을 변태라고 부른 것만으로도 사형 아니야?'

나는 일단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말했다.

“공작님 , 사람이 살다 보면 가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진지하게  하기도 해요. 아시죠?"

“그래서 당신의 진심이 아니었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진심으로 한 거죠.”

내 개소리에 세스는 넘어가 줄까, 말까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얼른 이마를 짚고 비틀거렸다.

“아앗, 갑자기 현기증이!"

쿠션 위로 털썩 엎드리는 나를 본 세스가 침묵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죽은 척하기 시작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그가 다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좋아, 좋아 이대로 넘어가자고.

“이비.”

세스의 부름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했다. 아차해서 혼신의 연기력을 끌어 올리는 순간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힘들게 해서 미안해.”

사실은 이게 진짜 그가 하고 싶은 말인 것 같았다.

나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무서울 정도로 단정한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 서린 미안함 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어차피 나는 대역으로 고용된 사람이고, 그가 미안해 할 건 하나도 없는데

‘괜찮다고 할까? 아니면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허세를 부릴까?’

하지만 그런 말로는 세스의 미안함을 덜어 낼 수 없 올 것 같았다. 냉큼 몸을 일으킨 나는 흠흠 헛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 이번 임무는 엄청 힘들었어요. 그러니까 보상을 주세요.”

“보상?”

“힘든 일에는 보상이 따라야죠. 용돈, 값비싼 선물, 맛있는 음식 뭐든 다 좋습니다."

어서 달라는 것처럼 두 손을 모아서 내밀자 세스가 진지하게 물었다

"용돈, 값비싼 선물, 맛있는 음식 그 외에 바라는 건?"

“아니, 그걸 전부 달라는 말은 아닌데요.”

받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세스가 덜 미안해하길 바라서 한 말일 뿐이니까.

“당신 말대로 힘든 일에는 그만큼의 보상이 따라야지.”

우와 이 시대의 참된 사장님이다.

나는 존경을 담아 반짝이는 눈빛을 보냈다. 그런 나를 세스가 반히 쳐다봤다.

“그러니 당신이 진짜 원하는 걸 말해 봐.”

“어…….”

내가 원하는 건 무사히 임무를 마치는 것. 그 외엔 바라는 게 없었다.

많은 것을 바랄수록 제거당할 확률이 높으니까. 세스가 원하지 않아도 그의 측근이냐 왕이 손을 쓸 수도 있으니까.

죽으면 아무 쓸모없는 것들에 욕심내지 말기. 이게 대역을 시작하면서 내가 세운 규칙이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하면 호구처럼 보일 테고.’

대가 없이 부려 먹어도 되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질색이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적당한 보상을 생각해 냈다.

"진짜 제가 원하는 걸 말해도 돼요?“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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