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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1화 (11/240)

11화

“예? 뭘 한다고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왕은 세스 쪽을 눈짓했다.

“답지 않게 네게 꽤 호의적인 것 같다만 잘만 유혹하면 넘어오지 않겠느냐?”

······저분은 저를 개로 생각하십니다만.

우중충해진 내 얼굴을 보고 헛기침을 한 왕이 말을 바꿨다.

“유혹이 통하지 않아도 덮칠 기회를 노릴 수는 있겠지 일이 잘 풀려서 아이만 가진다면 대역이 아니라 진짜 공작 부인이 될지도 모르니까.”

“어, 설마 그것 때문에 저를 부르신 건가요?”

왜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나 했더니. 내가 진짜 공작 부인 자리를 노릴까 봐 그런 거였어?

어이없어하는 시선에 왕이 재차 헛기침을 했다.

“질문은 내가 한다. 그런 생각이 없느냐?”

“아뇨. 전혀요. 저는 그럴 야망도 없고, 의욕도 없어서요.”

나는 아주 또박또박 말했다. 이쯤 되니 진실만을 말 하게 하는 반지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니면 믿어 주지 않았을 테니까.

왕이 의심스러운 듯이 물었다.

“앞으로의 인생이 완전히 바뀔 기회가 될 텐데?”

“예, 인생이 내리막을 타고 생활이 지옥이 되겠죠. 전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폐하.”

“돈과 권력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은 많다.”

“전 욕심이 아주 많아서요. 그것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구나.”

왕은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내 대답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세 가지 질문은 이미 끝났다. 내가 더 이상 답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 말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제가 잡아먹으려고 사 온 돼지라고 하셨죠. 하지만 일이 끝나고 잡아먹힌다고 해도 전 대역을 맡았을 거예요.”

뒤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확인하진 않았다. 세스를 힐끗 쳐다본 왕이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말한 알량한 은혜를 갚기 위해서?”

“음, 그런 것도 있지만 제가 납득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어서요.”

나는 전생을 통해 사람은 반드시 축는다는 것을 배웠다. 지금의 삶이 아무리 행복해도 언젠가는 끝이 난다는 것을. 내가 생각한 내일이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남들 놀 때 빡세게 공부해서 좋은 직장 들어가도, 남들 펑펑 쓸 때 알뜰살뜰 모아서 목돈 만들어도 죽으면 그냥 끝이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뜯고 후회하고 펑펑 울어도 소용없다.

그러니 먹고살 돈만 있다면 많이 모으려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 순간순간 즐겁게 웃고 최선을 다해서 행복해지자고 결심했다.

좀 더 욕심을 부리자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괜찮은 모습으로 남고 싶었다. 사람의 생명은 영원하지 않지만, 추억 속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으니까.

“전 제 자신을 좋아하면서 살고 싶어요. 남자를 덮쳐서 신분 상승을 노리는 건 좀 폼이 안 나잖아요. 억지로 결혼한다고 해서 행복할 것 같지도 않고요. 차라리 이용당하다가 죽는 게 낫죠. 저는 은혜를 갚으려다가 죽은 사람이고, 저를 죽인 사람이 나쁜 놈이니까요.”

잠시 말이 없던 왕이 싸늘한 얼굴을 했다.

“어리석고 멍청하구나. 그런 것이 너를 이용하고 죽 이려는 자에게 조금이라도 망설임을 줄 것 같으냐?”

“망설이라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씀드린 건데요.”

“건방진 것.”

매서운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무 열심히 말하다가 살짝 선을 넘은 것 같았다. 뒤늦게 어깨를 움츠리는 나를 노려보던 왕이 세스를 향해 말했다.

“세 대답 중 단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역 시 처음부터 예감이 안 좋았어!

당장 무릎이라도 꿇고 빌어야 하나 생각하는 순간, 왕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쓸모없는 팔을 받아 어디에 쓰겠느냐. 대신 저 아이를 내 시녀로 받겠다.”

“네?!”

나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기겁하는 나를 본 왕의 눈이 스윽 가늘어졌다.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예전부터 꼭 시녀가 되고 싶었습니다.”

나는 차렷 자세로 공손하게 말했다. 그때, 갑자기 몸이 뒤로 확 쏠렸다. 세스가 나를 잡아당겨 등 뒤로 감춰 버린 것이다.

“폐하, 전 그녀를 내드릴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너무 놀라서 머리가 곤두서는 것 같았다. 지금 당신 팔이 날아갈 위기인데요? 왜 이렇게 사람이 무모해!

“저 애는 좋다고 하지 않느냐?"

“억지로 받아 낸 대답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폐하답지 않으십니다.”

세스의 등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왕이 불쾌해하는 게 느껴졌다. 서둘러 수습하려는데 세스가 앞을 가로막았다.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닐 텐데 도저히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정말 큰일 난다고요!”

소리 죽여 항의했지만 세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사실은 고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고, 제게서 빼앗으려고 욕심을 부리신 거라고.”

“욕심이라니! 도와주려고 한 것뿐이다!”

발끈하는 왕의 목소리는 기세가 약해져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세스를 콱 붙잡았다. 멈칫 하는 세스의 옆구리 쪽으로 머리를 밀어 넣자 간신히 앞이 보였다. 왕이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게 무슨 괴상망측한 짓이냐?”

그러고 보니 세스를 뒤에서 끌어안고 얼굴만 내민 자세였다. 당황해서 손을 놓자마자 다시 뒤로 밀려났다. 이 남자가 진짜!

결국 다시 세스의 옆구리에 달라붙은 나는 면목 없다는 양 말했다.

“죄송합니다. 너무 급해서요. 그런데 진짜 제 대답이 마음에 드셨어요?”

내 물음에 얼굴을 꾸깃꾸깃 구긴 왕이 팩 고개를 돌렸다. 원래라면 무서운 장면이었을 텐데, 지금은 그냥 심통이 난 사람처럼 보였다.

“폐하.”

세스가 대답 없는 왕을 재촉했다. 눈썹을 꿈틀한 왕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주 마음에 든 건 아니지만, 팔을 자를 생각은 없어졌다.”

“저, 정말요?”

“그래.”

그 말을 듣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주르륵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이비?"

바닥에 닿기도 전에 세스가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헝겊 인형처럼 달랑 들린 나는 실없이 웃었다. 이 힘센 팔을 내가 지켜 내다니 , 정말 다행이다.

“긴장이 풀렸나 봐요. 이제 괜찮아요.”

어서 내려 달라는 뜻으로 손을 파닥거렸지만 세스는 굳은 얼굴로 나를 살폈다. 급하게 다가온 왕까지 거기에 합세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냐?"

“폐하께서 이 지경이 되도록 몰아붙이셨잖습니까.”

"홍, 네가 목을 졸라서 그런 게 아니고?“

“제가 언제 목을 졸랐단 말입니까.”

“손가락 하나로 사과도 으깨는 놈이 팔뚝으로 누르면 당연히 숨이 막히지.”

이 사람들 또 싸우네.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아까처럼 긴장되진 않았다. 똑 닮은 얼굴끼리 아옹다옹 싸우고 있으니 친척 집에 온 기분이다.

‘아니 , 그냥 그건가?'

친척이 데려온 강아지를 주물럭거리다가 몸살 나게 만들고, 강아지가 뻗은 걸 보고 열 받은 주인이 화를 내서 싸우고. 아주 평범한 명절 풍경이었다.

“······허허.”

“뭐야, 이 녀석 웃고 있잖아?”

무심결에 웃음이 셨는지 왕이 내 뺨을 꼬집었다. 나를 안고 있던 세스가 몸을 핵 돌리며 신경질을 냈다.

“건드리지 마십시오.”

"뭐야? 네 것도 아니 면서 유세냐?"

“제 약혼녀입니다.”

“흥, 약혼 따윈 언제든 깨질 수 있지,”

나는 왕을 노려보는 세스의 팔을 토닥였다. 워워. 나는 당신 개니까 진정해.

멈칫한 세스가 다시금 나를 살폈다. 왕이 맨손으로 내 뺨을 만져서 걱정하는 듯했다. 다행히 손이 닿았을 때 전해진 것은 간질간질한 감정이었다. 왕은 이제 나를 싫어하지 않는 모양이다.

괜찮다고 웃어 주고 싶었지만 아까부터 계속 눈이 감겼다. 긴장 상태로 너무 오래 있었더니, 안 그래도 약한 몸에 한계가 온 것 같았다.

아, 여기서 갑자기 기절하면 세스가 더 걱정할 텐데.

“저 조금만 잘게요. 어제 한숨도 못 자서······.”

마지막 힘을 모아 변명을 짜낸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어쨌든 임무는 완수했으니, 안심이다.

* * *

눈을 뜨자 호화스러운 침대가 나를 반겼다.

천장엔 온갖 동물들이 수놓아져 있었고, 두꺼운 침 대 휘장이 빛을 완전히 차단했다.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내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때, 휘장 한쪽이 스르륵 열리더니 왕이 나타났다. 깜짝 놀란 나는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켰다. 시큰둥한 눈으로 나를 보던 왕이 명령했다.

“도로 누워라.”

나는 일어날 때보다 빠르게 드러누웠다. 동시에 열심히 눈을 굴려 세스를 찾았지만, 그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시무룩해진 나를 본 왕이 피식 웃었다.

“녀석은 쫓아냈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 해도 잠 옷 차림의 여자와 한방에 둘 수는 없지.”

그런 배려 전혀 고맙지 않은데요.

속으로 엉엉 울고 있자니 왕이 내 뺨을 쿡 찔렀다. 전해지는 감정은 나쁘지 않았지만, 찔린 뺨이 너무 아 파서 눈물이 날 뻔했다.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녀석에게 들볶였는지 아느냐?"

“정말 죄송합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죄하자 왕이 팔짱을 꼈다. 그러곤 혼잣말처럼 투덜거렸다.

“전엔 내가 달라고 했을 때 거절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 다 컸다고 대들고. 귀엽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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