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놀라 펄쩍 뛰는 나를· 세스가 제지했다.
“괜찮아.”
“안 괜찮아요!”
다 망했는데 뭐가 괜찮아.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반히 쳐다보던 왕이 세스에게 눈을 돌렸다.
"독한 것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은 모양이구나.”
“폐하께서 기밀 누설의 죄를 물어 그녀를 벌하실 것 같았습니다.”
“쓸데없이 머리 굴리기는. 내가 그래서 널 싫어하는 거다.”
나는 둘 사이의 대화를 들으며 머리를 굴렸다.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다. 여전히 침착한 세스의 태도로 볼 때 이런 일이 일어날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때, 왕이 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길고 마디진 손가락에 은색 반지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보석 하나 없이 밋밋한 반지는 마치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반짝였다.
“제왕의 반지다. 왕가에 전해지는 신기로, 마주 선 자에게 진실만을 말하게 하지.”
"예?"
“오신기에 대해 모르나 보군. 말 그대로 신의 힘이 깃든 보물이 다. 자아가 있어 주인을 선택하고 힘을 빌려주지.”
왕은 나를 다시없는 무식쟁이 취급하며 설명했다.
오신기라는 말을 듣자 그제야 얼핏 생각났다. 저택에서 본 역사서에 비슷한 내용이 있었다. 대충 어떤 할 일 없는 선이 어떤 사람에게 다섯 개의 보물을 줬는데, 그걸로 나라 하나를 뚝딱 세웠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게 단군 신화 같은 건 줄 알았지 , 실물이 존재할 줄은 몰랐다고.
게다가 진실만을 말하게 하는 반지라니. 네가 왜 여기서 나와?
까놓고 말해서 내게도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으니, 비슷한 힘을 가진 보물이 있다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하지만 내 능력은 상대와 접촉해야 한다는 제한이 있었다. 왕의 반지처럼 아무런 조건도 없이 실행되는 능력은 완전히 사기였다.
‘어, 잠깐만 이거 위기 상황이잖아?'
잘못하면 브란에 대한 일이나, 내 능력까지 까발려 질 수도 있었다. 정말 재수 없으면 마녀로 몰려서 화형 당할지도 모른다.
정신이 번쩍든 나는 세스에게 소리쳤다.
“아직 늦지 않았어요. 어서 절 기절시켜요!”
“이비 , 진정해.”
“이러다 제가 비밀을 말할지도 모른다고요. 으앙아! 그걸 왜 말해!”
나는 제멋대로 움직이는 입을 찰싹 때렸다. 남이 내 능력에 당하는 것만 봤지, 내가 당할 줄은 몰랐는데 진짜 딱 죽을 맛이었다.
팔짝거리는 나를 보고 왕이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오호, 그 비밀이 뭔지 아주 궁금하구나.”
나는 어서 기절하겠다는 일념으로 세스에게 다리를 갖다 박았다. 한숨을 쉰 세스가 나를 꽉 끌어안아 못 움직이게 했다.
“쉿, 괜찮으니 가만히 있어.”
“껙!”
어찌나 힘이 센지 짜부라질 것 같았다. 축 늘어지는 내 모습에 놀라 팔의 힘을 푼 세스가 괜히 왕을 탓했다.
“잔인한 짓을 하시는군요. 분명 제 약혼녀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내가 인정하기 전엔 아니다.”
“폐하께서 반대하셔도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괘나 건방져졌구나. 내가 널 어쩌지 못할 것 같으냐?”
꼼짝도 못 하고 둘이 싸우는 소릴 듣고 있자니 고래 사이에 끼인 크릴새우가 된 기분이었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던 나는 간절하게 부탁했다.
"두 분이 이야기하시는 동안 저는 밖에 나가 있으면 안 될까요."
그러자 따끔거리는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나는 그냥 가만히 있을 걸 그랬다고 후회하며 죽은 척을 했다.
“이대로는 끝이 없겠구나. 좋아, 내가 한발 양보하지.”
왕이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절대 너그럽지 않은 말이 이어졌다.
“이블린 그란. 네게 세 가지를 묻겠다. 그중 하나라도 마음에 드는 답을 하면 널 인정하마. 하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엔 네 목숨을 받겠다.”
"······?"
뭐죠. 그거 그냥 죽이겠다는 말 아닌가요.
“폐하.”
"네가 뭐라고 해도 나는 저것을 시험할 것이다. 반역할 생각이 아니라면 감히 나서지 마라.”
왕은 세스가 입을 열자마자 쏘아붙였다. 한숨을 쉰 세스가 말했다.
“그렇다면 조건을 바꿔 주십시오.”
“난 더 이상 양보할 생각이 없다만.”
“그녀의 목숨 대선 제 팔을 내놓겠습니다.”
예? 뭘 내놓는다고요? 화들짝 놀라는 나와 달리 왕은 코웃음을 쳤다.
“목숨 대신 팔이라니. 그건 너무 가볍지 않느냐.”
“세 가지 답 중 단 하나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제 오른팔을 자르겠습니다.”
조건이 더 나빠졌잖아!
당황한 나는 세스의 옆구리를 푹푹 찔렀다. 하지만 세스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잠시 말이 없던 왕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오른팔을 자르다니. 검사로서의 생명을 포기하겠다는 말이냐?”
“외람되오나 제가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주 자신만만하구나. 좋다.”
“전 안 좋아요!”
나는 급하게 소리쳤다. 일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춰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세스의 팔을 잘잘 흔들며 다그쳤다.
“아니, 왜 갑자기 침착하게 미치고 그러세요!”
“당신이 죽는 것보단 내 팔을 자르는 게 낫지.”
“하나도 안 낫거든요!”
누가 노예 하나 살리겠다고 자기 팔을 잘라. 왕이 인정해도 내가 인정 못 한다.
“그냥 약혼을 없었던 일로 하면 되잖아요. 폐하, 저 약혼녀에서 사퇴하겠습니다!”
“나라의 모두가 알게 된 일을 네 멋대로 그만두겠다고? 왕에게 망언을 지껄인 죄로 사지가 찢기고 싶으냐?"
왕이 폭발 직전의 화산 같은 얼굴로 말했다. 박력에서 밀린 나는 깨갱 하고 움츠러들었다. 날 노려보는 왕의 눈에 살기가 어려 있었다.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뿐이다. 내 시험에 용하든가, 아니면 왕을 기만한 죄로 죽어라.”
나는 겁을 먹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공작님의 팔을 지를· 수는 없으니 그냥 제가 죽죠, 뭐.’라고 말할 정도로 용감하지도 않았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내 어깨를 살짝 쥔 세스가 속삭였다.
“괜찮아. 날 믿어.”
“대, 대답하는 건 전데요?"
“내가 당신이 이기는 쪽에 걸었으니까. 난 내기에서 진 적이 없거든."
나직한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느껴졌다. 이 상황에서 웃다니 정말 태평하다 싶으면서도 떨림이 점차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나는 조그맣게 물었다.
“진짜 제가 이길 것 같아요?”
“응.”
세스는 주저 없이 답했다. 뭘 믿고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그를 믿고 싶었다. 깊게 심호흡을 한 나는 허리를 쭉 폈다.
"좋아요 까짓거 한번 해 볼게요.”
살짝 웃은 세스가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당당해 보이려고 애쓰며 말했다.
“폐하의 시험을 받겠습니다.”
“그리 긴장할 것 없다. 네게 흑심이 없다면 쉽게 넘어갈 수 있을 테니.”
왕이 좀 누그러진 목소리를 냈다.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지 나는 주먹을 꾹 쥔 채로 질문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뜸을 들이 던 왕이 질문을 던졌다.
“세스를 어떻게 생각하지?”
“잘생긴 변태요.”
······어 ?
1 초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 나간 말에 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니야! 방금 말은 진심이 아니에요. 남을 쿡쿡 찌르면서 괴로워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 파탄자라고 생각했지만, 변태라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글렀다! 첫 번째 답부터 글렀어!
나는 얼굴을 감싸 쥐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왕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얼굴만 봐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덜덜 떨면서 고개를 돌리자 왕과 똑같은 무표정으로 세스가 나를 쳐다봤다.
“이비,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폐하 저 그냥 죽을게요.”
절망에 차서 바르작거리는 나를 보고 고개를 폭 숙인 왕이 어깨를 들썩였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왕을 바라봤다.
지금 웃으신 건가요? 그럼 저는 무죄?
“두 번째 질문을 하지.”
하지만 고개를 든 왕의 얼굴엔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너무 긴장해서 잘못 본 모양이다. 시무룩해진 나는 얌전히 손을 모으고 다음 질문을 기다렸다.
왕이 나를 뻔히 보며 입을 열었다.
“세스를 그렇게 싫어하면서 왜 대역을 맡기로 했지?.”
“예? 저 공작님 안 싫어하는데요? 물론 잘생긴 얼굴 만 믿고 막말을 하거냐, 일중독에 걸려서 남을 방치하거나, 갑자기 맹수 앞에 내던지거나 하는 무신경한 점은 있지만 그렇다고 싫어하진 않아요. 절 구해 주신 분이니까 감사하고 있어요. 대역을 맡은 이유도 공작님께 은혜를 갚고 싶어서였어요.”
와, 사람 속마음이 이렇게 무섭다. 구체적으로 생각 하지도 않았던 것들이 술술 흘러나온다. 내 말을 들으면서 내가 그랬구나 하고 납득하는 건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거짓말이 아니면 어리석은 말이구나. 은혜를 갚고 싶다니. 잡아먹으려 사 온 돼지가 주인에게 고맙다고 하는 격이다.”
왕은 대놓고 비웃었다 내가 동생의 미래를 약속받았다는 사실은 모르는 것 같았다. 사실 세스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사 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는 내가 필요할 때 손을 내밀어 준 유일한 사람이니까.
어쨌든 두 번의 질문과 답이 끝났다. 남은 것은 마지막 질문뿐이었다. 세스를 돌아보기 무서웠던 나는 빨리 모든 게 끝났으면 싶었다. 턱을 만지작거리며 뭔가를 생각하던 왕이 물었다.
“이블린 그란 세스를 유혹해서 진짜 공작 부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