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괜찮아요. 전혀 아프지 않아요.”
“다행이군.”
세스의 손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나는 약간의 아 쉬움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런데 간질간질한 온기는 곧바로 사라지지 않았다. 조금씩 희미해지긴 했지만, 포근한 담요처럼 몸을 감싸며 남아 있었다.
천에 옮기지 않고 이렇게 남겨 둘 수도 있는 거였구나. 전에는 간직하고 싶은 감정이 없어서 전혀 몰랐다. 나는 간질간질한 온기를 즐기며 말했다.
“제 말이 맞죠? 손이 닿아도 괜찮잖아요.”
“당신은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해야 했어.”
“그간······ 그렇죠. 죄송해요.”
변명하려던 나는 얼른 사과했다. 뭐라고 해도 이 눈치 빠른 남자가 속아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느니 직구로 부딪히는 게 나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대역을 그만두라고 하실 것 같았어요. 일하는 데는 아무 문제없어요. 절 싫어하는 사람이 만져도 참을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만두라는 뜻이 아니야 참을 이유가 없다는 거지.”
“네?”
"누구도 내 허락 없이 당신을 만지지 못할 테니까.”
당황해서 눈을 깜빡이던 나는 뒤늦게 수긍했다.
“그, 그렇겠죠? 제가 공작 부인 역할이니까요.”
명색이 공작 부인인데 이놈 저놈이 손대면 안 되지.
애써 납득하는 나를 보고 세스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잘 알고 있군.”
······그럼 왜 그렇게 악당처럼 웃으세요?
묻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 했다. 왠지 대답을 들으면 후회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 * *
전생의 나는 배낭여행을 꿈꿨다.
열심히 돈을 모아서 유럽에 가고 싶었다. 중세의 혼적이 남은 거리를 걷고 화려한 성을 구경할 거라고, 언젠가는 꼭 갈 거라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어떻게 보면 꿈을 이룬 건데.’
눈부시게 화려한 궁전은 곳곳이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태양 궁이라는 이름답게 대기실조차 번쩍번쩍 빛났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게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긴장해 있었다.
“오른발이 뒤로, 왼발은 앞으로 무릎을 굽히면서 고개를 숙이고······.”
“이비.”
대기실 안을 걸어 다니는 나를 세스가 불렀다. 놀라서 돌아보자 그가 손짓했다.
“그만하고 이리 와.”
“아직 연습을 덜했는데요.”
“그만하면 충분해. 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세스의 옆에 앉았다. 안 그래도 울렁거리던 속이 더 안 좋아졌다. 창백해진 나를 향해 세스가 물었다.
“괜찮아?”
“안 괜찮아요. 여기서 토해도 돼요?"
“안 돼.”
단호한 거절과 달리 조심스러운 손길이 이마를 짚었다. 장갑 너머로 느껴지는 온기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눈을 감고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물이 라도 갖다 줄까?"
“아뇨, 그보다 지금처럼 계속 말해 주세요.”
"응?“
“공작님 목소리 듣고 있으니까 좀 나온 것 같아서요.”
세스의 목소리는 낮고 서늘해서 듣기 좋았다. 들을 때마다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이 목소리로 동화책이 나 읽어 줬으면 좋겠다.
잠시 침묵하던 세스가 말했다.
“갑자기 그러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무거나 괜찮아요. 정 힘들면 노래 부르셔도 돼요.”
어 , 생각해 보니 노래가 더 좋을 것 같은데?
나는 반짝 눈을 뜨고 세스를 쳐다봤다. 기대 어린 눈빛에 멈칫하기도 잠시, 세스가 빙그레 웃었다.
“당신이 흥미로워할 이야기가 생각났어.”
기분 탓인가 왜 말을 돌리는 것 같지.
”뭔데요?“
"최근 아카데미 편입 시험에 응시한 어떤 학생이 만 점을 받은 모양이야. 편입에 이어서 월반도 가능할 것 같다고, 미래가 기대되는 인재라는 이야기를 들었어.”
“어 , 혹사······.”
나는 눈으로 그게 내 동생의 이야기냐고 열심히 물었다. 세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입꼬리가 저절로 쑥 올라갔다.
“드디어 웃는군.”
세스의 말에 머쓱해졌지만 이내 활짝 웃었다. 기쁘다는 걸 애써 숨기고 싶지 않았다. 나를 보는 세스의 표정이 느슨해졌다 그걸 보자 왠지 장난이 치고 싶었다.
“그리고요?”
“응?”
“아직 몇 마디 안 하셨잖아요.”
나는 난처해하는 그를 향해 눈을 반짝였다. 노골적인 눈빛 공격을 이기지 못한 세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정말 예뻐.”
흠, 속 보이는 칭찬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나는 보란 듯이 치맛자락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좀 더 칭찬해 주세요. 아침부터 이거 입는다고 엄청 고생했다고요.”
“드레스는 여기 오는 동안 몇 번이나 칭찬했는데, 기억 안나?”
“······어?”
나는 당황해서 눈을 굴렸다. 사실 너무 긴장해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나를 본 세스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 잘 어울려 진심이야.”
“정말요?”
오늘을 위해 고른 옷은 아주 연한 분홍색 드레스였다. 사각거리는 얇은 실크를 몇 겹이나 겹쳐서 활짝 핀 꽃 같은 모양이다. 목선은 유행에 따라 어깨까지 살짝 드러냈고 , 짧은 소매와 스커트가 동그랗게 부풀어서 굉장히 귀여운 디자인이었다. 무엇보다 드레스 밑단을 빙 두르듯 장식된 리본이 마음에 들었다.
“아주 귀엽고 사랑스러워.”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칭찬을 들으니 좀 민망했다. 쑥스러움에 손을 꼼지락거리던 나는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이상한 말을 들었는데요.”
"응?"
“저택에서 일하는 분들이 드레스 입는 걸 도와주셨거든요. 평소처럼 혼자 입겠다고 했더니 공작님이 허락해 주셨다면서 장갑을 끼더라고요.”
나는 지금까지 시중 받는 것을 피해 왔다. 닿을 때마다 상대의 생각과 감정이 전해지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걸 막으려면 피부에 닿지 않게 장갑을 끼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중을 들 때 장갑을 껴 달라니, 어떻게 말해도 불쾌하게 들릴 것 같았다. 그래서 쭉 혼자 몸단장을 하고 있었는데 오늘 갑자기 돌발 상황이 생겼다.
“자자, 공작님도 허락하셨으니 어서 이리 오세요.”
장갑을 낀 시녀들이 어찌나 음침하게 웃던지. 거부 할 수가 없었다.
처음엔 세스가 내 능력에 대해 말했나 싶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태도는 전보다 더 친절했다. 내 몸에 손대는 것을 꺼리지도 않았다. 덕분에 마사지에 머리 손질까지 야무지게 받았지만 세스가 무슨 마술을 부린 건지 정말 궁금했다.
“무슨 말을 하신 거예요? 허락은 또 뭐고요?”
“음.”
세스가 난처한 듯 내 눈을 피했다.
”뭔데요? 지금 고백하면 화 안 낼게요.”
나는 그의 손등을 콕콕 찌르며 재촉했다. 내 손을 살짝 잡아 멈추게 한 세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내가 당선을 너무 사랑해서 다른 사람이 만지는 걸 견딜 수 없다고 했지.”
“네?”
“하지만 시중을 못 받게 할 수는 없으니 항상 장갑을 끼고 있으라고 했어.”
나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세스를 쳐다裁다.
“거짓말이죠?”
“아니.”
“진짜요? 진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응.”
경악하는 나를 보고 낮게 웃은 세스가 덧붙였다.
“말했잖아. 당신을 사랑받는 공작 부인으로 만들겠다고.”
“그게 무슨…… 혁!"
그러고 보니 그런 컨셉이 있었다!
완전히 잊고 있었던 티가 났는지 세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붙잡고 있던 내 손을 가까이 끌어당기며 물었다.
“아니면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 줄까?”
“아뇨!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아니, 말해 줄게 다시는 잊지 못하게.”
“토, 통촉하여 주십시오!"
“무슨 말인지 잘 안 들리는데.”
이러지 마. 제발.
절박하게 버둥거리는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세스의 품에 끌려 들어가기 직전이었던 나는 반갑게 고개를 돌렸다. 키가 크고 무표정한 여자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백금발을 높이 틀어 올리고 푸른 제복을 입었는데, 차가운 얼굴과 그린 듯이 잘 어울렸다. 그리고 세스와 붕어빵처럼 꼭 닮아 있었다. 약간의 색 차이는 있지만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와, 세상에 저런 얼굴이 둘이나 있네.’
나는 대자연의 신비에 감탄했다. 그때 세스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국왕 폐하시다.”
뭐라고요?
화들짝 놀라는 나를 세스가 자연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거의 동시에 내 앞에 우뚝 멈춰선 왕이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공작 부인이 되겠다는 맹랑한 것이냐?”
인사할 타이밍을 놓친 나는 입을 뻐끔거렸다. ‘예이, 제가 바로 그놈입죠.’하고 이실직고해야 할지, 아니면 죽을죄를 지었다고 빌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버벅이는 내 등을 감싼 세스가 적절한 순간에 나서 주었다.
“여기까지 친히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폐하.”
"흥, 내 궁에서 내가 못 갈 곳이 있을까?“
“이왕 오셨으니 제 약혼녀의 인사부터 받아 주십시오.”
세스의 눈짓에 정신을 차린 나는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이, 이블린 하인즈가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좋아 좀 더듬었지만 실수는 안 했다. 두근거리며 숨을 죽이고 있자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라.”
나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상체를 바로 했다. 왕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얼굴에 구멍이 푹푹 뚫리는 것 같았다.
“모두 나가.”
왕의 손짓에 줄줄이 따라 들어온 시종들이 황급히 문밖으로 나갔다.
자연스럽게 따라 나가려던 나는 세스의 손에 붙잡혔다. 이거 놔라, 주인놈아.
“사이가 아주 좋아 보이는군.”
옥신각신하는 우리를 본 왕이 못마땅하게 말했다. 가시가 숭숭 돋친 말을 세스가 부드럽게 받았다.
“제가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입니다.”
진짜 진심처럼 들려서 소름이 돋았다. 우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하는 것 좀 봐.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
냉담하게 쏘아붙인 왕이 내게 턱짓하며 물었다.
“이름이 뭐지?”
“이블린 그란입니다."
헉?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놀라 입을 틀어막자 왕이 추궁했다.
“그럼 왜 이블린 하인즈라고 거짓말을 했느냐?”
“그란 가문이 반역죄로 망해서 제가 노예가 됐거든요. 으아악!”
이건 내가 말한 거지만 내가 말한 게 아니다. 말할 생각도 없었는데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