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8화 (8/240)

8화

왕이 화들짝 놀라는 것을 본 시종장이 웃었다. 그도 도저히 믿기질 않아 목격자까지 불러 사실을 확인했다. 그의 웃음을 보고 냉담한 얼굴로 돌아온 왕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분명 남들을 속이기 위한 연기겠지.”

“정말 연기라면 한 달 동안이나 폐하의 눈을 피해 감추진 않았을 겁니다. 입양 절차가 끝난 뒤에야 소문이 퍼진 것은 공작이 진심으로 움직였다는 뜻입니다.”

시종장의 지적에 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왕이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이블린 그란은 라리사 모어보다 더한 악녀일지도 모르겠구나."

“······어찌 그런 참담한 말씀을 하십니까.”

느닷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시종장의 안색이 어두워 졌다. 왕이 차갑게 웃었다.

“나는 공작을 신뢰하지만 여자 문제로는 믿지 않아.”

“폐하, 그때의 일은 공작의 잘못이 아닙니다.”

“알아. 어리석은 내 동생의 잘못이지 하지만 공작이 처음부터 라리사 모어를 내쳤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어.”

공작을 탓하는 말이었으나, 거기엔 자책이 묻어 있었다. 시종장은 왕의 얼굴에 떠오른 후회를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순식간에 감정을 정리한 왕이 말했다.

“내 눈으로 직접 이블린 그란을 보고 판단하겠다.”

"공작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서? 그게 문제가 되나?"

시종장은 더 이상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여기서 반박하면 공작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것이냐 다름없었다. 차갑게 코웃음 친 왕이 명령했다.

“공작에게 이블린 그란과 함께 입궁하라고 전해라.”

“예, 폐하.”

정중히 절을 올린 시종장이 물러났다. 홀로 남은 왕은 서늘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공작의 약점은 정을 준 자에게 무르다는 것이지. 만약 간악한 계집이라면 내 손으로 정리해야겠군,'

한 번의 실수로 왕국은 영용을 잃었다. 왕은 다시는 그때의 일을 되풀이할 생각이 없었다.

* * *

“······네?”

나는 귀를 의심하며 세스를 바라봤다. 그림 같은 미소를 지은 그가 다시 말했다.

“폐하께서 당신을 보고 싶으신 모양이야."

“폐, 폐하께서요?”

“함께 입궁하라고 하시더군.”

아직 신입인데 회장님 방에 불려가게 생겼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물었다.

“안 가는 건 안 되겠죠?”

“왕명으로 내려진 거라 힘들 것 같군.”

하긴, 빠져나갈 구멍을 둘 리가 없지. 나는 체념하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폐하께선 제가 대역을 맡는 게 싫으신 거죠?”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면 지금 부르실 이유가 없으니까요.”

한 달이면 뒷조사를 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왕은 내가 노예라는 것도, 공작 부인이 되기엔 많이 부족하다는 것도 알았을 거다.

“저 예절 교육 받은 지 한 달도 안됐어요. 궁정 예법 은 아직 손도 못 댔고요.”

이런 상태로 남들 앞에 나섰다간 씹기 좋은 먹잇감이 될 뿐이다. 그걸 알면서도 부르는 건 내가 못마땅하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엄청나 게 괴롭힐지도 모른다.

“이비, 폐하께서 반대하셔도 난 당신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

세스가 진지한 얼굴을 했다.

내가 그의 연인이었다면 눈물을 홀리며 감격했을 말이었다. 하지만 신입 사원에 불과한 나는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 말고 다른 대역을 준비하셔야 할 것 같아요. 궁에서 망신을 당하면 대역으로 활동하기도 힘들잖아요.”

공작보다 왕이 높은데 뭐 별수 있나. 알아서 기어야지.

시무룩한 나를 뻔히 쳐다보던 세스가 말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당선은 도발에 능숙하군.”

“네?”

“그런 말을 듣고 얌전히 꼬리를 내릴 남자는 없다는 소리야.”

왠지 모를 위기감을 느낀 나는 서둘러 반박했다.

“아뇨? 많은데요? 그런 남자 길가에 널렸는데요?”

“그럼 내가 길가에 널린 남자가 아닌 모양이지.”

능숙하게 받아넘긴 세스가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뚜껑이 열리자 안에 든 작은 금속 배지가 보였다.

“이걸 당신에게 달아 주고 싶은데.”

나는 조심스레 배지를 살폈다. 푸른 방패 위에 칼을 든 은색 사자가 뒷발로 일어나 있었다. 사자 주제에 왜 망나니 춤을 추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게 뭐죠?”

“내가 기사로 서임될 때 받은 기념품.”

“이걸 달면 어떻게 되는데요?”

“당신을 모욕하면 내 검을 받게 될 거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겠지.”

아, 강아지 인식표였구나.

나는 허허로운 미소를 지으며 배지를 바라봤다. 저걸 달면 개나 소나 덤비지는 못할 것이다. 분명 받는 게 이득인데 왠지 손이 가지 않았다.

‘왜 함정 카드 같지?'

이상하게 저 배지가 낚싯바늘에 매달린 미끼처럼 보였다. 무척 탐스럽지만 덥석 무는 순간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망설이는 나를 본 세스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폐하께서도 이걸 보면 다시 한 번 생각하실 테고.”

“그럼 달아 주세요.”

일단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냉큼 목을 내밀었다. 뭐가 재미있는지 작게 웃은 세스가 내 옷깃에 배지를 달아 주었다.

“잊지 말고 항상 달고 있어.”

“네.”

나는 옷깃에 달린 배지를 만지작거렸다. 사자가 좀 못생겼지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고개를 들자 세스가 무척 만족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조금 민망해진 나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물었다.

"왜요? 너무 잘 어울려요?“

“그래. 아주 예쁘군.”

무슨 말을 못 하겠다, 진짜. 어색해진 나를 반히 쳐다보던 세스가 손을 뻗었다.

순간 놀랐지만 그의 손은 내 옆머리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간지러운 느낌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이비.”

“네?”

“다른 사람과 닿으면 아프다고 왜 말하지 않았지?”

나는 놀라서 얼어붙었다. 얼음 같은 푸른 눈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른침을 삼킨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닌데요?”

“아니라고? 뭐가?”

“······만지면 아픈 게 아니라고요.”

세스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그가 즐거워서 웃는 게 아니라는 건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그럼 당신 동생이 거짓말을 한 모양이군.”

“제, 제 동생이 뭐라고 했어요?”

지금쯤 아카데미에 처박혀 있어야 할 녀석이 무슨 헛소리를 한 걸까.

“이비, 내가 알고 싶은 건 당선이 왜 사실을 숨겼냐는 거야.”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나는 더 이상 버텨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 동생이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에요. 그 애는 진짜 그렇다고 알고 있거든요.”

“그럼 아니라는 건가?”

“저도 최근에 알았는데, 절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 만지면 괜찮은 것 같아요 . 전에 손잡았을 때도 아프지 않았고요.”

덤덤하게 말했지만 뺨에 열이 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아무리 뻔뻔해도 ‘네가 만졌을 땐 괜찮더라?' 하려니 좀 민망했던 것이다. 그리고 눈치 빠른 남자는 곧바로 내 말을 알아들었다.

“야.”

감탄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낸 세스가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나비처럼 팔랑였다. 동요하는 것도 잠시, 그는 순식간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괜찮은 것 같다는 말은 아직 확실하지 않다는 거군.”

“그게, 확인하기가 좀 어려워서요.”

일단 친해져야 확인을 할 텐데, 이 저택의 사람들은 굉장히 도도했다. 어떨 때는 나와 대회를 나누는 것도 피하는 것 같았다. 내가 어디 가서 친구 못 사귄다는 소린 들은 적이 없는데 여기에서만큼은 예외였다.

투덜거리는 나를 뻔히 쳐다보던 세스가 물었다.

“당신을 싫어하는 사람이 만지면 어떻게 되지?"

“······.”

얼버무리고 싶었지만 그런 게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쿠션을 쿡쿡 찌르던 나는 할 수 없이 자백했다.

“심한 건 아닌데 멀미가 나거나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어요.”

"쓰러질 정도로?“

“아뇨, 그때는 진짜 굶어서 그런 거고, 쓰러진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열심히 변명했으나 세스는 납득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뚫어져라 용서하는 시선에 나는 결국 사실을 털어 놨다.

"예전에 동생이 보는 앞에서 토한 적이 있었어요. 브란은 그걸 기억해서 저를 만지는 걸 무서워하고요.”

“그때 누가 당신을 만졌지?”

음산한 목소리에 놀란 나는 세스를 쳐다봤다. 내 시선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멈칫한 그가 조금 누그러진 투로 덧붙였다.

“무신경한 말을 했군. 떠올리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알아서 찾아내지."

왜 찾아내서 죽여 버리겠다는 것처럼 들리지?

나는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말하기 힘든 건 아니에요. 재 아버지요 . 이미 죽었으니 찾을 필요도 없어요.”

“······당신의 아버지라고?”

“아버지가 절 좀 많이 싫어했죠. 저도 싫어했으니까 마찬가지지만.”

한참을 침묵하던 세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비, 내가 당신을 만져도 될까?”

“네, 만져 보세요.”

나는 그가 사실을 확인하려는 것을 알고 얼굴을 내 밀었다. 뺨 가까이로 다가온 손이 망설이듯 멈춰 섰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 내 뺨에 철썩 붙였다.

“어때요? 괜찮죠?”

“그건 내가 물어야 할 것 같은데.”

“음, 괜찮은 것 같은데요.”

“대충 대답하지 말고.”

시무룩해진 나는 눈을 감고 집중했다.

전과 달리 뺨에 닿은 손으로부터 생소한 감각이 전 해졌다. 간질간질하고 다스하고. 새끼 고양이가 뺨을 비벼 대면 이런 느낌이 들 것 같았다. 밀려드는 감각에 노곤해진 나는 그대로 늘어지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아 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