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지금 여길 떠나면 일이 끝날 때까지 동생을 못 볼 거야"
세스가 조용히 말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조금 당 황했지만 침착하게 물었다.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요?"
“당신의 행방을 모르는 쪽이 더 안전합니까. 신분을 바꿔도 동생이 당신과 접촉하려 들면 둘 다 위험해지겠지.”
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떤 수단을 써도 접촉하면 흔적이 남을 테니.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동생 소식은 전해 주실 수 있죠?"
“전해 줘도 그게 사실인지 확인하진 못할 텐데?”
“믿어야죠. 힘없는 여자나 아이를 괴롭힐 분은 아니시잖아요.”
사실 그가 사기를 치든, 조작을 하든 내겐 항의할 힘이 없다. 그냥 약속을 지켜 주길 바랄뿐. 그럴 거면 차라리 배짱 좋게 다 맡기는 척이라도 해야지.
세스는 말없이 나를 웅시했다. 나도 그의 잘생긴 얼굴을 열심히 감상해 줬다. 이윽고 한숨을 쉰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당선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노력하지”
이거 악수하자는 거지? 이번엔 손등에 입 맞추는 거 아니지?
나는 쭈뼛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세스는 가만히 내 손을 잡았다. 얼떨떨한 얼굴로 쳐다보니 그가 무척 상냥하게 웃었다.
“시간이 다 됐군.”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에 눈앞이 깜깜해지더니 몸이 기울어졌다. 단단한 팔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떠 받쳤다. 나는 세스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재로 축 늘어지고 말았다.
“기운을 나눠 줬다고 해도 계속 깨어 있는 것엔 한계가 있으니까.”
그런 건 미리 좀 알려 줘요, 이 양반아.
"잘 자. 이비.”
잘 자라는 인사를 들은 건 너무 오랜만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거짓말처럼 졸음이 밀려왔다. 나는 세스의 품에 기댄 채로 잠들어 버렸다.
* * *
모리스는 그림자 기사단장이자 공작의 오른팔이었다.
험한 곳도 마다하지 않는 주인을 모시며 온갖 일을 겪었지만 오늘 같은 일은 처음이었다. 아니. 이블린 같은 여자를 본 게 처음이었다.
처음 본 그에게 남 좀 같이 패 달라고 부탁하는 아가씨라니. 그리고 그녀가 앞으로 공작 부인으로 불릴 사람이라니. 눈앞이 캄캄했다.
“주군, 그녀를 정말 대역으로 세우실 겁니까?"
모리스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공작은 묵묵히 걷기만 했다. 평소보다 느린 걸음은 품속의 이블린을 배려해서인 것 같았다. 잠시 망설이던 모리스가 덧붙였다.
“다른 것보다 폐하께서 반대하실 겁니다.”
왕을 입에 담자, 그제야 공작이 그를 돌아봤다. 차가운 시선에 모리스는 잠시 숨을 멈췄다. 고개를 숙이고 질책을 기다리는데 뜻밖의 말이 돌아왔다.
“그럼 잘 숨겨 두었다가 결혼식 때 보여 드려야겠군.”
“하, 하지만 그렇게 되면······.”
모리스는 당황해서 입을 뻐끔거렸다. 그건 왕과 싸우자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를 뻔히 쳐다보던 공작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싶지만 미리 보여 드리긴 해야겠지 이블린의 새로운 신분이 만들어질 때까지만 비밀로 하겠다.”
모리스는 공작이 직접 왕의 눈을 가릴 생각임을 깨달았다.
‘그 정도로 마음에 드신 건가?'
모리스는 공작의 품에서 잠든 이블린을 훔쳐봤다. 예쁘긴 해도 눈이 번쩍 뜨일 미인은 아니었다. 분홍색 머리와 붉은 눈은 좀 특이하지만 그뿐이었다. 무엇보다 워낙 작고 말라서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았다.
‘아니, 여자의 미모에 홀릴 분은 아니지.’
공작은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정확히는 세속의 즐거움에 무관심했다. 신전을 나와서도 수도승처럼 생활하는 모습에 왕이 잔소리할 정도였다.
‘대체 뭐가 주군의 관심을 끈 거지?'
모리스는 저도 모르게 이블린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걸 보고 살짝 눈을 찌푸린 공작이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말했다.
“이블린에게 하얀 장미 저택을 줄 생각이다. 관리인에게 일러 부족한 게 없도록 준비시켜라.”
하얀 장미 저택은 가문 소유가 아닌 공작의 개인 저택이었다. 공작은 지금까지 누구도 그 저택에 들인 적이 없었다.
모리스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주군 그녀를 진짜 부인으로 맞이할 생각은 아니시지요?”
“무슨 소리지?"
“다른 저택들을 두고 굳이 그곳을 내주신다는 것은······.”
선대 공작이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지은 저택이다. 그리고 공작이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유산이기도 했다. 대역이 머물기엔 너무 과분했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야 하지 않겠나?"
공작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이블린이 하얀 장미 저택에 머물면 왕조차도 공작이 진심인지 고민할 것이다.
그에 모리스도 완전히 납득한 얼굴로 주억였다.
“그럼 교사부터 붙일까요? 공작 부인으로 활동하려 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글쎄 딱히 교육이 필요할 것 같진 않은데.”
공작의 말에 모리스는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이블린은 엄청난 말괄량이였다. 신나게 상인을 걷어차던 모습을 보면 지금껏 예의범절을 배운 적이 있는 지도 의심스러웠다. 그런데도 교육이 필요 없다는 간······.
‘짧게 쓰고 버릴 말이라서? 아니면 그런 모습까지 좋으신 건가?'
주인의 의중을 고민하던 모리스는 이내 판단을 포기 했다.
“그래도 최소한의 예법 교육은 필요합니다. 아니면 사교계에서 크게 망신을 당할 겁니다.”
이블린을 이대로 내보냈다간 공작이 더 욕을 먹을 것이다. 모리스는 일이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좋아 저택으로 예법 선생을 보내.“
다행히 공작은 선선히 허락했다. 안도하는 모리스와 달리 뭔가를 고민하던 그가 덧붙였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 그림자를 셋 정도 붙였으면 좋겠군.”
“예?”
모리스는 저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공작이 말하는 그림자는 요인 구출이나 첩보 임무를 주로 맡는 그림자 기사단을 뜻했다. 하나하나가 일류 정예인 그들을 고작 대역 따위에게 붙이다니. 말도 안 되는 낭비였다.
‘진짜 공작 부인도 그림자의 호위를 받지 않는데.’
하지만 기사단의 주인은 공작이었고, 그들을 어디에 쓸지도 공작의 마음이었다. 모리스는 애써 불만을 삼켰다.
“성격이 거친 자들은 빼고. 겁먹지 않게 비밀로 하도록.”
“예, 잘 골라서 붙이겠습니다.”
그제야 만족한 공작이 몸을 돌렸다. 모리스는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진짜 대역이 맞나? 정말 귀여워하시는 것 같은데?'
* * *
세스 엘마이어 공작은 왕국의 유명 인사였다.
그는 왕의 검으로 칭송받는 기사이자.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었다. 하지만 몇 년 전, 한 사건으로 드높던 명예가 추락하고 말았다.
공작은 아무런 변명도 없이 모든 특권을 반납했다. 그 후로는 대관식이나 신년제 같은 중요한 행사가 아니면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공작을 향한 사람들의 관심은 줄어들 줄 몰랐다 명예를 잃었다고 해서 그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고귀한 혈통과 재력을 갖춘 미혼의 권력자.
그를 사모하는 여인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사교계에 막 데뷔하는 아가씨들은 우연한 만남을 상상하며 궁을 서성이곤 했다.
그런 상황에서 은밀히 돌기 시작한 이야기는 모두에 게 충격을 주었다.
“그, 그게 정말이에요?”
“그렇답니다. 개인 저택에 그녀를 두고 몰래 보러 가신대요.”
바로 공작에게 숨겨 둔 연인이 있다는 소문이었다.
처음 소문이 시작된 곳은 상점가였다. 수도의 이름 난 의상실이며 보석상이 갑자기 공작의 부름을 받았던 것이다. 그들의 입을 통해 공작의 연인에 대한 정보가 조금씩 전해졌다.
“예쁘기는커녕 비쩍 말라서 비루먹은 당나귀 같대요.”
“저는 남부 억양이 강한 촌뜨기라고 들었어요.”
"출신이 천한지 품위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더군요.“
사람들은 질투 섞인 "말로 공작의 연전을 깎아내렸다. 심술궂은 이들은 그녀가 언제 쫓겨날지 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어서 들려온 소문이 그들의 기세를 꺾어 놓았다.
"들으셨어요? 공작께서 대해의 심장을 그 여자에게 주셨답니다."
“설마요! 그건 공작 부인만 착용할 수 있는 목걸이잖아요.”
“정말이에요. 가문의 세공사를 불러서 그 여자에게 어울리게 줄을 고치라고 명령하셨대요.”
“세상에 이러다 그 여자가 공작 부인이 되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없잖아요.”
불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던 자들이 갖은 핑계를 대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공작의 연인에 대해 필사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들끓는 소문은 왕국에서 가장 고귀한 장소인 태양 궁까지 닿았다.
“공작에게 숨겨 둔 여자가 있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난리라나 어이가 없군.”
왕이 경멸이 담긴 얼굴로 말했다. 쓴웃음을 지은 시종장이 말을 받았다.
“워낙 여인에게 관심이 없기로 유명한 분이 아닙니까.”
“다른 것엔 관심이 있던가.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모를 놈이야.”
“황송하오나 두 분은 무척 닮으셨습니다.”
“기분 나쁜 소리를 하는군. 늙어서 이제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왕의 질책에도 시종장은 빙그래. 웃기만 했다. 왕은 늙은 신하를 겁주는 것을 포기하고 물었다.
“그래서, 어떤 여자지?"
“명랑하고 활기찬 아가씨라고 들었습니다. 몸이 약 한 것이 홈이지만, 대범한 면이 있어 이번 일의 적임자라고 하더군요.”
“평가가 후하군. 그게 노예라는 단점을 가려 줄 정도는 아닐 텐데.”
왕은 이블린 그란이 노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고많은 여자 중에 노예를 대역으로 삼다니, 정말 공작답지 않은 일이었다.
“신분을 회복시켜 봤자 속국인 티론 출신의 약소 귀족이지 분명 출신을 들먹이며 물어뜯는 자가 나올 거야."
“출신이야 좋은 가문에 입양시켜 바꾸면 그만입니다. 이미 적당한 가문을 골라 절차를 끝냈다고 들었습니다.”
난처한 표정의 시종장이 왕을 달래듯이 말했다. 그 에 왕이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애초에 제대로 된 여자를 골랐다면 그런 고생을 할 필요도 없었겠지.”
“공작께서 그 여인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시니 다소의 어려움은 감수하실 겁니다.”
“그 목석이?"
“네, 첫 만남에 무릎을 꿇고 손수건을 바치셨답니다.”
“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