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어?'
보통은 이렇게 닿으면 검은 것이 일어나 내게 달라붙곤 했다 하지만 손이 닿아 있음에도 아무 변화가 없었다. 좀 더 힘주어 잡아 보고 접촉면도 늘려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정신적인 방어가 높아서 그런가?'
어릴 때부터 수행을 했을 테니 정신 방어가 높을 수 도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콕콕 찔러 보다가 이내 포기하고 물었다.
“지금 무슨 생각 하세요?"
“당신 손이 무척 작고 부드럽다는 생각.”
뚱한 얼굴로 노려보자 세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은 솔직하게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말하지 말고 생각만 하세요. 제가 꺼림칙하지 않아요?“
이번에도 역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좀 더 기다리던 나는 결국 포기하고 손을 뗐다. 세스가 의아한 눈을 했다.
"끝난 건가?“
“그게······.”
실패했다고 고백하려던 나는 문득 오른손을 바라봤다. 그의 손과 닿았던 검지 끝에 황금색 모래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천에 꾹 눌렀다.
그러자 은회색 천이 사르르 물결치더니 황금빛의 형체가 떠올랐다. 글자가 아닌 그림이 나타난 것은 처음이었다. 숨까지 멈추고 지켜보던 나는 의아하게 중얼 거렸다
“밀대 걸레?"
정확히는 밀대 걸레에서 막대기만 밴 것 같은 모습 이었다. 영문을 몰라 하는 나와 달리, 세스는 고게 뭔지 알아본 듯했다.
“아니, 자세히 봐.”
“손잡이 없는 빗자루?"
“······강아지.”
자꾸 헛발질을 하는 나를 보다 못한 그가 정답을 알려 줬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그림을 바라봤다.
“이게요?"
“어떤 부인이 키우는 걸 봤는데, 손바닥만 한 크기에 겁 없이 용감하더군.”
말티즈 같은 소형견을 말하나 보다. 하지만 이건 암만 봐도 밀대 걸레인데.
“혹시 그림을 잘 못 그리세요?"
“이비, 내 그림 실력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이 악물고 말하지 마세요. 무서워요.
나는 그의 눈을 피하며 황금색 그림을 다시금 바라 봤다.
‘왜 이런 게 나온 거지?'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타인과 닿았을 때 괴롭지 않은 것도, 새카만 것이 나오지 않은 것도, 검은 글자가 아니라 황금색 그림이 나온 것도.
아니,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꺼림칙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왜 강아지가 나와?
나는 뜬금없는 답과 질문을 연결시키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내가 개 같나?'
아니지. 개랑 강아지는 어감이 좀 다르지.
‘강아지처럼 귀엽다?'
이건 너무 양심이 없는 것 같다.
‘강아지 같은 하찮은 미물이라 꺼려지지 않는다?'
음, 좀 그럴 듯하다 사실 우리 속에서 팔리길 기다리는 노예나, 케이지 속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나 별다를 것도 없으니까.
‘이 사람에게 나는 지나가다 주워 온 유기견 같은 거겠지.’
그때 나를 주워 준 남자가 물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나?"
“······내? 아, 뭐 그렇죠?"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세스의 눈이 살짝 휘어 졌다.
“다행이군.”
단 한 점의 사심도 느껴지지 않는 미소였다. 나는 허허롭게 그를 따라 웃었다.
‘그래. 내 인생에 미남과의 로맨스가 있을 리가 없잖아?'
세스가 내게 관심이 있다고 착각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설레발이라도 쳤다면 밤에 이불을 차다가 구멍을 냈을 것이다.
“이거 제가 가져도 돼요?"
나는 강아지가 그려진 천을 꽉 쥐고 물었다. 그에게 설렐 때마다 이걸 보면서 현실을 되새겨야 할 것 같았다.
"상관없지만 어디에 쓰려고?"
“정신 통일이요.”
"······.“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잃어버리지 않도록 천을 손목에 동여맨 후에 주먹을 꾹 쥐었다. 왠지 자신감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말씀하신 아내 역할 말인데요. 까짓거 한번 해 볼게요.”
허세를 부리는 나를 향해 싱긋 웃은 세스가 장갑 낀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해."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공손히 그의 손을 잡았다. 한동안 묘한 얼굴로 나를 보던 세스가 말했다.
“악수를 하자는 게 아니었는데."
"네?“
보란 듯이 내 손을 끌어당긴 그가 손등에 입을 맞추려 했다.
”으아아악!“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잡아 뺐다. 내 처절한 비명에 놀란 세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뒤늦게 오버를 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소심하게 웅얼거렸다.
“가, 간지럼을 타서요.”
그러자 세스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떨었다. 나는 벌게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창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한참 후에야 웃음을 멈춘 세스가 말했다.
“앞으로는 익숙해져야 할 거야.”
“······네.”
"난 당신을 사랑받는 공작 부인으로 만들 생각이거든.“
"네?"
무슨 부인이요?
* * *
마차가 도착한 곳은 한 저택 앞이었다.
그란 가문의 저택보다 10배는 좋아 보였지만 임무 중에 잠깐 머무는 곳일 뿐이란다. 임시 저택도 이런데, 진짜 집은 얼마나 좋은 걸까.
‘공작저니까 당연히 어마어마하겠지 '
세스 엘마이어.
왕실과 피가 이어진 유서 깊은 공작가의 주인.
따라서 내가 맡은 역할은 엘마이어 공작 부인인 것이다. 우와악!
세스가 정체를 밝혔을 때 나는 하마터면 싸우자고 말할 뻔했다. 처음부터 공작 부인 역할이라고 알려 줬다면 냉큼 하겠다고 나서진 않았을 거다. 사기당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던 나는 가자미눈으로 세스를 노려봤다.
원망스러운 내 시선을 느낀 세스가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꺼냈다.
"동생을 보고 올래?"
“제 동생이 여기 있어요?”
“시간이 늦어서 자고 있겠지만.”
“······보고 싶어요.”
나는 맥없이 백기를 들었다. 공작 부인 역할이 뭐가 문제인가 공작 부인의 발닦개를 하라고 해도 납죽 엎드려야 하는 상황인데.
고개를 끄덕인 세스가 살짝 손짓했다. 대기 중이던 시종이 다가와 정중히 인서를 올렸다.
"손님 이 있는 방으로 안내해.”
“예. 아가씨, 이쪽으로 오십시오.”
나는 반사적으로 세스를 쳐다봤다. 물론 그런 자신을 깨닫고 흠칫 놀라서 고개를 돌렸지만 세스가 이미 눈치챈 뒤였다.
“걱정하지 마 내 저택에서 당신을 해칠 사람은 없으니까.”
“아니, 그게…….”
나는 창피함에 얼굴을 붉혔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에게 의지하려 들다니, 스스로가 한심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갔다 올게요.”
웅얼거리며 말한 나는 도망치듯 걸음을 옮겼다. 세스의 시선이 느껴져서 괜히 등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브란은 무척 잘 자고 있었다. 이불을 걷어차고 배를 훌렁 내놓은 모습이 제집처럼 편안해 보였다. 그동안 잘 먹었는지 볼도 아주 통통해 졌다.
‘다행이긴 한데…….’
가족이 죽고 신분이 노예로 굴러 떨어진 상황에 너무 멀쩡했다. 슬픔에 잠겨 몸부림치길 바란 건 아니지만 좀 걱정스러웠다.
‘아니, 지금 이런 걸 걱정하는 건 사치지.'
당장은 사지가 멀쩡한 걸로 충분했다. 정신적인 문재가 있다면 살면서 고치면 된다. 훤히 드러난 배에 이불을 덮어 준 나는 미련 없이 세스에게 돌아갔다.
응접실 안을 서성이던 세스가 나를 돌아봤다. 단정 한 얼굴에 의외라는 빛이 스쳤다.
“생각보다 일찍 왔군. 울지도 않은 것 같고.”
내 얼굴을 유심히 살핀 그가 말했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그를 쳐다봤다.
“저희 친남매인데요?"
“······?”
“······?"
누가 동생 얼굴 좀 봤다고 눈물을 글썽 인단 말인가. 피 섞인 남매 사이엔 그런 거 없다.
‘죽은 형이랑 사이가 좋았나?'
혼란스러워하는 세스를 보고 헛기침을 한 나는 공손히 절을 했다.
“저, 늦었지만 저와 동생을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그제야 표정을 바로잡은 세스가 고개를 저었다.
"필요에 의한 일이었으니 감사해 할 필요는 없어."
“그래도 절 구해 주신 건 사실이잖아요.”
내 말에 세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동생과 함께 남아도 돼. 둘이서 살 곳을 마련해 주지.”
“네?"
“다시 생각해 보라는 거야. 내 아내 역할은 당신이 예상한 것보다 위험하니까.”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남자, 의외로.......
"솔직하시네요?"
“······.”
세스가 한 대 맞은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봤다.
뭐야, 그 반응은. 내가 바보도 아니고, 위험한 걸 모를 리가 없잖아.
신분제가 있는 이곳에서 공작 부인은 까마득하게 높은 사람이다. 그런 자리에 노예인 나를 꽂는다? 엄청나게 위험하거나, 끝이 안 좋을 거라는 예감이 팍팍 들지 않는가.
‘하지만 나한텐 다른 일도 마찬가지니까.’
경력도, 학벌도 없는 여자가 구할 수 있는 일자리는 뻔했다. 더럽고 위험하거나, 더럽고 위험하고 힘들거나 그것보단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 낫지.
“위험한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여기서 물러설 생각도 없고요.”
최악의 경우 내가 죽는다고 해도 브란이 무사하다면 손해는 아니었다. 나야 또 환생하면 되니까. 그리고 아주 조금은, 세스에게 은혜를 갚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