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그럼 호위를······.”
“필요 없다.”
차갑게 말을 끊은 세스가 걸음을 옮겼다. 눈치를 보던 나는 그에게 소곤거렸다.
“제 동생은요?"
“이미 구출해서 다른 곳으로 옮겼어.”
“다친 곳은 없죠? 무사해요?"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눈썹을 꿈틀한 그가 말했다.
“당신과 달리 잘 먹고 잘 지낸 것 같더군.”
“다행이네요.”
안도하던 나는 반히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미간을 찌푸렸다.
“저기, 좀 안 그러시면 안 돼요?"
”뭐가?”
”쿡 찔러 보고 반응 관찰하면서 얘는 이렇구나 하고 파악하는 거요. 기분 나빠요. 궁금한 게 있으면 그냥 물어보세요.”
그는 놀란 듯이 눈을 깜빡였다. 그런 생각조차 한 적 없다는 것처럼 결백한 얼굴이다. 누가 보면 내가 생사람 잡는 줄 알겠다.
"동생이 잘 지냈다고 하면 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관찰했잖아요. 저 동생 좋아해요. 다른 가족은 싫었지 만 개 하나는 꼭 지키고 싶었어요. 동생이 제 약점인거 맞아요.”
“······.”
세스의 침묵에 분위기가 폭 가라앉았다. 뒤늦게 너무 심하게 말했나 싶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날 구해 준 사람인데 이렇게 따질 필요가 있었을까.
“그렇군. 앞으로는 조심하지.”
걱정하는 내게 나직한 목소리가 닿았다. 힐끗 확인 하자 세스가 부드러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민망해진 나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건방지게 말해서 죄송해요.”
“건방지지 않았으니 괜찮아. 그보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네?“
“왜 나를 ‘저기’라고 부르는 거지?”
갑자기 바뀐 화제는 하필 내가 제일 피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나는 소심하게 웅얼거렸다.
“엘마이어 님이라고 부르는 건 싫어하시는 거 같아서요.”
“둘 중에선 저기가 더 싫군.”
“그럼 주군?"
“당신은 내 기사가 아니잖아.”
나는 당황해서 눈을 굴렸다. 머릿속을 뒤져봐도 사장님, 선생님 같은 호칭만 떠올랐다.
“제가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힘없이 묻자 세스가 장난스럽게 답했다.
“아까처럼 자기야, 라든가?”
“아악!”
나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입사 첫날 사장님을 ‘자기야'라고 부르다니, 전설의 신입으로 기억될 것 같았다.
“그, 그건 정말 피치 못할 상황이라······.”
“아주 인상적인 호칭이었지.”
“그냥 잊어 주시면 안 될까요?"
미음 같아선 머리라도 내려쳐서 잊게 하고 싶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지긋이 쳐다보던 세스가 물었다.
“그럼 남편이라고 부르는 건 어떨까.”
“······네?"
“이블린 그란. 당신을 내 아내로 고용하고 싶은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스를 바라봤다. 느닷없이 폭탄을 집어 던진 남자는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 * *
커다란 마차는 아무런 덜컹거림 없이 거리를 달렸다. 머리색을 바꿔 주는 가면처럼 마법이 걸린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신기함조차 느낄 수 없는 상태였다.
무슨 정신으로 마차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배에서 내렸고, 어디선가 마차가 다가왔고, 세스의 손을 잡고 마차에 탄 기억만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세스는 가면을 벗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단정한 은색 머리, 차갑고 우아한 얼굴, 극도로 절제되어 품위 있는 옷차림까지. 단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완벽했다.
저런 모습으로 ‘아내로 고용하고 싶은데.’ 따위의 헛소리를 하다니. 왠지 배신감이 느껴진다. 부루퉁해진 나를 힐끗 쳐다본 세스가 말했다.
“그렇게 겁먹을 필요는 없어. 당신을 잡아먹진 않을 테니까.”
“이건 겁먹은 게 아니라 뭔가 잘못 드셨나 생각하는 건데요?”
마음 같아선 미쳤냐고 묻고 싶었지만 고용된 몸이라 꾹 참았다. 내 대답에 세스가 눈을 휘며 웃었다. 웃는 얼굴이 하도 화사해서 전투 의욕이 조금 내려갔다.
“내 제안이 그렇게 이상했나?"
"보통 처음 만난 사람에게 아내가 되어 달란 말은 안하죠?"
"첫눈에 반했을 수도 있지.”
그런 말을 하려면 눈에 하트라도 박든가.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니야?
눈으로 욕을 하자 세스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좋아 처음부터 설명하지.”
그제야 나는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세스는 몹시 드물게도 약혼조차 하지 않은 미혼이었다. 10 대 후반에 결혼하는 이가 많은 귀족 사회에선 무척 회귀한 경우였다.
그래도 집안의 간섭이 없어서 괜찮았는데. 갑자기 그가 꼭 유부남이 되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세스의 상사는 지금 당장 결혼하든가, 아내인 척해 줄 사람을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지금 아내인 척해 줄 사람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갑자기 유부남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몹시 궁금했지만 물어도 답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 나는 현실적인 문제에 집중했다.
“그러니까 아내 역할을 연기해 줄 사람이 필요하신 거죠? 진짜 아내가 아니라요.”
“그래.”
아까 한 말도 청혼이 아니라 ‘아내 역’에 나를 고용하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부모님께 감사하셔야겠네요.”
”왜?”
“얼굴만 아니었어도 뺨 많이 맞고 다니실 것 같아서요.”
“······.”
처음부터 아내 대역이 필요하다고 말하든가. 누가 들어도 청혼으로 오해하기 딱 좋은 말이나 던지고 말이야.
부루퉁하게 노려보니 세스가 순순히 사과했다.
“미안, 내가 좀 지나쳤던 것 같군.”
“어차피 깜짝 놀란 얼굴을 보고 싶다 같은 이유였을 테니 용서해 드릴게요.”
“······.”
진짜 그거였는지 대꾸가 없었다. 우와, 이 사람 진짜 성격 나빠!
“그런데 왜 대역을 구하려고 하세요? 그냥 결혼하시는 게 낫지 않아요?”
돈 많고 잘생겼으니 상대를 구하기도 쉬울 텐데, 왜 번거롭게 대역을 세우려는 걸까. 내 의문에 세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난 독신주의자라서.”
"야. 예······.“
“어렸을 때 성직의 길을 걸었거든. 후계자인 형이 죽어서 환속하긴 했지만, 아직 평범한 가정을 꾸릴 수 있다는 자선이 없어.”
떨떠름하게 반응한 나는 이어지는 이야기에 당황했다. 가족의 죽음이냐, 갑자기 바뀐 진로나 그에겐 무척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멋모르고 심드렁하게 대꾸한 게 미안해졌다.
“죄송해요.”
“뭐가?"
“무례하게 반응해서요. 바람둥이의 전형적인 변명이라고 생각했어요."
내 사과에 세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바람둥이처럼 보이나?"
“음, 약간?"
사실 특급 바람둥이 같았다.
잘생긴 얼굴로 사람 홀리듯이 웃는 것도 그렇고, 방심하고 있을 때 혹 치고 들어오는 것도 그렇고. 이런 처지만 아니었어도 그에게 혹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처음 듣는 말인데."
난처한 듯 웃는 모습이 아주 요망의 화신이었다.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진짜 성직자셨어요?"
저 몸에 사제복까지 입으면 수많은 여성 신도들이 시험에 들 것 같은데 . 주변에서 절대 안 된다고 막지 않았을까.
내 추궁에 고개를 갸웃한 세스가 말했다.
“정확히는 성기사 수련생이었지.”
성기사라 확실히 성서보다는 무기를 들고 있는 게 잘 어울린다. 힘도 엄청 세니까 물리적인 개종이 가능 하겠지.
"음, 알 것 같아요. 한 방에 주님 곁으로, 같은 거죠?"
내 말에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인 세스가 어깨를 떨었다. 이런 말에 빵 터지는 걸 보면 친구가 별로 없나 보다. 신기하게 구경하고 있는데 겨우 웃음을 멈춘 세스가 물었다.
“그래서 내 제안을 받아들일 건가?"
“······저 진짜 걱정되어서 묻는 건데요. 제가 아내 역할에 어울릴 것 같으세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세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나는 그의 뻔뻔한 얼굴을 뚱하게 노려봤다.
“전 암만 봐도 모범적인 귀족 아가씨가 아니잖아요. 다들 의심할 것 같은데요.”
“내 취향이 모범적인 귀족 아가씨가 아니었구나 생각하겠지.”
그, 그런가 왠지 설득당해 버린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세스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싫으면 거절해도 돼.”
“실은 건 아니에요. 조금 뜻밖이라서 그래요.”
사실은 내 능력과 관계된 일을 하게 될 거라 생각했다. 예를 들면 스파이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아내 대역 제안에 정말 놀랐다. 나한테 그런 역할이 어울릴 거라곤 상상해 본 적도 없으니까.
"근데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아내 연키를 하면 항상 옆에 있어야 되잖아요.”
세스는 그게 뭐가 문제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결국 마음속에서 빙빙 돌던 말을 꺼냈다.
“제가 꺼림칙하지 않으세요?"
이게 뭐라고 발밑이 꺼질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스가 갑자기 장갑을 벗었다.
"손을 줘.”
“네?"
“대답을 듣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있잖아."
나는 멍하게 세스를 바라봤다. 지금 자기 생각을 읽으라고 말하는 건가.
"참 천이 필요했지.“
세스가 목에 묶인 크라바트를 풀어냈다. 목적이 자연스럽게 벌어지면서 남자다운 목과 쇄골이 살짝 드러났다. 워낙 금욕적인 분위기를 가져서인지 조금 흐트러진 것만으로도 굉장히 위험해 보였다.
“이비?"
의아함이 담긴 시선에 움찔한 나는 서둘러 크라바트를 받았다. 은회색의 천은 이런 일로 쓰기엔 미안할 정도로 고급스러웠다. 부드러운 천을 꽉 움켜쥐자 이상 할 정도로 가슴이 떨렸다.
“자, 어서.”
손을 내민 세스가 재촉했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결국 손을 뻗었다. 왠지 나쁜 짓을 하는 기분이었다. 떨리는 손을 그의 손 위에 얹자 칭찬하는 것 같은 미소가 돌아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