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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3화 (3/240)

3화

나는 얼른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어, 어떻게 생긴 분이셨나요?”

“그건 몰라 가면을 쓰고 있었으니까. 키가 꽤 크고 검은 머리였다.”

세스는 분명 은발이었다. 순간 다른 사람인가 싶었지만 머리색을 바꿨을 가능성도 있었다. 가면을 썼다 면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뜻이니까.

여기서 ‘아, 제 애인 맞네요. 얼른 가죠!'하고 벌떡 일어서는 건 위험하다. 곱게 자란 귀족 아가씨는 절대 그런 말 안한다.

나는 울음을 터트리는 척하며 얼굴을 가렸다.

“그분이 어떻게 여기까지……. 제발 돌아가 달라고 해 주세요. 이렇게 비참한 모습을 그분께 보여 드릴 수는 없어요.”

내 연기에 홀랑 넘어간 상인이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고 회를 냈다.

“젠장, 진짜였다니!"

그는 나를 윽박지르며 세스에 대해 알아내려고 애썼다. 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사실 말해 주고 싶어도 아는 것이 없었다.

결국 추궁을 포기한 상인은 나를 우리에서 꺼냈다.

사흘 굶은 다리가 갓 태어난 기린처럼 후들거렸다.

나는 애써 버티지 않고 픽 쓰러졌다.

“아이고, 배가 고파서 힘이 없네.”

“이, 이년이?”

나는 나무늘보처럼 바닥에 드러누웠다. 욕을 퍼붓던 상인이 결국 밖으로 뛰쳐나가 수프를 가져왔다.

“시간 없으니 빨리 처먹어!”

쫄쫄 굶다가 수프 냄새를 맡으니 눈이 돌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선 그릇째로 들고 마시고 싶었지만 애써 스푼을 들고 천천히 떠먹었다.

“이대로 주면 벌컥벌컥 마시다가 탈이 날 것 같아서.”

절대 세스의 말이 신경 쓰여서 이러는 게 아니다. 내 몸은 소중하니까 내가 지켜야지.

나는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든 말든 건더기 하나 없는 수프를 꼭꼭 씹어 먹었다. 위가 쪼그라든 건지 고작 반 그릇만으로 배가 찼다.

“다 먹었으면 씻어, 어서!"

미적미적 일어선 나는 상인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때가 잔뜩 낀 통에 별로 깨끗해 보이지 않는 물이 담겨 있었다.

손가락 하나를 담가 보자 아주 차갑고 미끌미끌했다. 바닷물이 섞인 모양이었다.

“씻지 않고 뭘 미적거리는 거야!"

상인은 당장 나를 물통에 처박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나를 찾아온 귀족이 있는 상황에 손을 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물이 차가운데요?"

“뭐라고?”

"물이 차갑다고요."

나는 한여름에도 따뜻한 물로 씻는 걸 좋아했다. 화가 난 상인이 빠득빠득 이룰 갈며 나를 노려봤다.

그러나 급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잠시 기다리자 무려 욕조에 담긴 따뜻한 물이 준비 됐다. 덕분에 나는 아주 만족스러운 목욕을 즐길 수 있었다.

깨끗이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나는 다른 곳으로 끌려갔다. 내가 갇혀 있던 창고와 달리 고급스럽게 꾸며진 선실이었다.

“생각보다 늦었군."

허스키한 목소리가 나를 반겼다.

목소리 주인 대신 눈에 띈 것은 검은 옷을 입은 네 명의 남자였다. 두건을 눌러써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기세가 대단했다.

상인도 두 명의 수하를 데려왔으나 저쪽과 비교하니 그냥 짐꾼 같았다.

남자들을 뒤에 세운 세스는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다. 상인의 말처럼 검게 변한 머리에 은색의 반가면을 쓴 모습이었다.

몸에 딱 맞는 검은 옷이 위압적인 분위기와 더없이 잘 어울렸다. 고급스러운 옷감과 장식을 극도로 배제 한 디자인이 오히려 고귀한 신분을 보여 주는 듯했다.

가면 아래로 보이는 단정한 입술이 미소 지었다.

"날 기다리게 한 이유가 있겠지?"

사색이 된 노예 상인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소, 송구합니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준비가 늦어져서…….”

애인을 구하러 온 남자와 로맨스를 찍을 생각이었던 나는 얼굴이 굳어졌다. 갑자기 마피아 보스물을 들고 오면 어쩌겠다는 거야. 나 이거 못 맞춰.

그때, 세스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든 넘겨야 한다는 생각에 버럭 소리쳤다.

“자기야!"

세스의 뒤에 선 남자들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나는 다급한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네가 내 애인이라고 했다면서요. 어떻게 좀 맞춰 봐요.'

세스의 대용은 빨랐다. 그는 이제야 나를 발견했다 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며 두 팔을 벌렸다.

“이비, 이리 와.”

이비는 또 뭐냐고 불평할 틈은 없었다. 나는 애인과 재회한 기쁨을 연기하며 그의 품으로 달려가려 했다.

한데 바닥에 납죽 엎드려 있던 상인이 내 발목과 연 결된 사슬을 곽 잡아당겼다

“악!”

그대로 넘어진 나는 바닥에 무릎을 부딪쳤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팠다.

사슬을 꽉 움켜쥔 상인이 비굴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여자는 아직 제 노예입니다. 정당한 값을 치르셔야 데려갈 수 있습니다.”

“얼마를 원하지?”

세스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듣는 나까지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상인은 꿋꿋하게 버렸다.

"2천 골드는 주셔야 합니다. 경매에 부치면 더 받겠지만 특별히 양보해 드린 겁니다.”

터무니없는 가격이었다. 이자가 나를 시들였을 때는 온화 20개도 쓰지 않았을 텐데.

“5천 골드를 주지. 당장 노예 문서를 가져와.”

세스의 말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란 가문의 1년 생활비가 5백 골드도 안 된다. 그런데 내 몸값이 5천 골드라니.

경악하는 나와 달리 상인은 싱글벙글 웃으며 품에서 노예 문서를 꺼냈다.

"여기 있습니다.”

세스가 뒤에 선 부하에게 손짓했다. 앞으로 나선 남자가 문서를 받고 작은 주머니를 건넸다.

“백금화 50개다. 확인해 보도록.”

“가, 감사합니다!"

상인은 허둥지둥 주머니를 받아서 안을 확인했다.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느끼며 그를 노려봤다.

그때,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누군가가 다가온 것을 눈치 챘을   땐 이미 세스가 내 앞에 몸을 숙이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내 발목을 옥죄던 족쇄를 뜯어냈다. 과자처럼 파사삭 부서진 족쇄 조각이 바닥을 굴렀다.

“어?”

저거 쇠 아니었나. 멍하게 바닥에 떨어진 파편을 보고 있는데, 장갑을 낀 손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당황해서 고개를 들자 세스가 웃고 있었다.

“자, 어서.”

나는 엉겁결에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굽 높은 신 때문에 비틀거리자 단단한 팔이 허리를 받쳤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넘어질 때 다친 곳은?"

“꽤, 괜찮아요.”

“다행이군. 이건 선물이야”

세스가 둘둘 말린 양피지를 내밀었다. 내 노예 문서였다.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눈만 깜빡였다.

그러자 세스가 내 손에 그것을 쥐여 주었다.

“독은 안 들었어.”

나는 양피지를 꼭 쥐었다. 괜히 눈시울이 시큰하고 목 안쪽이 뜨거워졌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꼴사납게 울어 버릴 것 같았다.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힌 나 는 양피지를 도로 그에게 내밀었다.

“잠깐 맡겨 둘게요. 아무것도 안 하고 받으면 쩝쩝해서요.”

의아해하던 세스가 웃으며 그것을 받았다. 나는 손마디를 우득우득 꺾으며 물었다.

“그래서 정보 가진 놈이 누구예요?”

세스가 지목한 사람은 바로 노예 상인이었다. 어쩜 이렇게 깊은 인연이!

나는 발걸음도 가볍게 놈에게 다가갔다. 신나게 돈을 세던 상인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다, 이 자식아!”

나는 있는 힘껏 놈의 다리 사이를 내리찍었다. 놈이 억지로 신긴 굽 높은 구두가 푹 소리를 냈다.

상인은 비명도 못 지르고 옆으로 쿵 쓰러졌다. 나는 퀵퀵 슬로우를 외치며 열심히 놈을 걷어찼다.

“아니, 저 미친년이!”

상인의 수하가 분개하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세스가 그를 응시하며 `그만.’이라고 말하자

얼어붙은 것처럼 멈춰 섰다.

“저자를 때리는 것에 불만이 있나?”

“아니, 그게······.”

“여기까지 끌려오면서 얼마나 괴로웠겠나.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말은 이해해 달라지만 사실 명령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놈은 얌전히 뒤로 물러나 무릎을 꿇었다. 그의 동료도 눈치를 보다가 같은 행동을 취했다.

그사이 열심히 상인을 두들겨 패던 나는 지쳐 버리고 말았다. 나는 세스의 부하를 향해 불쌍한 척하며 말했다.

“저기, 같이 좀 패 주시면 안 될까요?”

내 지목을 받은 남자가 당황하며 세스를 바라봤다. 세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할 수 없이 다가와 상인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공처럼 몸을 말고 있던 상인의 입에서 곡소리가 나왔다. 나는 상인이 완전히 뻗을 때까지 두들겨 팬 뒤에야 만족했다.

“이제 됐어요. 감사합니다.”

희귀 동물 보듯이 나를 바라보던 남자가 뒤로 물러섰다.

나는 허리에 묶인 장식 끈을 풀어 상인의 팔다리를 꽁꽁 묶었다. 상인은 앓는 소리만 낼 뿐. 꿈틀거리지도 못했다

내가 하는 짓을 구경하던 세스가 물었다.

“정보를 알아내려면 매번 그렇게 때려야 하는 건가?”

“아뇨, 그냥 복수예요. 저를 사흘이나 굶겼거든요.”

밥이 얼마냐 중요한데. 다시는 전직 한국인을 굶기 지 마라.

“······참고로 하지.”

나를 뻔히 쳐다보던 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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