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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2화 (2/240)

2화

“절 사 주세요.”

뜻밖의 말이었는지 남자가 침묵했다. 나도 이게 당황스러운 요구라는 건 안다.

하지만 내게 있어 이건 하늘이 내려 준 기회였다.

내 능력을 필요로 할 사람이 있고, 그는 꽤 부유해 보이며, 노예에게 접근할 정도로 아쉬운 상황이었다. 내 직감이 이 기회를 꼭 잡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 사람을 내 주인으로 만든다!'

나는 전생의 면접을 떠올리며 내가 얼마나 준비된 노예인지 늘어놓았다.

“저는 어릴 때부터 학대를 받아 눈치가 빠르고, 적게 먹어 연비가 좋습니다. 인격 모독을 수시로 당했으나 쉬이 이겨 낼 만큼 멘탈도 튼튼합니다. 저를 사주신다면 분수를 알고 결코 대들지 않으며 하나를 시키면 열을 하는 착한 직원-아니, 노예가 되겠습니다. 평소 시 키는 일에 어떤 의문도 품지 않고 영혼 없이 따르는 생활에 자신이 있고······.”

내 자기소개를 듣던 남자가 웃었다. 늑대가 웃는 것처럼 섬뜩한 느낌이었다.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춘 나를 보고 남자가 상냥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아가씨, 당신을 살 수는 없어.”

“왜요?”

불만스러운 내 물음에 남자가 답했다.

"노예 거래는 불법이니까 나는 지금 이 배를 태워 버릴까 고민 중이고.”

"네?"

“노예도, 노예 상인도 전부 사라지면 귀찮은 문제 역시 해결되겠지.”

“······.”

아니, 왜 기껏 나타난 주인 후보가 미친놈이지? 나는 속으로 욕을 하며 태 연한 척 물었다.

"진짜 태우지도 않을 거면서 겁주는 이유가 뭐예요?"

고개를 갸웃한 남자가 되물었다.

“왜 내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찾는 게 있어서 몰래 숨어 들어온 거잖아요. 어디 있는지 아직 못 찾았고요. 우연히 발견한 노예가 무슨 정보를 갖고 있나 궁금해서 다가온 거 아니에요?"

그러자 남자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무표정한 얼굴이 더 자연스러워서 지금까지 지었던 웃음이 전부 연기인 것 같았다.

“그래. 아주 똑똑하군.”

남자가 느긋하게 말했다. 강아지를 칭찬하는 것 같은 말투가 짜증  났지만 꾹 참았다.

이 남자는 진짜 배를 태울 수도 있는 사람이다. 아마 최후의 방법 정도로 생각하고 있겠지. 정보가 필요해 내게 관대하게 굴고 있지만, 지나치게 선을 넘는 건 좋지 않았다.

“제가 원하는 정보를 드릴 수 있어요. 물론 공짜는 아니지만요.”

"돈을 원하나?"

"물론 돈도 주신다면 감사하죠.”

나는 생긋 웃은 후에 덧붙였다.

“우선 저를 고용해 주세요. 노예를 살 수는 없지만 부하로 고용하는 건 괜찮죠?"

“나는 여자를 부하로 두지 않아.”

“그럼 지금부터 하세요. 여자 고용 안 하는 게 자랑 이에요?"

차갑게 쏘아붙이자 남자가 놀란 듯이 눈을 깜빡였다. 나는 조금 지나쳤다는 것을 느끼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제 동생을 자유민으로 만들어 주세요. 아직 어리니까 성인이 될 때까지 지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카데미에 보내 주시면 더 좋고요.”

가능한 크게 조건을 건 나는 남자의 눈치를 힐끗 봤다. 기분 탓인지 날 선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았다.

“당신이 가진 정보에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남자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제가 언제 일회용이라고 했죠? 저는 원하는 정보를 드릴 수 있다고 말했어요. 언제 어디서든 말이에요.”

얼음 같은 푸른 눈이 나를 응시했다. 빙하의 색깔이 저럴까. 아주 아름답지만 차가운 색이었다. 계속 보고 있으니 빨려 들 것 같아서 시선을 피하며 덧붙였다.

“대신 그 정보를 가진 사람이 제 앞에 있어야 해요.”

“고문이라도 할 셈인가?"

“아뇨. 전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하게 정보를 빼낼 수도 있어요.”

“어떻게?”

남자가 흥미로운 듯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꼿꼿이 쳐들며 대꾸했다.

“궁금하시면 절 고용하세요. 그럴 능력은 있으시잖아요?”

잠깐의 침묵 후, 남자가 말했다.

“뭐, 상관없겠지. 찾지 못하면 폐기할 생각이었고. 거짓이라도 소각하는 시간이 좀 늦춰지는 정도니.”

뭐를요? 배를요?

오싹해하는 내게 남자가 물었다.

“이름이 뭐지?"

“이블린.”

“귀족 출신 같은데, 성은 없나?"

“이블린 그란이에요. 이미 망한 가문이라서 의미는 없지만요.”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남자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블린 당신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단, 당선이 한 말이 전부 진실이라는 전제하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닥치는 대로 지르긴 했지만 이렇게 선뜻 받아 줄 줄은 몰랐다.

그런 내가 웃겼는지 남자가 피식 웃었다.

“뜻대로 된 것 같은데 왜 그런 표정이야?"

“아니······.”

안심해서라고 말하려는 순간,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끈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툭 쓰러졌다.

남자가 놀란 얼굴로 손을 뻗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를 피해 뒤로 물러났다. 다행히 창살에 가로막힌 남자는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괘 , 괜찮아요. 너무 굶어서 현기증이 났을 뿐이에요.”

“굶었다고?”

“사흘 정도요. 그보다 물이 있으면 좀 주시겠어요?”

말을 너무 많이 했더니 목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남자가 고개를 돌리자 그의 부하가 수통을 건넸다.

출렁이는 소리에 나는 흘린 듯이 몸을 일으켜 그쪽으로 기어갔다. 그걸 본 남자가 수통을 뒤로 뺐다.

“굶는 건 둘째 치고 물도 제대로 못 마신 것 같군.”

“아, 안줄 거예요?"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설마 물로 괴롭히려는 건 아니겠지.

불안해하는 나를 보고 고개를 저은 남자가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이대로 주면 벌컥벌컥 마시다가 탈이 날 것 같아서.”

“······.”

조금 열 받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수통의 물로 손수건을 적신 남자가 그것을 내밀었다.

"입에 물고 있으면 도움이 될 거야.”

나는 머뭇거리며 젖은 손수건을 바라봤다. 마음 같아선 덥석 받아 들고 싶었다.

하지만 손수건을 든 남자도, 나도 맨손이다. 내 능력은 접촉을 통해 일어나기 때문에 그의 손이 스치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자, 어서.”

망설이는 나를 유혹하듯 남자가 속삭였다.

나는 그가 나를 시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쓰러 질 때 그를 피해 물러난 것 때문에 뭔가 눈치챈 모양이다.

‘쓸데없이 예리한 남자 같으니.'

나는 고개를 쭉 빼서 손수건을 덥석 물었다. 남자의 눈이 조금 커졌다.

나는 손수건을 이로 물고 그대로 쭉 당겼다. 그는 내 얼굴을 붙잡는 대신 순순히 손수건을 넘겨주었다.

“아주 영리하군.”

나는 손수건의 물기를 쭉쭉 빨며 그의 말을 무시했다. 나를 쳐다보던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제야 그가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쩐지 그의 부하가 죽어라 날 노려본다 했다.

“한 시간 뒤에 다시 오지."

산뜻하게 말한 남자가 몸을 돌렸다. 나는 얼른 손수건을 입에서 빼내며 소리쳤다.

“주인님, 이름이요!"

멈칫한 남자가 나를 돌아봤다. 차가운 시선에 나는 찍 하고 쪼그라들었다.

남자가 무서운 미소를 입가에 달며 말했다.

“나를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달리 부를 이름을 안 가르쳐 주셨잖아요.”

소심하게 꿍얼거리자 잠시 말이 없던 남자가 답해 주었다.

“세스 엘마이어.”

왠지 낯익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어디서 들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엘마이어 님이라고 부를까요?”

"글쎄.”

남자-아니, 세스는 애매한 얼굴을 했다. 저게 무슨 표정이야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모르겠다.

“당선이 그렇게 부를 일은 없을 것 같군.”

“네?”

세스는 대답 없이 웃으며 밖으로 향했다. 그의 부하가 매섭게 나를 째려본 후 뒤를 따랐다.

나는 소리도 없이 닫히는 문을 멍하게 쳐다봤다.

***

세스가 남긴 빛은 점점 희미해지다가 이윽고 사라져 버렸다.

사방이 어두워지자 갑자기 불안해졌다.

‘돌아오겠지?'

거짓말로 자리를 피할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생각이 바뀔 수는 있었다. 초조함에 입술을 물어뜯던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불안해할 필요 없어. 그가 나타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찾으면 돼.’

불안도 기대가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나는 기대가 얼마나 쉽게 사람을 망가뜨리는지 알았다. 누구에게도 기대하고 싶지 않았다.

애써 마음을 가다듬은 순간,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빛이 들어왔다. 램프를 든 노예 상인이 허겁지겁 안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두툼한 볼살을 푸들푸들 떨며 물었다.

"네년, 숨겨 둔 남자가 있었냐?"

“졸리면 잠이나 잘 것이지, 무슨 헛소리람.”

투덜거리는 내게 상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면 왜 네 애인이라는 귀족이 찾아와? 네 이름까지 들먹이면서 몸값을 내겠다고 했단 말이다!"

그 말에 퍼뜩 감이 잡혔다. 세스가 분명했다.

불법이라 꽁꽁 감춰 둔 노예를 갑자기 찾아온 귀족이 사겠다고 하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세스도 나와 연인이라는 핑계를 댄 모양이다. 애인이 노예가 됐다면 여기까지 따라와 구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그냥 가족이라고 말하면…… 아, 안 통하겠네. 남매가 다 팔려 온 망한 집인데 , 누가 구하러 오겠어.’

결국 애인 행세가 최선인 셈이다. 꽤나 그럴싸한 상황인데도 상인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내 반용을 살피고 있었다.

‘어, 이거 잘못하면 세스를 만나지도 못하고 죽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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