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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화 (1/240)

1화

집이 졸딱망했다.

잘나가진 못해도 이름은 꽤 알려진 가문이었는데, 손도 못 쓰고 폭삭 주저앉았다.

누구의 미움을 샀는지 반역죄를 덮어쓴 탓이다.

대대로 이어 온 인맥과 재산은 반역죄 앞에서 아무 쓸모도 없었다.

아버지는 억울하다고 날뛰다가 칼을 맞았고, 어머니는 처벌이 두려워 자살했다. 끝까지 속 편한 인간들이었다.

‘진짜 억울한 건 난대'

부잣집에서 꿀이라도 빨았으면 몰라. 나는 이 집의 친딸인데도 자식 취급을 받지 못했다.

태어나자마자 악마가 들렸다는 이유로 지하실에 갇혔기 때문이다.

'악마는 무슨, 난 그냥 환생했을 뿐이라고! '

다만 환생하면서 생긴 이상한 능력이 문제였다. 나조차도 몰랐던 능력 때문에 내가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아악! 아니야! 저건 내 자식이 아니야!"

“당장 내 눈앞에서 치워 버려!"

온갖 비명과 욕설 속에서 감금당한 나는 무려 십여 년 동안이나 지하실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올해 스무 살이 되었으니 인생의 대부분을 지하실에서 보낸 셈이다.

꽃다운 나이에 덜컥 축어 다시 태어났더니, 부모란 것들은 지하실에 가둬 두고 축었는지 살았는지 관심도 없고, 못된 하녀는 틈만 나면 굶기고 괴롭히고.

환생한 내 삶은 구박덩이 신데렐라가 따로 없었다. 그런데도 나를 학대한 자들과 함께 죽어야 한다니, 억울했다.

투덜거리는 내 소매를 누군가 꾹 잡아당겼다. 돌아보자 울먹이는 금발 꼬맹이가 보였다. 동생인 브란이 었다.

"누, 누냐 우리 전부 죽는 거야?"

반역죄니까 그렇게 되겠지.

집안일을 하던 사용인들까지 줄줄이 묶여 끌려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반역자의 자식인 우리는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솔직한 대답을 해서 겁먹은 애를 울리고 싶진 않았다.

브란은 내게 잘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굶주린 내 게 음식을 갖다 주고, 날 탈출시키려다 들켜서 매를 맞기도 했다. 그래서 나도 브란만큼은 진짜 가족으로 여겼다.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

어차피 축어도 다시 태어난다. 내가 그랬으니까.

내게는 전생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좋은 나라에서 평화롭게 살다가 축은 기억이. 그래서 지금 상황이 별로 무섭진 않았다.

이왕이면 너무 고통스럽지 않게 죽었으면 좋겠다.

“너희는 이쪽이다.”

저택 수색을 끝낸 병사들이 다가와 말했다.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들을 따라갔다. 브란이 잽싸게 내 옆구리에 달라붙었다.

* * *

결론만 말하면 나는 죽지 않았다.

처형장으로 향하는 줄 알았던 수레가 멈춘 곳은 바로 항구였다.

환생한 후 처음 맡아 보는 짠 바다 냄새에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사형이 아니라 노역형 인가?'

죽진 않지만 죽을 만큼 힘든 일울 한다는 노역형.

가뜩이나 비실거리는 내 몸이 힘든 생활을 견뎌 낼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항구에서 뭘 시키려는 거지? 짐 나르기? 아니면 배 바닥 닦기?' 하지만 이번에도 내 예상은 빗나갔다.

수레에서 내려오자마자 한쪽 발목에 철컥 쇠고랑이 채워졌다. 목직한 족쇄의 무게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일하다가 도망갈까 봐 채우는 건가?'

현실을 부정하던 나도 우리에 갇혀서 배에 실리자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노예, 그것도 해외 수출용 노예가 된 것이다.

‘아니 , 내가 노예라니!'

전생에 민주 시민이었던 내가 노예가 되다니!

여자 노예가 겪을 수 있는 나쁜 일을 떠올리자 마지막 한 톨 정도 남아 있던 삶에 대한 미련이 사라졌다.

‘그냥 배에서 뛰어내릴까.’

환생의 유혹에 시달리는데, 옆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내 시선을 느낀 브란은 얼른 눈물을 닦으며 말 했다.

"거, 걱정하지 마. 내가 빨리 공을 세워서 누나를 구해 줄게.”

전쟁에서 공을 세운 노예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 브란은 제가 전쟁 노예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는 작게 한 숨을 쉬었다.

‘지금 걱정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브란은 금발에 녹색 눈을 가진 미소년이었다.

게다가 올해 13살이지만, 나이에 비해 유독 작고 호리호리 했다.

“아이고, 내 팔자야.”

나는 환생으로 도망가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나야 다시 태어나면 그만이지만, 브란은 아니었다.

‘주인 될 사람과 협상해야겠어.'

내겐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것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감금당했지만, 사실 굉장히 쓸모 있는 힘이었다.

나는 내가 가진 능력과 그걸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을 주인에게 알리기로 마음먹었다. 그 후에 동생을 풀어 주면 충성을 다하겠다고 협상할 생각이었다.

나는 울어서 탱탱 부은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너만큼은 꼭 구할 거야.’

그런데 내 갸륵한 결심에 찬물을 끼얹는 존재가 나타났다.

바로 우리를 서들인 노예 상인이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딱 봐도 드세 보이는군. 기를 꺾는 게 쉽지 않겠어.”

“엥?"

얌전히 앉아 있던 나는 황당한 눈으로 노예 상인을 쳐다봤다.

놈은 살찐 배를 출렁거리며 혀를 찼다.

“경매에 올리기엔 너무 팔팔하니 한동안 굶겨라.”

“아니 , 잠깐만요! 전 반항할 생각이 조금도 없거든요?"

나는 황급히 철장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다시 봐라. 난 지금 준비된 사축이란 말이야.

하지만 내 간절한 얼굴을 힐끗 쳐다본 상인이 덧붙였다.

"물도 최소한만 줘라.”

"······야.“

내가 여기서 나가면 너만큼은 꼭 환생시킨다.

* * *

쫄쫄 굶은 지 사흘이 지났다.

배는 어디론가 출렁출렁 흘러갔고, 나는 힘없이 누워 있었다.

함께 있던 브란은 다른 곳으로 옮겨진 뒤였다. 온순한 녀석은 나처럼 길들일 필요가 없다나.

‘길들이다니, 내가 무슨 맹수냐!'

나는 상인의 두툼한 배를 마구 때리는 상상을 했다. 드세게 생겼다고 굶기다니, 진짜 미친놈이었다.

바드득 이를 간 나는 애써 화를 가라앉혔다.

‘괜찮아 굶는 건 익숙하니까 버틸 수 있어'

지하실로 음식을 나르는 하녀는 늙고 교활했다.

그녀는 매일 내 음식을 훔쳐 먹고 남은 찌꺼기만 가져왔다. 화를 내면 귀가 안 들린다는 시늉을 하며 다음 날 오지 않았다. 결국 굶주림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움직이지 않고 자는 게 배고픔을 견디기 쉬웠다.

그때, 어디선가 달그락 소리가 났다. 작은 소리였지만 주변이 어둡고 조용하다 보니 유독 선명하게 들렸다.

‘뭐지?'

눈을 뜨는 순간,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희미한 빛과 함께 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사방을 살폈다.

온통 새까만 옷이 ‘나는 몰래 숨어 들어온 놈'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도둑인가?’

나는 그에게 들키지 않도록 몸을 웅크렸다. 확인을 마친 남자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무도 없습니다.”

“아니, 숨소리가 들린다. 다시 찾아봐.”

또 다른 목소리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깜짝 놀란 남자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자수해서 광명을 찾기로 했다.

“여, 여긴데요.”

슬며시 일어나자 남자가 후다닥 달려왔다. 우리에 갇혀 있는 나를 확인한 그는 안도한 기색으로 보고했다.

"노예 하나입니다.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노예라고?"

불쾌감이 담긴 목소리에 이어 사방이 어두워졌다. 커다란 그림자가 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막아 버린 것이다.

나는 바짝 긴장하며 내게로 다가오는 이를 바라봤다.

그는 무척 키가 컸다. 낮은 천장에 머리가 부딪칠까 걱정될 정도였다.

빛을 등져 새까맣게 보이는 몸은 늘씬했고 소리 없이 움직였다.

그가 내 앞에 멈춰 서자 기묘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타인을 짓누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꽤 고귀한 신분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 시선을 느낀 그가 말했다.

“관찰당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굉장히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모래로 고막을 문지르는 느낌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나는 귀를 매만지며 투덜거렸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거든요?"

그가 작게 웃는 것이 느껴졌다. 괜히 민망해진 나는 입을 삐쭉였다.

"실례했군. 뻔히 쳐다보기에 보이는 줄 알았지.”

다음 순간 탁 하고 빛이 켜졌다.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린 나는 눈이 부시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팔을 내렸다.

반딧불만 한 빛을 허공에 띄워 올린 남자가 물었다.

“이제 공평한가?”

나는 멍하게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잘생겼네.’

진부하지만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무서울 정도로 단정하고 귀족적인 얼굴이었다.

아니, 귀족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고귀함이라는 말을 인간으로 만들면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타인을 거부하는 것 같은 고결함. 얼음처럼 냉정한 분위기 속세와 거리가 먼 금욕적인 느낌까지 완벽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는 은처럼 반짝였고, 눈은 시리도록 새파랬다. 나는 그 차가운 눈동자가 더 싸늘해지는 것을 깨닫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관찰당하는 걸 싫어한다고 했지'

슬며 시 눈을 내리깐 나는 웅얼거리듯 물었다.

“마법사신가요?"

“아나 그리고 궁금한 건 그게 아니겠지.”

남자가 단호하게 내 말을 잘랐다.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 같았다 . 그래서 나는 직설적으로 요구했다.

“절 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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