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리플렉션 (9)
“어디 다녀오는 거야? 어?”
스타일리스트인 주영이 들어오는 지훈을 보고 묻다가 뒤따라오는 소윤을 발견했다.
또 여자를 데려왔다고 생각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는 그녀에게 지훈이 말을 걸었다.
“누나, 인사해요.”
“뭐?”
“새로 온 아르바이트예요.”
지훈은 직원들에게 밤놀이용 여자를 소개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주영은 굳어진 표정을 풀고 물었다.
“아르바이트? 모델?”
“아뇨. 그냥 심부름이나 시켜요.”
“그러려고 굳이 아르바이트를 뽑았어? 흐음. 예쁘장해서 모델로 써도 될 거 같은데.”
주영은 소윤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서 살펴보며 말했다.
“분위기도 좋고, 꾸미면 상당히 예쁠 얼굴이야. 아, 어딘가 희나랑 약간 닮은…….”
“안 닮았어요.”
지훈이 딱 잘라서 말하자 주영은 움찔했다.
“난 일하러 갈 테니 넌 짐 정리하고 심심하면 여기서 적당히 일하는 거 보고 배워.”
“아, 네.”
차가워진 목소리에 소윤은 움츠러들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은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가 문을 닫았다.
***
저녁이 되어 쇼핑몰 업무가 마감되었다. 야시장에 가는 스태프들이 떠나고, 남은 스태프들도 퇴근하거나 놀러 나갔다. 보통이라면 스태프들 사이에 끼어서 같이 놀겠지만, 지훈은 나가지 않고 집에 남았다.
거실에 드러누워 TV를 보고 있으려니 소윤이 쭈뼛쭈뼛 다가와 물었다.
“식사 준비할까요?”
“아니, 생각 없어.”
눈치 보는 태도가 어쩐지 신경에 거슬려서 지훈은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소윤은 금세 버려진 강아지 같은 표정이 되어버렸다.
“내 눈치 보지 말고 너 할 거 해. 올라가서 좀 쉬든가.”
신경 쓰여서 나름 배려해서 말한 건데 너무 말투가 딱딱하게 나갔다. 풀죽은 표정이 된 소윤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도 여기서 TV 봐도 돼요?”
“마음대로 해.”
지훈은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세요?”
“너 보고 싶은 거 편하게 봐. 난 내 방에도 TV 있으니까.”
이번에도 배려한 건데 소윤의 표정은 몹시 침울해졌다. 지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뭐야. 왜 그러는데? 할 말 있으면 확실히 해.”
“저기…….”
“저기, 뭐?”
“같이, 같이 봐요, TV.”
지훈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소윤은 쩔쩔매며 말했다.
“오빠 보고 싶은 거 봐도 돼요. 그냥 혼자 있기 쓸쓸해서.”
“귀찮은 녀석이네.”
지훈은 쌀쌀맞게 대답했지만, 소파에 돌아왔다. 그녀가 옆에 없는 듯 아예 넙죽 편하게 눕는 지훈을 보고 소윤은 헤헤 웃었다.
“왜 웃어?”
“아니요, 그냥…….”
지훈은 TV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딱히 화면에 집중이 되진 않았다.
소윤이 TV 대신 이쪽을 보고 있다는 것이 따끔따끔할 정도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잠시 참던 지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소윤은 입 안으로 잠시 우물쭈물하다 말을 꺼냈다.
“저기요. 전에 한 얘기에 대해서 좀 할 얘기가 있는데요.”
지훈은 대답도 안 하고 대충 눈썹만 움직여서 듣고 있다는 시늉을 했다.
“오빠가 오빠 좋아하지 말라고 한 거 있잖아요…….”
“…….”
“저, 그때는 아니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
“오빠…… 좋아하게 된 거 같아요.”
소윤은 새빨개진 얼굴을 숙이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한동안 둘 다 말이 없어 거실에 TV 소리만 흘렀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소윤이 지훈이 계속 말이 없자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오빠?”
작게 불렀으나 지훈은 묵묵부답이었다.
“오빠, 제 얘기 들으셨어요?”
“시끄러워. 귀찮게 하지 마.”
지훈은 채널을 바꾸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대답에 잠시 소윤은 잠시 멍해졌다.
“지금 그게 고백에 대한 답변이에요?”
“나 좋다는 여자 많아. 일일이 대답하기 귀찮아.”
너무나도 예의 없는 소리인데 콩깍지가 쓰여서인지 설득력 있게 들렸다.
“그렇겠네요.”
소윤은 의기소침해진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잠시 또 침묵이 흘렀다.
“오빠 좋다는 여자 많아도……. 나만 오빠랑 같이 살잖아요.”
다시 소윤이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리자 지훈은 코웃음을 쳤다.
“착각하지 마라. 내 입장에서는 너나 저 TV나 가구들이랑 다를 바도 없어. 같이 사는 게 아니라 그냥 여기에 있는 거지.”
“TV 취급하는 거예요? TV 같은 거랑 완전히 다르거든요?”
“그렇긴 하네. TV는 너랑 다르게 나 귀찮게 안 하는데.”
지훈의 쌀쌀맞은 대답에 소윤은 다시 고개를 떨궜다.
지훈은 TV로 다시 시선을 던졌지만, 뒷덜미가 근질근질해서 구시렁거렸다.
“절대 안 좋아한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하루 만에 뭐야?”
“사람 마음이, 그,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잖아요.”
“시끄러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냉장고에서 맥주나 하나 꺼내 줘봐.”
친여동생 대하듯 아예 막 나가자 소윤은 화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분간이 안 가는 듯했다. 그녀는 원망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순순히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지훈에게 건넸다.
지훈은 맥주캔을 따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일 끝나고 소파에 누워 먹는 맥주는 지훈이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이었지만, 뭔가 목에 걸리는 것처럼 껄끄러웠다.
힐긋 옆을 보자 고개 숙인 소윤의 어깨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야, 우냐?”
“……알면 말 걸지 마요.”
무신경한 지훈의 말에 소윤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지훈은 잠시 기다렸다가 물었다.
“계속 그렇게 울고 있을 거야?”
“알면 좀 달래줄 생각 없어요?”
“뚝 그치면 바비인형 사줄게.”
“내가 초등학생인 줄 알아요?”
“애인 건 똑같잖아.”
지훈의 말에 소윤이 고개를 들고 빨간 눈으로 지훈을 쏘아보았다.
“나 애 아니에요.”
“애야.”
“오빠랑 5살 차이밖에 안 나요.”
“5살이면 강산이 반쯤 변할 세월이다.”
심드렁하니 말하고 지훈은 남은 맥주를 쭉 들이켜 비웠다. 그리고 캔을 구기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너 그런 얘기 할 거면 난 올라간다.”
소윤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그래도 지훈은 억지로 무시하며 발걸음을 떼었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지훈을 다시 소윤이 불러 세웠다.
“이거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아 또, 뭐.”
“오빠 왜 나랑 같이 살아주는 건데요?”
“너 말고 진짜 같이 살고 싶은 여자가 같이 안 살아주거든.”
딱 잘라 말하자 소윤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훈은 그대로 2층으로 올라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
샤워하고 나온 지훈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잠은 별로 오지 않았지만, 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가만히 누워 침대의 푹신함에 파묻혀 있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아주 조용히 침실 문이 열리고 빛이 새어 들어왔다.
누군가 방으로 살금살금 들어오고 있었다. 찌푸린 눈으로 누군가 살피던 지훈은 소윤이라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지훈은 귀찮기도 하고 뭘 하려나 궁금하기도 해서 그냥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소윤이 침대로 기어 들어와 눕자 무시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너 진짜 큰일 날 청소년이다.”
어처구니가 없는 말투로 툭 내뱉자 소윤이 움찔했다.
“안 자고 있었어요?”
“그래. 이건 뭐야? 유혹?”
“그, 그렇다면요?”
성욕이 돋는 대신 웃음이 나왔다.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라면 깜찍하긴 하다는 정도일까. 지훈은 입꼬리를 올린 채 딱 부러지게 말했다.
“너한테 손댈 생각 없으니 가서 얼른 잠이나 자.”
“안 나갈 거예요.”
소윤은 나름 결심을 하고 온 건지 상당히 단호했다.
“그럼 내가 나간다?”
“오빠 나가면 나 가출할 거예요.”
“그걸 협박이라고 하는 거야?”
지훈이 실소를 터뜨리자 소윤이 발끈한 어조로 말했다.
“나 나가서 클럽 가서 아무 남자나 따라갈 거예요. 다시 원래 집으로 돌아가서 식모살이하거나.”
“그건 너만 안 좋은 거지 나랑 상관없잖아. 뭐 그런 협박이 다 있어?”
“오빠는 그래도 정말 상관없어요? 전혀?”
지훈은 태연자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윤은 조마조마한 듯 지훈을 쳐다보다가 입술을 깨물고 몸을 일으켰다.
“나 정말 나갈 거예요. 잘 있어요.”
잠시 가만히 있던 지훈이 그녀가 정말 나갈 기세를 보이자 진저리를 내며 팔을 뻗었다.
“상관없다면서 왜 잡아요?”
“아오, 너 진짜 찝찝하게 왜 그러냐.”
“오빠 좋아하지 말랬는데 좋아하게 됐으니까 나가야 하는 거잖아요.”
할 말이 궁색해진 지훈은 괜스레 얼러댔다.
“시끄러워. 조그만 게 입만 살아가지고.”
“나 같이 여기서 자도 돼요?”
“아니, 이 넓은 집에 다른 방 놔두고 왜 여기서 낑겨 자?”
“같이 안 재워주면 그냥 나갈래요.”
아예 뻗대는 소윤을 보며 지훈은 입을 떡 벌렸다.
“뭐 어때서 그래요? 어차피 나한테 손 안 댈 거면 같이 자도 상관없잖아요.”
“하,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지훈이 어이에 대한 상실감을 토로하든 말든 소윤은 천연덕스럽게 떡 드러누웠다. 옆에 누우라는 듯 베개까지 팡팡 두들기는 그녀를 보고 지훈은 한숨을 내쉰 뒤 휙 돌아 누워버렸다.
계속 꼬맹이 취급했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도 있었지만, 고등학교 2학년이면 성인 여자랑 크게 다를 바 없다. 이상한 의식을 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어질 것 같아 지훈은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러나 소윤은 그가 그러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오빠, 자요?”
“…….”
“오빠…….”
보드라운 몸이 등에 몸을 기대왔다. 지훈은 입술을 깨물었다.
“까불지 말고 얌전히 자.”
“오빠는 정말 나 싫어요?”
“…….”
“나 진짜로 오빠 좋아하는데.”
맹랑하게도 소윤이 더욱 몸을 밀착시켰다.
소윤의 심장이 어찌나 세게 뛰는지 박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 정도로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아니 화낼 수가 없었다.
지훈은 씁쓸하게 눈을 내리떴다. 그도 이 침대에 좋아하는 사람과 누워 있었던 적이 있다. 그녀는 등을 돌리고 마음을 닫은 채 그를 돌아봐 주지 않았다. 품에 안고 있을 때조차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다.
바로 곁에 있는데 마음이 전해지지 않는 괴로움 따윈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뭐, 만난 지 3일밖에 안 된 소윤의 마음이 그렇게 깊을 리는 없지만 말이다.
“절대 그런 마음 없어.”
낮게 말하자 실망하는 기운이 등 뒤로도 느껴졌다. 지훈은 무른 자신을 한탄하며 낮게 덧붙였다.
“지금은 그렇지만, 다 크면 생각은 해볼 수 있지.”
“정말요?”
뛸 듯이 기뻐하는 목소리가 안쓰럽다.
“내 마음 변하기 전에 네 마음이 먼저 변할걸.”
“안 그럴 거 같은데요.”
실제로 지훈도 변하지 않았기에 딱히 확신은 없었다. 소윤은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때까지 나 여기 있어도 돼요?”
지훈은 대답 대신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그걸 보기라도 한 것처럼 소윤이 열심히 말을 이었다.
“아르바이트해서 방세도 지불할게요. 내보내지 말아주세요.”
“너 하는 거 봐서.”
“귀찮게 안 할게요.”
“이미 귀찮게 굴고 있잖아.”
딱딱거렸지만, 지훈의 말투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뒤에서 헤실헤실 웃는 게 느껴져서 지훈은 딱 못을 박아버렸다.
“있는 거랑 그 고백은 완전 별개야. 난 또 몇 년씩 수절할 생각은 없어.”
금방 또 침울해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뭐라 말하지 못하고 잠잠했다.
그저 안타까운 듯 지훈의 옷을 꼭 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게 오히려 지훈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 이후로 두 사람 사이에 말이 오가지 않았다.
지훈은 씁쓸해서 잠들지 못했다. 반면 등 뒤에서는 곧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레 고개를 돌린 지훈은 새근새근 잠든 소윤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지훈보다 일찍 일어났다지만, 이렇게 남자 옆에서 경계심 없이 잠드는 걸 볼 때 애는 애다 싶었다.
등을 잡은 손을 살며시 풀고 지훈은 돌아누웠다. 소윤은 잘 깨지 않는 체질인 듯 푹 잠든 채 눈을 뜨지 않았다.
아무리 억지를 부렸다 해도 이렇게 같이 자는 건 역시 이상하다. 그러나 억지로 내보내서 그녀가 위험에 처하게 되는 건 싫었다. 갈 데 없어서 재워주긴 하지만, 어째 상황이 자꾸 예전에 오버랩돼서 껄쩍지근하다.
5년 전에 그렇게 진혁을 변태 취급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밀고 들어오면 내보낼 방도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야. 나 그 새끼 맞잖아.”
지훈은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진혁이 자신을 라이벌로 인식하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 소윤이나 진훈이나 둘 다 그냥 귀엽게 보인다.
지훈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자신을 심란하게 만든 소녀의 뺨을 주욱 잡아당겼다. 소윤은 깨어나지 않고 입만 조금 벌렸다.
바보같은 얼굴이 된 게 조금 우스워서 작게 웃고 있을 때 협탁에 올려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소윤이 깰까 봐 지훈은 황급히 받았다. 현상이었다.
[뭐 해? 술 마시는데 나올래?]
“아니. 오늘은 못 나가.”
[왜? 누구랑 같이 있어?]
“집에서 애 봐야 돼.”
지훈의 나지막한 대답에 현상은 킥킥 웃었다.
[그래, 잘해봐라.]
전화를 끊고 지훈은 다시 소윤을 흘깃 쳐다보았다.
아직도 희나를 생각하면 가슴 저미는 것 같은 그리움이 밀려온다. 반면 이렇게 가까이 밀착하고 있어도 소윤에게 여자라는 감정은 딱히 들지 않았다. 사실, 소윤이 아니라 다른 여자에게도 마찬가지다. 다시 사랑할 준비는 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실연에는 반려동물을 키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뺨을 꼭 찔렀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꽤 귀여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킥킥 웃으며 이불을 목까지 덮어주고, 지훈도 옆에 누워 눈을 감았다.
계속 오지 않던 잠이 기분 좋게 그를 감쌌다.
***
“뭐야, 왜 이렇게 늦게 와?”
희원이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날아왔다. 희원은 마루에서 내려오고 있는 희나를 발견했다.
방금 서울에서 왔는데 발목까지 오는 긴 원피스를 입은 그녀를 보자 여전히 도시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불여시같이 생겼지만, 옷발 하나는 잘 받는다고 생각하며 희원은 성큼성큼 안으로 걸었다.
“차가 늦게 도착해서 걸어왔어.”
“왜 걸어와. 데리러 오라고 하면 되잖아.”
“놀러 갔다 오는데 뭘 마중씩이나 와. 피곤하게스리.”
대답하다가 희원은 문득 마당 옆에 주차된 못 보던 차를 발견했다.
“저 차는 뭐야? 손님 왔어?”
“아니. 산 거야.”
“응? 진혁이 형이 산 건 다른 차 아닌가?”
희나와 진혁이 결혼했지만, 희원은 호칭을 정정하지 않았다. 희나도 매형 같은 건 낯뜨겁다며 그냥 내버려 두고 있었다.
희원은 차를 다시 살펴보았지만, 진혁이 샀다고 했던 것과 모델도 브랜드도 달랐다.
“선생님이 산 건 저기 있어. 저건 내가 산 거야.”
희나가 가리키는 쪽에 진혁의 새 차가 있었다. 희원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뭐야, 너도 차 샀어? 하긴, 여긴 차 없으면 많이 불편하긴 하지만.”
희나는 헛기침하더니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내 뭔가 반짝거리는 것이 그녀로부터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받아 들고 보니 자동차 열쇠였다.
“너 타.”
뭐냐고 묻기도 전에 짧은 말이 돌아왔다.
“뭐?”
“난 선생님이 타던 차면 돼. 어차피 병원 갈 때나 타는데, 뭐.”
“됐어. 왜 네가 헌 차를 타? 돈 남아도는 것도 아닌데 나한테 차를 뽑아주고.”
“남아돌아서 그런다, 왜!”
희나는 목소리를 높여서 말하고는 곧 덧붙였다.
“선생님이 내가 모아놓은 돈은 그냥 내가 다 가지고 있으래. 집도 있고, 나는 별로 필요한 거 없어.”
이런 무드에 익숙하지 않은 희나는 바닥을 괜히 신발로 문질렀다.
“내가 뭐 해준 것도 없고. 일 도와주는 거도 고, 고맙고. 그러니까 너 타.”
희원은 목이 잠긴 것처럼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잠시 마당에 침묵이 감돌았다.
“닭살 돋아.”
분명히 기분은 이런 게 아닌데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시끄러워.”
희나 역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밥은 먹고 왔냐?”
“아니. 배고파.”
“그럼 들어가서 먹어. 아직 어머니도 안 주무시니까.”
“넌 먹었어?”
“아니. 난 생각 없어.”
말하면서 희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요즘 이상하게 속이 메슥거려서 밥을 잘 못 먹겠단 말이야.”
“외국 갔다고 신나서 이상한 거 먹다 온 거 아니야?”
“갔다 온 지가 벌써 한 달이 넘었는데 무슨.”
“군것질을 많이 하니까 그런가 보지. 살은 하나도 안 빠졌구먼.”
희나은 심술궂게 말하는 희원을 째려보고 먼저 돌아서 마루로 올라갔다. 뒤따르면서 희원은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누나.”
“이럴 때만 누나냐? 멍청아.”
반쯤은 못 듣길 바랐는데, 들린 모양이다. 시큰둥한 목소리에 희원은 혀를 찼다.
남이 기껏 고맙다고 말하는데.
불여시 같고 말투도 거칠고 억척스럽고. 하여튼 하나도 이쁜 구석이 없다.
마루로 따라 올라서자마자 거실 쪽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돌아보자 방에서 우다다 뛰어오는 작은 실루엣이 보였다. 희원은 킥킥 웃으며 가볍게 팔을 벌렸다. 다리에 힘차게 부딪혀 온몸을 번쩍 들어 올리자 제법 묵직한 느낌이 든다.
“미래, 잘 놀았어?”
“응! 달리기 일등 했다! 메달 받았어! 그리고오 선생님이 강낭콩 심으라고 준 거 싹 났어! 오빠, 볼래? 볼래?”
“그래. 아침에 같이 보자.”
조잘조잘 끊임없이 떠드는 미래를 안은 채로 희원은 마루에 올라섰다. 진혁의 어머니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주방에서 나왔다.
“왔구나, 밥은 먹었니?”
“아뇨, 배고파요. 주세요.”
대답하자 진혁의 어머니는 웃으면서 주방으로 돌아갔다. 거실에 앉아 있던 진혁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제 왔어? 늦었네.”
희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혁의 옆에 가 소파에 앉았다.
오래된 소파는 지나치게 푹신해서, 몸이 확 잠겨버리는 것 같다. 거기에 깊숙이 기대자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온 기분이 든다.
“다녀왔습니다.”
말하며 희원은 미소 지었다.
리플렉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