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리플렉션 (8)
“잘 잤어요?”
“엉. 일찍 일어났네.”
말하면서 주방 쪽에 흘깃 시선을 던지는 그를 보고 희원이 먼저 선수 쳐서 말했다.
“소윤이는 아까 나갔어요. 학교 가려면 교복이 있어야 하니까 집에 들른다고 하던데.”
“……누가 물어봤어?”
“물어볼 거였잖아요.”
지훈은 뭐라고 낮게 구시렁거리더니 희원 쪽으로 머리를 기댔다.
“흠, 그럼 우리는 이제 뭐 할까?”
“형은 일해야죠. 곧 스태프들 올 텐데요.”
“너 온 핑계 대고 쉬지, 뭐.”
“그럴 거 없어요. 나 다들 오기 전에 내려갈 거예요.”
“왜 벌써 내려가?”
지훈이 고개를 토끼처럼 바짝 들었다.
“이젠 진짜 가야겠어요. 우리 꼬맹이랑 형님 보고 싶어서.”
“뭐야. 나는 안 보고 싶었냐!”
“형님은 별로…….”
솔직히 많이 보고 싶었지만, 고분고분 말하면 주희원이 아니다. 지훈이 발끈해서 희원의 목을 짤짤 흔들었다.
“나쁜 노오오오옴!”
“에이, 또 놀러 올게요. 그리고 이제 형도 심심할 일 없잖아요.”
“또 소윤이로 드립치려고 그러지.”
“치고 싶은데 형이 주먹 내릴 때까지 참을게요.”
지훈은 위협적으로 들고 있던 주먹을 내려치지는 않았지만, 희원의 뺨에 아프게 삼겹살 썰기를 먹여주었다.
고통스러워하는 희원을 놓아준 후 소파 등받이에 스르르 기대며 지훈은 무기력하게 말했다.
“하아. 나도 너 따라서 내려가 버리고 싶다.”
“시골에 또 풍파 일으키려고요?”
“……희나 보고 싶어.”
“걔는 형 인연이 아니에요.”
나오는 대로 버릇처럼 하는 말에 버릇처럼 대답해주었다. 지훈은 멍청히 앞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인연이 아니네, 네가 아깝네, 그런 말 너무 들어서 못 박히겠다.”
“아까운 건 모르겠네요.”
지훈이 희원 쪽을 흘깃 돌아보았다.
“주희나가 싸가지 없긴 해도 괜찮죠.”
“오올, 누나 편드는 거야?”
사실 지훈이 아깝다는 말은 희원이 가장 많이 했을 것이다. 지훈은 씩 웃으며 아까 꼬집힌 여파로 아직 빨간 희원의 뺨을 다시 잡아당겼다.
“너도 이제 철 드냐?”
“그런 거 아니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거거든요? 그리고 아파요! 그만 당겨요!”
지훈은 한 번 더 세게 꼬집은 뒤에 놔주며 물었다.
“지금 곧 갈 거야?”
“네, 그럴 거예요.”
“그래. 그럼 내려가서 연락하고, 희나한테 안부 전해.”
“무슨 안부를 전해요?”
“이혼하면 나한테 오라고 해.”
바로 구겨지는 희원을 보고 지훈은 낄낄 웃었다.
“희원이 너 정말 좋아?”
가방을 가지고 내려온 희원을 현관까지 배웅하며 지훈이 물었다.
“응. 정말 좋아요.”
대답하고 나가는 희원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지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사장님, 누가 찾아왔는데요?”
집 안의 사무실에서 전표를 확인하던 지훈을 스태프가 불렀다. 거실로 나가 찾아온 상대를 확인한 지훈은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열한 시 반인데.”
뜬금없는 말에 열혈 소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지훈이 첨언했다.
“열정은 인정하지만, 데리러 오기에는 좀 늦은 거 아니냐?”
“소윤이 어딨어요?”
열혈 소년은 시그니처 대사를 날렸다.
지난번에 왔을 때 힘으로 안 되는 걸 확인해서인지 반항적이긴 해도 존댓말로 바뀌었다.
지훈은 속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어딨긴 어딨어? 진작에 학교 갔으니 너도 빨리 따라가 봐라.”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내가 지금 학교에서 온 건데.”
지훈의 잘 손질된 눈썹이 꿈틀했다.
“학교 안 갔어?”
“그래요. 집에 없는 거예요?”
“아침에 학교 간다고 나갔는데.”
불만이 가득하던 소년의 얼굴에 불안이 번졌다.
“어디 간 거지? 전화도 안 받고.”
“글쎄.”
짧게 대답하다가 지훈은 문득 소년의 교복을 보고 물었다.
“교복 가지러 집에 간 거 아냐?”
“그런가? 그런 거면 지금쯤은 학교에 왔을 텐데.”
소년은 휴대폰을 꺼내 여기저기에 메시지를 보내더니 곧 말했다.
“아직도 안 왔대요. 진짜 나간 거 맞아요?”
“그럼 내가 이 사람 많은 데다 감금이라도 했을 것 같냐?”
지훈의 잘생긴 얼굴과 화려한 집을 쓱 훑어보고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소윤이 원래 집 알아?”
“알죠.”
“그럼 주소 가르쳐줘 봐.”
“갈 거면 나도 같이 갈래요.”
“가긴 어딜 가. 애들은 학교나 가.”
“애 아니거든요? 그렇게 부르지 마요.”
몹시 발끈하는 소년을 보고 지훈은 픽 웃으며 물었다.
“너 이름이 뭔데?”
“박진훈이요.”
진훈이라니.
어째 이름까지 비슷해서 부르기가 영 껄끄럽다.
지훈은 진훈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자신의 번호를 입력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기로 주소 문자 보내놓고 넌 학교 가라.”
”나도 같이 간다니까요!“
”시끄러워. 문자 안 오면 가만 안 둔다.“
살벌하게 말하고 지훈은 진훈을 내버려 둔 채 집을 휙 나와 버렸다.
***
진훈이 보낸 소윤의 집 주소는 지훈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부촌이었다.
도착해 보니 입주 가정부를 두는 집답게 제법 으리으리했다.
물론 그가 사는 펜트하우스에 댈 바는 아니었으므로, 지훈은 주눅들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벨 소리가 울렸으나 응답이 없었다. 잠시 기다린 지훈이 재차 벨을 누르려고 할 때였다.
[오빠?]
소윤의 놀란 목소리였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
“네 스토커가 가르쳐줬어. 학교 간다더니 뭐하고 있는 거야?”
[그게…….]
소윤은 말을 흐리고 잠시 침묵하더니 목소리를 낮춰 덧붙였다.
[나가서 설명할게요.]
곧 정원 너머에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대문 밖으로 얼굴을 내민 소윤은 후다닥 달려와 지훈의 팔을 한쪽으로 잡아끌었다.
“어딜 가려고. 그냥 여기서 얘기해.”
소윤은 누가 볼까 쩔쩔매는 듯했지만, 지훈은 꿈쩍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갇혀 있는 거 같진 않은데 여기서 뭐하는 거야?”
“일 그만두고 싶다고 했더니 당장 관두면 어떻게 하냐고 하셔서요. 다음 사람 구할 때까지 있으래요.”
“다음 사람 구하는 건 그렇다 치고 학교는 그럼 왜 안 가는데?”
“학교 가면 또 가출할지도 모르니까 새로운 사람 오면 인수인계하고 학교 가라고…….”
소윤의 말에 지훈의 눈이 사납게 변했다.
“무슨 가정부가 인수인계를 해. 관두면 관두는 거지. 게다가 학교도 가지 말라고? 미친 거 아냐?”
“오빠, 안에 들리겠어요.”
“들리는 게 뭐 어떻다는 거야? 짐이나 당장 들고 나와.”
지훈이 언성을 높이자 소윤은 더욱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었다. 말리는 소윤을 볼 때 혼자 제대로 짐 챙겨서 나오기는 틀린 것 같았다.
답답해진 지훈은 소윤의 팔을 반대로 잡아끌고 걷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어쩌려고 그래요!”
당황해서 소윤은 뿌리치려 했으나 지훈의 단단한 팔은 막무가내였다. 그대로 그녀를 끌고 간 지훈은 거침없이 현관문을 두들겼다.
소란을 듣고 곧 돈푼 꽤 있어 보이는 중년 부인이 현관에 나타났다.
“어떻게 오셨죠?”
“얘 데리러 왔습니다.”
부인은 지훈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거친 말투, 그리고 화려한 복장과 문신 등을 보고 소윤의 양아치 친구쯤이라고 판단한 듯 눈빛과 태도가 변했다.
그녀는 상대하기 싫다는 듯 지훈 쪽을 보지도 않고 소윤에게 말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그렇게 소란을 부려?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당장 데리고 나가.”
“신고? 고등학생을 등교도 못 하게 강압해놓고? 어이가 없군.”
“강압은 누가 강압을 했다고 그래? 이쪽도 사정이 있는데 그렇게 갑작스레 관두면 어쩌라는 거야?”
“그래 봤자 집안일인데 하루 이틀 직접 하면 병나십니까? 그리고 사람 구하는 법 몰라요? 요즘은 전화 한 통이면 바로 구해지는데.”
지훈이 받아치자 부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지훈은 여전히 몸 둘 바를 모르는 소윤에게 말했다.
“들어가서 짐이랑 교복 가지고 나와.”
“그치만…… 그냥 가면 이번 달 월급 안 준다고…….”
“그깟 돈 잘 처먹으라고 해.”
들으라는 듯 지훈이 말하고 살짝 떠밀자 소윤은 고개를 숙이고 부인의 옆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걸 보고 중년 부인이 벌컥 화를 냈다.
“아니, 저 배은망덕한 것. 그동안 먹여주고 재워줬는데 남자 생기자마자 도망을 가? 하여튼 없는 것들한테 잘해줄 필요가…….”
“이봐요.”
막말을 참다못한 지훈이 부인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머리 하나 작은 여인을 바로 앞에서 위압적으로 내려보며 지훈은 낮게 으르렁댔다.
“입조심해요, 아줌마.”
“아, 아줌마?”
“내 앞에서 말 그따위로 하다가 많이들 쥐어터졌거든요. 열 받으면 보이는 게 없어서.”
현상이 들으면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고 길길이 날뛸 법한 말을 내뱉은 뒤 지훈은 굳어버린 여인의 뒤를 향해 소리쳤다.
“꼭 필요한 거만 대충 챙겨서 나와. 남는 건 애 돈이나 떼어먹는 아줌마 살림에나 보태라고 하고.”
곧 소윤이 커다란 백팩을 메고 손에 교복이 걸린 옷걸이를 든 채 쪼르르 달려 나왔다. 소윤과 함께 지훈이 멀어지자 부인이 용기가 돌아온 듯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당신, 당신. 가만 안 둬! 내 남편이 누군지 알아?”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도 지훈은 태평하게 돌아보았다.
“그러는 당신은 내가 누군지 알아?”
“너 같은 깡패 새끼를 어떻게 알아! 가만 안 둘 거야, 너!”
“할 수 있으면 해봐. 재미있겠네.”
씨익 웃으며 말을 남긴 지훈은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대문을 나왔다. 그리고 소윤을 화려한 스포츠카 조수석에 태운 뒤, 차를 출발시켰다.
“이, 이렇게 나와도 괜찮은 걸까요?”
“안 괜찮으면?”
“정말 해코지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저 집 엄청 부자예요.”
“나도 부자야.”
당당하게 대답하자 소윤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지훈은 큰길로 통하는 길로 차를 돌리며 물었다.
“너 학교는 어디 다니냐?”
“개포고등학교요.”
별로 멀지 않다. 데려다줄까 생각하던 지훈의 눈에 소윤의 차림새가 들어왔다.
질끈 묶은 머리카락은 부스스하고, 옷도 집안일 할 때 입던 옷에 앞치마 차림이다. 내려서 교복으로 갈아입기도 좀 그렇고, 집에 갔다가 학교에 가기엔 좀 너무 늦은 시간이다.
“오늘은 그냥 쉬어.”
지훈의 말에 소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큰길에 다다른 스포츠카는 부드럽게 삼성동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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