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리플렉션 (7)
“형, 나 왔어요.”
지훈은 흔드는 손길에 눈을 떴다. 아침에 비해 멀끔해진 모습으로 희원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왔냐? 지금 몇 시야?”
“아홉 시 좀 넘었어요.”
“밤?”
“네. 여태 잔 거예요.”
지훈은 대답 대신 기지개를 늘어지게 켜며 물었다.
“현상이는?”
“거실에 있어요.”
“이제 온 거야?”
“아까 와서 얘기 좀 하다 형이 안 일어나길래 깨우러 왔어요.”
말하는 희원이 뭔가 묘하게 히죽거리고 있었다.
“왜 그렇게 웃어?”
“걔랑 이야기했어요. 형이 여기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알바비까지 준다고 했다면서요?”
“대략 맞지만, 이상하게 웃지 마! 나는 그냥…….”
“어허어허. 두 번 말하기 싫으면 변명은 내려가서 하시죠. 현상이 형이 이 갈면서 기다리고 있어요.”
분노한 현상의 설교를 들을 생각을 하니 암울해서 지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등 떠밀리듯 1층에 내려가자 현상이 맥주병을 손에 든 채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지훈이 다가가서 앉았으나 곧장 불벼락을 내릴 줄 알았던 현상은 뜻밖에 별말이 없었다.
“……아무 말 안 해?”
제 발 저린 지훈이 먼저 입을 열자 현상이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묻자.”
“뭔데?”
“너 가엾은 여자에 대한 패티시 있냐?”
“닥쳐, 인마! 그런 거 아니라고 몇 번 말해!”
“아닌데 대체 왜 저런 애들만 옆에 못 둬서 안달이야? 양갓집 규수가 인기 많은 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거다.”
“양갓집 규수가 나한테 어울리냐?”
“아니. 너 같은 놈한테는 가당치도 않지.”
현상은 고개를 휙 돌리고 손에 들고 있던 맥주를 들이켜며 말을 이었다.
“됐어. 네 인생이야 어차피 개차반이고, 덕택에 가여운 애 하나 구제되면 그나마 잘된 거지. 네가 그렇게 싫어하던 선생 입장에서 한번 잘해보라고.”
냉랭한 현상의 말에 발끈한 지훈이 뭐라 말하려다 멈췄다. 소윤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일어났네요. 밥 차릴까요?”
쫓겨날 위기에서 벗어나서인지 소윤의 얼굴에 생기가 넘쳤다. 지훈이 대강 고개를 끄덕이자 좋아라 주방으로 달려가는 소윤의 뒷모습을 보며 현상이 혀를 찼다.
“쯧쯔. 희나가 쟤의 반의반만이라도 너한테 관심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네가 이렇게 가엾은 가출 소녀 수집은 안 했을 거 아냐.”
“수집할 생각도 없고, 쟨 애초에 희나도 아니야. 하는 것만 봐도 완전 다르구먼.”
“너한테나 달랐지.”
그렇게 쏘아붙이고 현상이 소파에 벌러덩 누워 둘의 대화에 관심 없는 듯 휴대폰을 보고 있는 희원을 발로 꾹꾹 찔렀다.
“지금 거기서 희나가 그 선생한테 어떻게 하냐?”
“좋아 죽죠.”
“저 여자애가 이 등신한테 하는 거랑 비슷하지?”
“뭐, 그런 거 같네요.”
희원의 태연한 대답이 이미 아문 상처를 비집고 들어와서 쿡쿡 찌른다. 어차피 알던 사실이고, 또 두 사람이 일부러 긁는 거란 걸 알아도 지훈은 울화가 치밀었다.
“야, 어디 가?”
갑자기 소파에서 일어서는 지훈을 현상이 불렀다.
“나갈 거야.”
“어디 가려고? 이 밤중에.”
“언제는 밤에 안 나갔어?”
지훈의 말에 현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 클럽 가려고?”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한 뒤 지훈은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파우더룸에 현상이 있었다.
“야, 일부러 그러는 거면 관둬.”
“일부러 그러긴 뭘 일부러 그래. 맨날 하던 짓인데.”
“지금 진짜 놀 기분이라고?”
“그래.”
고집스레 잘라 말하고 지훈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상은 곧 말없이 파우더룸을 나가버렸다.
***
“너 진짜 귀엽다. 모델이야?”
붉은 립스틱을 바른 육감적인 입술이 끈적끈적한 음성으로 물었다.
지훈은 VIP룸의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댄 채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23살이라고? 그렇게 안 보이는데……. 클럽 자주 와?”
“뭐 가끔.”
“시계도 꽤 좋은 거 찼네. 금수저?”
여자는 시계를 자세히 보는 척 지훈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팔로 가슴의 뭉클한 감촉을 느끼며 지훈은 그녀를 내려보았다.
다소 인공미가 풍기긴 하지만, 얼굴도 꽤 예쁘고 몸매도 좋았다. 게다가 이 정도로 먼저 과감한 스킨십을 해오는 걸 보면 지훈이 아주 맘에 든 것 같았다. 표정도, 몸짓도 같이 나가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정도면 굳이 클럽에서 시간을 더 보낼 필요도 없다. 지훈은 그녀가 기다리는 말을 해주었다.
“나갈까?”
“벌써? 어디 가려고?”
새침한 말투로 튕기는 듯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이미 허락한 상태였다. 허리를 감싸 안고 끌어당기자 여자는 못 이기는 척 그를 따라나섰다.
“어디 가?”
지훈의 팔에 매달려 클럽을 나선 여자가 재차 물었다. 지훈은 주차장 쪽으로 발길을 옮기며 말했다.
“집으로 가자.”
“뭐? 집?”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처음 만난 남자가 집으로 가자는데 꺼려지는 게 당연하다. 그래도 방어 본능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지훈은 구구절절한 설득 대신 상의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냈다. 버튼을 누르자 주차장에 세워진 지훈의 고급 외제차에 빛이 들어왔다. 차를 확인한 여자의 눈빛이 변했다.
“여기서 가까워. 집이 편하니까 거기서 한잔 더 하지.”
클럽 실장에게 말해 대기시켜둔 대리기사에게 다가가 키를 건네고 지훈은 가만히 서 있는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안 갈 거야?”
“갈래.”
지훈은 미소를 띤 채 뒷좌석에 올라탔다.
“우와 이거 진짜 너희 집? 너 재벌 집 아들이야?”
“별로 그런 거 아냐.”
현관에 들어오자마자 여자는 탄성을 질렀다.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안으로 들어서던 지훈의 발길이 멈췄다.
거실에 약한 불빛이 들어와 있었다.
불이 꺼진 가운데 소리를 죽인 채로 켜져 있는 TV.
그리고 그 앞에 앉아 있는 자그마한 뒷모습이 보였다.
말할 필요도 없이 소윤이다. 그녀는 인기척을 느낀 듯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오세…….”
지훈을 발견하고 반갑게 맞이하던 얼굴이 함께 들어온 여자를 보고 딱딱해졌다. 여자는 지훈의 팔짱을 낀 채 비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어? 누가 있네. 여동생?”
“아니.”
“동생 아니야? 그럼 누군데?”
“그냥……. 아르바이트하는 애.”
적당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얼버무렸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소윤이 굳은 얼굴을 떨궜다.
“신경 쓰지 말고 올라가자.”
지훈은 하얗게 굳어진 얼굴을 뒤로한 채 여자와 함께 2층으로 향하는 층계에 올라섰다.
“자기 방 진짜 좋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여자가 말했다. 진심으로 감동한 듯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방은 객실일 뿐 지훈의 방은 아니었다. 집에 수많은 여자를 데려왔지만, 그의 방 침대에서 함께 잠든 여자는 희나뿐이었다.
“그래?”
심드렁하게 대답하던 지훈은 문득 자신이 그녀의 이름조차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여태까지 몸을 섞은 여자 중 이름이 기억나는 여자보다 그렇지 않은 쪽이 더 많았으니까.
“왜 그러고 서 있어, 자기야?”
다행히 여자는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녀는 육감적인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다가와 지훈의 목에 팔을 감았다. 유혹적으로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은 제법 색정적이었으나 지훈은 ‘자기라고 부르는 걸 보니 이 여자도 내 이름을 모르는 모양인가 보네’ 같은 쓸데없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그녀의 얼굴이 점점 다가왔다. 입술이 닿을 듯 다가와 따뜻한 숨결이 얼굴에 끼얹어졌다.
그 순간 지훈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왜 그래?”
지훈은 키스하는 대신 그녀를 안아 들고 침대에 눕혔다. 입에서 나는 담배 냄새가 역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렸다는 말은 할 수 없으니까.
여자를 눕히고 능숙하게 몸을 덮었다. 그녀는 얼굴을 돌린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 듯 지훈의 단추를 풀어내려 갔다.
그에 화답하듯 지훈은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안았다. 두 사람의 몸이 밀착되고, 여자의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
“아응, 자기야. 빨리…….”
그녀는 긴 다리로 지훈의 허리를 감으며 그의 벨트에 손을 얹었다. 여자가 지퍼를 내리며 몸을 매만지고 있는데도 전혀 동하지 않았다.
‘뭐야. 왜 이래.’
지훈은 억지로 기분을 돋우려고 에로틱한 상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방금 본 소윤의 굳은 얼굴이었다.
“웃, 제길.”
“아, 응. 자기야, 괜찮아. 천천히…….”
지훈이 흥분하지 않은 걸 깨달은 여자가 손을 깊숙한 곳으로 뻗어왔다. 지훈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멈췄다.
“미안한데.”
“응? 괜찮다니까…….”
지훈은 그녀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그리고 돌아서서 흐트러진 옷을 추스르며 말했다.
“택시비 줄 테니까 집에 가.”
“뭐?”
“가라고. 아무래도 너랑은 안 되겠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자가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손바닥은 목적을 이루기 전에 지훈의 손에 붙잡혔다.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말자. 얌전히 돌아가.”
맞을 짓 한 건 사실이지만, 맞기 싫은 건 더 큰 사실이다. 지훈은 지갑에서 지폐를 잡히는 대로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여자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옷자락을 움켜쥔 채 쿵쿵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나가 버렸다.
떠나는 그녀를 따라 지훈도 1층으로 내려왔다. 거실에 이미 소윤의 모습은 없었다.
여자를 보낸 지훈은 잠시 복도를 서성거렸다.
그는 망설이듯 복도 한쪽의 문을 쏘아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
이른 아침.
일찌감치 일어난 희원은 소파에 벌러덩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전화번호 하나를 화면에 띄운 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초조한 듯 손가락을 비비던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이 통화를 슬라이드 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다가 멈추자 희원은 쏟아내듯 말문을 열었다.
“형!”
[응. 희원아. 서울이야?]
반가운 목소리로 부르자 수화기 너머에서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잔잔해서 듣는 사람의 기분까지 부드럽게 만드는 음성.
바로 진혁이었다.
“네, 일이 좀 생겨서 늦어지네요.”
[그래. 오랜만에 간 거라 볼일도 많겠네.]
“바쁜 시긴데 자리 비워서 죄송해요.”
[죄송하긴. 여기 일은 신경 쓰지 마.]
잔잔한 목소리에는 염려 외의 조금의 다른 뜻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걸 들으니 마음이 푹 놓였다.
[재미있게 놀고 있는 거지? 뭐 부족한 건 없고?]
“네. 형은 지금 집이세요?”
[응. 그렇지.]
진혁의 목소리 뒤로 사각거리는 잔디 소리가 들렸다. 일부러 다른 가족들이 듣지 않게 바깥에 나온 모양이었다. 희원과 통화하는 걸 알면 다들 한마디씩 하려고 할 테니까.
[너는 어디야? 친구 집?]
진혁의 말에 희원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지훈이 형 집에 있어요.”
돌려 말하려다가 그냥 대놓고 말해버렸다. 난감해할 거로 생각했는데 진혁은 말을 고르는 기색도 없이 즉시 물어왔다.
[괜찮아?]
중의적인 질문이다. 희원도 모호하게 대답했다.
“뭐, 괜찮죠.”
[괜찮다니 다행이네.]
다행이라는 말에도 아무 사심이 없어 보였다. 희원은 진혁 이야기만 나오면 발끈하는 지훈을 떠올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어제 쇼핑도 다녀왔어요. 현상이 형이 이것저것 엄청 사줘서 다 들고 내려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같이 일하던 누나도 만났는데…….”
이런저런 시시껄렁한 얘기를 진혁은 기분 좋게 들어주었다. 그냥 “응, 응.” 하고 대답할 뿐 별다른 말을 해주는 것도 아닌데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다. 왜 희나가 종일 붙어 있으면서도 진혁의 전화가 오면 그리 좋아하는지 이해가 갔다.
“형, 나 금방 내려갈래요.”
[그래.]
불쑥 말하자 잔잔하게 웃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곧 끊겼다.
왜 그러나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아빠를 찾는 커다란 고함이 들려왔다.
“미래 일어났어요?”
[아, 응. 나중에 통화하는 게 낫겠네.]
진혁의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희원은 킥킥 웃었다.
“아뇨, 끊지 마세요.”
[하지만……. 읏.]
[오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목소리에 희원은 수화기에서 귀를 떼어냈다. 하지만 불쾌하긴커녕 웃음만 나왔다. 희원은 웃음을 꾹 참고 일부러 툴툴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어이, 꼬맹이. 아침부터 그렇게 소리 지르면 못쓰지.”
그러자 미래가 곧장 목소리를 낮췄다.
[오빠. 보고 싶어어어.]
“그래?”
[응, 빨리 와! 미래 조용히 말하고 착하게 굴게.]
[미래야. 오빠한테 떼쓰면 못써.]
진혁의 타이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전화를 바꾸는 기척이 있었다. 희원은 누르고 있던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금방 갈게요.”
[미래 말에 신경 쓸 필요 없어.]
“신경 쓰는 거 아니에요. 밖에서 며칠 있으니까 빨리 집에 가고 싶어요.”
일부러 집에 강세를 줘서 말했다. 아주 찰나의 침묵이 흐르고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짧은 대답이었지만, 미소 짓고 있는 진혁의 단정한 입가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다.
겨우 이틀 밖에서 잤을 뿐인데 정말로 빨리 내려가고 싶어졌다.
최근 받은 월급으로 산 컴퓨터로 게임 좀 하고, 꼬맹이 약 올리고, 희나한테 등짝을 맞고.
그러다 진혁이 부르러 와서 원두막으로 나가면, 승수가 막걸리 주전자를 털레털레 들고 와 모기향에 불을 피울 거다. 최근 친해진 동네 형님들이랑 희나 친구들 다 같이 고기 구워 먹고, 구식 노래방 기계로 돼지 멱따는 소리도 내고.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희원은 불쑥 입을 열었다.
“거기 있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진혁에게선 아무 대답도 없었다.
“이따 봐요, 형.”
[응. 조심해서 내려와. 도착하면 데리러 갈 테니 전화하고.]
“네, 그럴게요.”
전화를 끊고 나서도 희원은 한동안 액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의지가 되는 구석이 있다는 게 이렇게 든든한지 몰랐다. 무슨 짓을 해도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 있다는 건 마음이 부러지지 않는 버팀목이 된다.
기분이 한껏 좋아져서 헤헤 웃고 있으려니 계단 위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지훈이 내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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