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리플렉션 (6)
마침 두 사람이 2층에서 같이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는 지훈을 발견하고 소윤이 말을 걸었다.
“아직도 거기 그렇게 있었어요?”
“너희는 좋은 시간 좀 보냈냐?”
“무슨 좋은 시간을 보내요?”
“혈기왕성한 남녀가 단둘이 한 방에 있으면 당연히…….”
“이상한 말 하지 말아요!”
소윤은 새침하게 말을 자르고 함께 나온 소년을 재촉했다.
“이제 빨리 집에 가.”
“알았으니까 밀지 마.”
소년은 여전히 살벌하게 눈을 번뜩였으나, 안에서 소윤이 뭔가 타이른 듯 묵례까지 하고 나갔다.
현관까지 따라가 소년을 내보낸 소윤은 곧 주방으로 향했다. 지켜보던 지훈은 그녀가 먹고 남은 상을 치우려는 것을 눈치챘다.
“그냥 내버려 둬.”
“네?”
“좀 있으면 도우미 이모 오실 거니까 놔둬도 돼.”
“그냥 제가 할게요.”
“됐으니까 이리 와서 좀 앉아봐.”
소윤은 쭈뼛거리는 걸음걸이로 다가와 지훈의 맞은편에 앉았다.
지훈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관찰했다.
갸름한 얼굴에 갈색 머리카락, 커다란 눈은 희나와 나름대로 비슷했으나 어딘지 도도함이 부족하다. 어제는 완전 발라당 까진 애 같았는데 지금 보니까 제법 얌전하고 착실해 보였다.
“뭐 할 얘기 있으세요?”
불러놓고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지훈을 대신해 소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훈은 말문을 뭐라고 열지 잠시 고심한 후 호구조사를 시작했다.
“너 몇 살이냐?”
“18살이에요.”
지훈은 잘생긴 입매를 살짝 움찔했다. 나이도 하필 지훈과 희나가 만났던 나이다. 그는 얼굴을 기울이며 다시 물었다.
“클럽 자주 가?”
“아뇨. 어제 처음 간 거예요.”
소윤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흐음…….”
“정말이에요.”
지훈이 눈을 가늘게 뜨고 불신의 눈초리로 대하자 소윤이 변명했다.
“집 나왔는데 갈 데 없어서 피시방에 있다가 10시에 쫓겨났거든요. 맥도날드 가다가 어제 걔랑 만났는데 따라오면 잠잘 곳 걱정할 필요 없다기에…….”
“그럼 어제 입고 있던 옷이랑 화장은 뭐야?”
“VIP룸 들어가려면 제대로 차려입어야 한다고 걔가 해줬어요. 빌린 옷인데 내가 입고 가서 어디냐고 자꾸 전화 오길래 여기 있다고 가르쳐줬더니…….”
눈에 들어서 클럽 VIP룸에 들어가려면 아무래도 예쁜 친구가 있으면 유리할 것이다. 어제 클럽에 익숙해 보이던 소윤의 친구를 생각해볼 때 대강 앞뒤가 맞는 것 같았다.
지훈은 마음속의 의심을 조금 누그러뜨리고 질문을 바꿨다.
“너 왜 가출한 거야?”
“……재작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자라온 지훈은 이러한 불행이 너무 멀게 느껴져 반대로 숙연해졌다. 그러나 말할 나위 없이 가엾은 일이긴 해도 가출 사유로는 조금 이상하다.
“고생이 많았겠네. 그런데 그러면 대체 언제 가출한 거야?”
“어제 처음 나온 거예요.”
“2년 전일로 가출하는 건 좀 이상한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그걸로 딱 끝나지는 않아요.”
“그야 그렇겠지만…….”
소윤은 고개를 떨궜다. 그녀에게 닿아 있던 지훈의 시선이 문득 무릎에 얹어진 두 손에 닿았다.
초조한 심정을 대변하듯 꼬물거리는 작은 손끝은 10대 소녀의 그것이라기엔 너무 거칠어져 있었다.
지훈은 건선 혹은 습진 같은 것이 하얗게 일어난 것을 보고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흉해서라기보다 안쓰러워 그런 것이었으나 지훈의 시선을 느낀 그녀는 황급히 주먹을 쥐어 손을 가렸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소윤이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어머니는 입주 가정부를 하면서 저를 키우셨어요. 그리고 2년 전 돌아가시고 나서는 제가 이어서 했고요.”
“너 16살인데 입주 가정부를 했다고?”
“네. 다행히 그렇게 하게 해주셨어요.”
지훈은 중학생 소녀에게 식모살이를 시켰다는 게 아동학대처럼 느껴져 경악한 것이었는데 소윤은 도리어 ‘다행’이라고 표현했다.
아연한 지훈의 귀에 소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일은 힘들어도 학교도 다닐 수 있고 해서 참을 만했어요. 그러다 올해 초에 할아버지가 노환으로 쓰러지셨어요. 병원에 계시다가 어제 퇴원했는데…….”
“퇴원했는데 왜?”
“……나보고 안 잠을 자라고…….”
“안 잠?”
말을 흐리는 소윤에게 지훈이 되물었다. 그녀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거동이 불편하시니까 할아버지랑 같은 방에서 생활하면서 수발을 들라고 했어요.”
지훈의 입이 벌어졌다. 너무 충격적이어서 차마 말도 나오지 않았다.
“병시중을 도맡아서 해야 하는데 불편한 게 있어도 제대로 말 못하니까 밤에 혹시 무슨 일 없게 같은 잠자리에 들라고 했어요. 어차피 나이가 많아서 아무것도 못 하니까 괜찮다고, 젊은 사람 기운 받아서 쾌차하는 때도 있다고, 다 좋은 거라고 그러는데……. 너무, 너무 싫어서…….”
말할수록 싫은 감정이 밀려 올라오는지 소윤은 몸서리를 쳤다. 지훈도 그녀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됐으므로 오만상을 찌푸리며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으윽! 그런 거 당연히 싫지! 그 사람들 미친 거 아냐? 여고생한테 어떻게 그런 걸 시켜?”
분개하는 지훈의 앞에서 소윤의 눈가가 젖어들었다. 눈물을 훔치기 시작한 그녀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지훈이 씁쓸하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아무나 따라가서 자겠다든가 하는 위험한 짓을 한 거야?”
“그냥 다 아무려면 어떤가 싶었어요. 정직하게 열심히 살아봤자 누가 알아주나 싶어서…….”
지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왜 세상엔 힘든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거냐. 모른 척하기 힘들게 말이야.
중얼거리며 그는 티슈를 잡아 그녀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 훌쩍거리며 눈물을 닦던 소윤은 머리 위에 커다란 손이 느껴져 깜짝 놀랐다.
“내가 알아줄 테니까 울지 마.”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마음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 온몸으로 번졌다. 소윤은 붉어진 양 뺨을 감추려고 고개를 더 깊이 숙였지만, 그 전에 지훈이 이미 보고 말았다.
그는 볼을 살짝 긁적이면서 입을 열었다.
“일단, 내가 뭔가 말하기 전에 하나 확실히 하자.”
“……뭐를요?”
“너 나 좋아해?”
갑자기 날아온 돌직구에 소윤이 화들짝 놀라 튕기듯 고개를 들었다.
“무, 무슨!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
“그렇게 경악할 건 없고, 그냥 기다 아니다 그거만 확실히 말해봐.”
“무슨 근자감이에요? 다, 당연히 아, 아니죠…….”
끝을 흐리긴 했으나 확실한 부정이었다.
지훈의 눈이 반짝이는가 싶더니 그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너 지금 분명히 나한테 그랬다! 잊어버리지 마.”
“에?”
“나 안 좋아한다고 한 거. 그거 절대 바꾸지 말라고.”
“누가 바꾼대요? 오그라들게 왜 자꾸 물어봐요?”
“아아, 여자들이 하도 날 좋아해대는 바람에 골치를 썩고 있어서 말이지.”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지훈의 말에 소윤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뭐라 태클을 걸지는 못했다.
술에 취한 채로 잤다가 일어나서 뒹굴뒹굴하던 몰골 그대로인데 조금도 추레하지 않은 작은 얼굴. 밝은 갈색 머리와 목덜미의 커다란 문신까지도 잘 어울리는 스타일리시함에 목소리도 좋고, 무엇보다도 서울 한복판에서 이만한 펜트하우스에 살고 있다.
인기가 없으려고 고사를 지내도 여자들이 줄을 설 것이 뻔했다.
여고생의 마음속에서 검증을 불러일으킨 인기남은 조금도 거리끼는 기색 없이 하품을 쩍 했다. 그리고 기지개를 켜면서 말했다.
“그럼 뭐 됐어. 여기서 너 있고 싶은 만큼 있다가 가.”
“네? 정말이요?”
“그래, 어차피 너 하나 있다고 달라질 것도 없어.”
이미 어제도 비슷한 말을 들었지만, 술에 취한 채 놀리듯이 한 말과 무게가 달랐다. 비록 배를 벅벅 긁으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하긴 했지만 말이다.
기뻐서 눈물도 멈춘 채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소윤을 향해 지훈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냥 있으라는 거 아니야. 그 정도면 다 컸으니까 다른 사람들한테 폐 끼치지 말고 너 스스로 밥값은 해.”
“네. 아르바이트 자리 구해서 방세 낼게요. 냉장고에 있는 음식이든 물건이든 절대 손 안 대고요.”
“뭔 소리야. 무슨 박물관 관람해? 그렇게 어떻게 살아. 그리고 고등학생이 아르바이트는 무슨. 학교나 꼬박꼬박 나가라.”
조금 전에 밥값을 하라고 한 지훈이 딴소리를 하자 소윤은 아연했다. 그는 어리둥절해하는 그녀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여긴 쇼핑몰 해. 저쪽 복도로 들어가면 안쪽은 다 쇼핑몰 관련 사무실이나 창고야.”
소윤은 지훈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지만, 그냥 복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대체 이 집이 얼마나 넓은 건지 짐작도 되질 않는다.
“평일 되면 스태프들 올 거야. 학교 갔다 오면 잔심부름도 하고, 배송 업무도 돕고 출출하다고 하면 밥도 좀 차려주고, 술판 벌어지면 안주도 차려주고 해. 제대로 하면 아르바이트비도 줄 테니까.”
“돈은 괜찮아요. 저, 재워주시는 것만으로도…….”
“학교 다녀야 하는데 돈도 없이 어쩌려고? 이상한 남자 따라가서 벌어온다 하려고?”
“월급 받은 거 다 모아놨어요. 아껴서 쓰면…….”
“그 코 묻은 돈은 나중에 대학 갈 때 쓰거나 하고 준달 때 받아. 바보야.”
지훈은 딱 잘라 말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럼 그렇게 정해진 거로 하고 난 씻으러 간다. 너도 들어가서 쉬어라.”
“아, 네.”
소윤은 그를 따라서 일어섰다. 지훈은 그녀를 지나쳐서 걸으려다 멈춰 섰다.
“그리고 내 옷 맘대로 꺼내 입지 말고.”
가볍게 꿀밤을 콩 먹이자 소윤이 황급히 변명했다.
“그, 그냥 세탁실에 나와 있는 거 입은 거예요.”
“으엑? 그런 지저분한 걸 입었다고?”
지훈이 경악하며 몸을 기울여 다가가자 소윤도 깜짝 놀랐다. 그는 소윤의 어깨 부근에 얼굴을 대고 킁킁 냄새를 맡으며 중얼거렸다.
“내 냄새 나잖아.”
아무 반응이 없어 소윤을 올려보자 얼굴이 완전히 빨개져 있었다.
지훈은 흠칫해서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원래 남자들에게도 서슴없이 스킨십을 하는 데다 여자를 하도 많이 만나다 보니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지만, 영 안 좋은 짓이란 자각이 들었다.
‘조심 좀 해야겠군.’
속으로 생각하며 지훈은 헛기침하고 말을 돌렸다.
“아까 말한 복도로 들어가면 안쪽에 창고 있어. 그 안에 여자 옷 샘플들 있으니까 적당히 찾아 입어.”
“적당히요?”
“그래. 아무거나 입어도 되지만 봉투는 버리지 말고. 나중에 장부에 체크해야 되니까.”
“그래도 돼요?”
“된다고 하잖아. 난 씻고 한숨 잘 거야. 희원이 오면 깨워.”
지훈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듯 비비고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소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지훈의 감촉이 남아 있는 머리에 손을 얹고 한참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세 때문인지 얼굴이 타는 듯이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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