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리플렉션 (5)
“클럽에서 데려왔다고?”
희원의 말을 들은 현상의 표정이 어이에 대한 상실감을 드러냈다.
“무슨 얘기라도 들었어요?”
“아까 들어오는데 쟤가 달려 나와서 누구냐고 묻잖아! 그래서 새로 구한 알바생이나 모델인가 보다 하고 친구라고 했더니 잘 부탁한다고 했어! 수줍게 ‘오빠가 여기 살아도 된다고 했어요’라고 하던데!”
“아, 뭐. 그렇게 됐어요.”
배를 벅벅 긁으며 대답하는 희원을 현상이 짤짤 흔들며 다그쳐 물었다.
“아, 뭐 그렇게 됐어요? 클럽에서 데려온 애를 여기서 살게 한다고? 게다가 쟤 미성년자 아니야? 이젠 범죄까지 저지르냐?”
“에이, 그래 봤자 4, 5살 차인데 범죄씩이나.”
“이 멍청한 놈들! 하루 좀 눈을 뗐더니 모르는 애를 집에 들어 앉혀? 대체 어떤 앤 줄 알고……. 아, 젠장. 야, 신지훈!”
현상은 희원에게 더 말해도 소용없다고 생각했는지 소파로 쿵쿵 걸어가 지훈을 두들겨 깨웠다.
“으윽! 살살 좀 깨워.”
“살살 깨우게 생겼어? 제대로 설명 안 해?!”
“아우. 자는 사람 깨워서 뭘 설명하라고 난리야.”
둘이 투덕투덕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희원은 주방 쪽으로 다가갔다.
“뭐 하는 거야?”
“해장국이라도 끓이려고요.”
“웬 해장국? 재료가 있나?”
“제가 나가서 사 왔어요.”
그녀의 말대로 아일랜드 식탁 위에 방금 사 온 듯한 봉투가 놓여 있었다.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시켜먹으면 되고.”
“재워주셨으니까 밥값은 해야지요.”
희원이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클럽에서 아무 남자나 따라가서 밤을 지새우려던 애가 하는 행동으로는 너무 기특했다.
“아마 맛 괜찮을 거예요. 나 식당에서 아르바이트 오래 했거든요.”
그녀의 말대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찌개에서 제법 괜찮은 냄새가 났다. 그녀는 한참 큰 희원을 올려보며 또랑또랑하게 물었다.
“바로 드시게 차릴까요?”
“아, 그래. 내가 형 불러올게.”
일어난 직후였지만, 최근 농촌에서 생활하다 보니 맛있어 보이는 식사에 입맛이 돌았다.
희원이 거실로 돌아오자 지훈은 현상에게 설교를 듣고 있었다.
“불쌍하고 나발이고 너는 대체 생각이 있는 거냐? 만약 쟤가 꽃뱀이라서 너한테 뭔 일 당했다고 고소라도 하고 나오면 어쩔 거야? 너도 나름대로 얼굴 많이 팔린 사람인데 쇼핑몰 하루아침에 구설수로 문 닫을 거냐고!”
“아, 나도 몰라. 그렇게 맘에 안 들면 네가 직접 내보내든가.”
“네가 벌인 일을 나보고 치우라고?”
“아니면 이미 데려온 걸 어쩌라고. 그만 좀 해. 머리 울려.”
지훈이 적반하장으로 큰소리를 치자 현상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턱 벌렸다. 말이 멈춘 틈을 타 희원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분노는 나중에 하고 밥이나 먹죠. 준비 다 됐어요.”
“밥?”
누워서 귀만 후비적거리고 있던 지훈이 밥이란 말에 벌떡 일어났다.
“그만하고 밥이나 먹자. 아, 배고파.”
밥 핑계로 화제를 피하는 게 뻔히 보였지만, 평소에 워낙 제대로 끼니를 챙겨 먹지 않는지라 현상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식탁 근처로 다가가자 제법 그럴듯하게 차려진 한식 아침 식사가 눈에 들어왔다.
계란을 입혀 노릇노릇 구운 소시지와 보기만 해도 속이 풀릴 것 같은 새빨간 부대찌개, 그리고 새로 한 흰 쌀밥.
최근 푸짐한 가정식에 익숙해진 데다 빈말을 못 하는 희원은 그냥 의자에 걸터앉았지만, 가정식의 불모지에서 사는 거나 다름없는 지훈은 눈을 빛냈다.
“오, 이거 꽤 맛있겠는데. 네가 한 거야?”
“네.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지만.”
지훈은 수도에 대강 손을 씻더니 소시지를 그대로 집어 입에 넣었다.
“이런 거 오랜만에 먹으니까 맛있군.”
“형, 찌개도 맛있는데요.”
“그래? 야, 잘 먹을게. 어?”
의자에 앉고 나서야 소윤에게 시선을 준 지훈이 눈을 부드럽게 휘며 씩 웃었다.
“너 화장 안 한 게 훨씬 낫네. 이러고 있으니 예쁘고만.”
소윤의 얼굴이 확 빨개졌다. 아랑곳없이 수저를 들고 크게 밥을 퍼서 먹기 시작하는 지훈을 쳐다보며 현상이 혀를 찼다.
“쯧쯧. 죄 많은 남자 같으니라고.”
“그러게요. 누가 아니래요.”
“뭐가?”
“됐으니 밥이나 먹어.”
희원이 맞장구치자 고개를 드는 지훈을 현상이 다시 밥그릇 쪽으로 눌렀다.
얼마간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식탁 위에 올려둔 소윤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건 어제 그 열혈 소년의 이름이었다. 가차 없이 통화 거절을 슬라이드한 소윤은 잠시 뒤 도착한 카톡을 보더니 사색이 되어 일어섰다.
“뭐야, 너. 진짜 왔다고? 정말 미쳤어? 왜 그래!”
구석 한쪽에 서서 통화하는 소윤의 목소리를 셋은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전화를 끊고 돌아온 소윤이 울상을 지었다.
“진짜 미쳤나 봐요. 여기 밑에 왔대요.”
“엥? 여길 어떻게 알고?”
“어제 친구한테 카톡으로 어디 있는지 대충 말해줬더니……. 걔가 알려줬나 봐요.”
“자식. 진짜 열심이네.”
“뭐야. 무슨 소리 하는 건데?”
웃는 지훈의 옆에서 어리둥절해져 있는 현상에게 희원이 짧게 상황을 설명했다. 현상은 기묘한 표정을 짓고, 도리어 지훈은 시원스레 말했다.
“뭐, 좋잖아. 올라오라고 하자.”
“네?”
지훈은 인터폰으로 다가가 경비실로 연결했다. 정말로 소년 하나가 와서 서성거리고 있다는 말에 재밌어하며 집으로 올려보내라고 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칠게 초인종을 울리는 소리가 집 안을 시끄럽게 울렸다.
“어딨어, 변태 자식! 당장 나와!”
거실에서 문을 열어주자마자 곧 위풍당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가보니 귀여운 얼굴에 호리호리한 소년이 최대한 불량한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었다.
“어이, 안녕. 지금 말한 거 설마 나야?”
‘변태 자식’이라고 지칭당한 것치고 굉장히 해맑게 웃으며 지훈이 그를 반겼다. 으리으리한 집의 모양새에 더해 문 앞으로 키 큰 남자 셋이 우르르 몰려나가자 소년은 기가 죽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목소리의 크기는 줄지 않았다.
“안녕 같은 소리 하네! 소윤이는 어디 있어?”
지훈이 소윤을 부르기도 전에 소윤이 쪼르르 달려왔다. 그녀는 곧장 소년에게 달려들어서 고사리 같은 주먹으로 팡팡 때리면서 밀어냈다.
“뭐하는 거야? 이게 무슨 민폐냐고! 너 정말 미친 거 아냐?”
“앗, 잠깐만, 일단 가만히 좀 있어 봐.”
“꺄앗! 너 이거 안 놔?”
소년은 소윤의 가느다란 양손을 잡아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는 지훈을 향해 고함을 쳤다.
“소윤이는 내가 지킬 거야! 당신 같은 변태 아저씨는 빠지라고!”
소년의 외침과 눈은 한없이 진지했다.
잠시 실내에 침묵이 흘렀다. 그 눈에 마주해 바들바들 떨리던 지훈의 입술이 열렸다.
“크,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으하하하하하하, 미치겠다!”
“풉, 아, 귀여워. 진짜…….”
지훈의 웃음소리를 신호로 세 사람이 동시에 폭소를 터뜨렸다.
배를 잡고 웃고 있는 세 사람을 어안이 벙벙해서 쳐다보던 소년이 소리를 빽 질렀다.
“뭐야! 왜 웃어! 나 장난하는 거 아냐!”
“으하핫. 이미 웃겨 죽을 거 같으니까 그만해, 그만.”
“크흡. 너 나중에 군대 갔다 오면 오늘 이 말 한 거로 엄청 이불킥 할 거다.”
재미있어서 찔끔 나온 눈물을 닦으며 지훈은 앞으로 나가 소년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봐, 그렇게 화낼 필요 없어. 귀여운 짓은 이쯤이면 됐으니까 돌아가라.”
“어디다 손을 대는……! 윽!”
손을 치우고 주먹을 날리려던 소년은 곧 지훈에게 팔목을 붙들리는 신세가 되었다. 너무 쉽게 막아내는 그를 보고 몸이 부들부들 떨리도록 힘을 줘봤지만, 키도 훨씬 크고 싸움으로 잔뼈가 굵은 지훈의 손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네가 걱정하는 일 같은 건 아마 안 일어날 거니까 곱게 말할 때 돌아가. 형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는데 까불지 말고.”
“뭐, 뭐야, 이거…….”
“놓아주기 전에 미리 말해두는데, 또 덤비면 가만 안 놔둔다. 난 두 번은 안 참아.”
웃는 얼굴로 을러대는데 말투는 살벌했다. 사실 걸어온 싸움은 피하지 않고 2배로 키우는 지훈의 성격상 이 정도면 꽤 봐준 것이었다.
지훈이 정말 그를 곱게 놓아주었지만, 소년은 이번에야말로 주눅이 든 듯 이만 갈 뿐 덤벼들진 못했다.
“밥은 먹었냐?”
눈을 부라리고 있던 소년은 지훈의 질문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지훈은 그의 등을 안쪽으로 떠밀며 권했다.
“안 먹었으면 네가 좋아하는, 어, 이름이 뭐랬지?”
“……김소윤이요.”
“어, 소윤이가 밥 차려놨으니까. 같이 먹고 놀고 가. 알았지?”
“에! 왜 들여보내는 거예요?”
“시끄러워. 애들은 사이좋게 노는 거야.”
지훈은 불만을 일축해버리고 둘을 질질 끌어 안으로 데려갔다. 소년은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주는 밥을 먹고, 다 먹자마자 소윤에게 팔을 붙잡힌 채 2층으로 끌려갔다.
먼저 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있던 지훈은 계단 위로 사라지는 둘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말했다.
“하하, 거 자식 귀엽게 노네.”
식후 커피를 마시고 있던 현상이 그런 지훈을 보며 말을 던졌다.
“너는 최소한 자기혐오는 없구나.”
“무슨 소리야.”
“모르냐? 저놈이 너잖아.”
딱 떨어지는 지적에 희원이 흥미진진한 눈을 지훈에게 돌렸다. 지훈의 예쁘장한 얼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알아. 그래서 잘해주는 거잖아.”
지훈의 대답을 듣고 현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잘해준다고? 지금 너 입장도 자각하고 있는 거야?”
“내 입장? 내가 뭐?”
“네가 그때 그 선생이잖아.”
현상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눕듯이 나른하게 기대앉아 있던 지훈이 펄쩍 뛰다시피 몸을 세웠다.
“야, 이 미친! 누가 그 자식이라는 거야?”
“엥? 몰랐어요?”
“뭐야! 너까지 왜 그래? 내가 그렇게 재수 없는 자식이라니!”
희나에 대한 유감은 없어도 정작 죄 없는 진혁에게 여전히 앙심이 가득한 모양이었다. 지훈이 길길이 날뛰건 말건 현상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갈 데 없고 의지할 데 없는 어린애한테 사심 없이 잘해줘서 백마 탄 왕자님 됐잖아.”
“난 애한테는 완전 관심 없다니까!”
“네가 실제로 관심이 없건 말건 걔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텐데 뭐.”
“달라! 360도 완전히!”
“……360도면 제자리잖아, 멍청아.”
현상은 차갑게 말하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모르겠으면 잘 생각해봐라. 희원아, 가자.”
“엥? 어디 가?”
“오랜만에 올라왔으니 맛있는 것도 사 먹이고 옷도 몇 벌 사 입혀서 내려보내야지.”
“나도 갈래.”
“넌 네가 싼 똥이나 치워. 병신 새끼야.”
현상은 차갑게 말하며 지훈을 소파로 꾸욱 눌러 떼어냈다. 그리고 옆에서 꾸물거리는 희원을 재촉했다.
“가자니까?”
“나 일어나서 아직 씻지도 않았는데요.”
“사우나 먼저 가면 되지. 일단 나가자.”
그제야 희원은 현상을 따라 일어섰다.
“형, 다녀올게요. 잘해봐요.”
“잘해보긴 뭘 잘해봐!”
지훈의 외침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집을 나섰다.
***
혼자 남은 지훈은 오후가 되도록 소파에 늘어진 채 뒹굴뒹굴했다. 숙취 때문에 좀 더 자고 싶어도 머리가 복잡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제길. 누가 그런 밥맛 새끼라는 거야. 비슷하지도 않은데.’
속으로 계속 똑같은 투덜거림을 반복했다.
녀석과 자신은 완전히 다르다. 지훈은 소윤을 별로 재워주고 싶지 않지만, 녀석은 갈 곳 없는 여자애를 살살 꼬셔서 자기랑 같이 살게 한 놈이다.
물론 희나는 자기가 먼저 찾아가서 재워달라고 간청한 거라 했지만.
그래도 고등학생이 자기 좋아하는 걸 알면서 옆에 두다가 결국 사귀기까지 한 무책임한 자식이다.
‘애초에 자기 좋다는 고딩을 옆에 왜 두냐고, 대체.’
그렇게 중얼거리자 마음 한구석에서 찜찜함이 몰려 올라왔다.
얼굴 마주칠 때마다 빨개지고 깜짝깜짝 놀라는 소윤의 태도.
지훈이 숙맥도 아니고 뭔가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저 어린애 취급해서 무시했지만, 생각해보면 고2 때의 첫사랑 때문에 그 고생을 해놓고 마냥 별거 아닐 거라 치부하기도 뭐하다.
“깔끔하게 정리를 해둬야겠어.”
낮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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