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 그 너머에는-135화 (135/140)

외전 2. 리플렉션 (4)

“희나는……. 내 얘기 안 해?”

“안 해요.”

딱 부러지게 말하며 희원은 입술을 살짝 비죽거렸다. 그 특유의 표정이 어딘지 익숙하고 그리운 느낌이 들어 지훈은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뭐, 뭐예요?”

“너야말로 희나랑 엄청 닮았다.”

바로 가까이에 얼굴을 들이대고 빤히 보면서 말하자 희원이 기겁했다.

“윽, 뭐야, 그 눈빛은. 형 지금 나 꼬시는 거예요?”

“무슨 개소리야!”

“얼굴 들이대지 마요! 잘생겼어도 남자는 개 사절이니까!”

희원은 소파 반대 방향으로 슬며시 몸을 이동시키고는 질색하자 지훈이 그를 발로 꾹 밀었다.

“웃기지 마. 이 자식. 남이 좀 감성에 젖어보려고 했더니.”

“감성 같은 소리 하지 마요. 으윽. 그런 눈길 다시 보내면 형이라도 가만 안 있을 거야.”

“오, 가만 안 있으면 어쩌려고? 이제 다 컸다 이거냐?”

지훈은 희원을 붙잡고 헤드록을 먹였다. 희원은 온몸을 비틀어가며 용을 썼지만, 결국 방바닥을 탭하며 항복을 선언하고 나서야 그의 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 이제 내가 더 큰데 왜 내가 지지?”

“경험의 차이지. 약골 녀석.”

킥킥 웃는 지훈의 얼굴은 즐거워 보였다. 희원은 같이 웃다가 문득 마음 한구석이 찡해졌다.

지훈은 희나로 인해서 희원의 존재를 알았지만, 희원에게 있어서 지훈은 중학교 때부터 우상 같은 존재였다.

제대로 학교도 못 가고, 돌봐주는 이 없어서 꼬질꼬질하게 다녔던 희원은 지훈을 동경했다. 멀리서 바라본 지훈은 잘생기고 옷도 잘 입는 부자에 인기도 많고 재미있고 주먹도 세고, 아무튼 희원이 부러워하는 요소를 모두 다 가지고 있었다.

지훈이 희나를 따라다닐 때 둘이 잘됐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지금 진혁도 친형처럼 따르고 정말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지훈과의 인연이 끊기는 게 내색하지 않아도 뼈아팠다.

그래서 지훈이 아무렇지 않게 집에 불러 다시 웃고 장난을 쳐주니 새삼 감격스러웠다. 희원은 지훈에게 몸을 기대고 중얼거렸다.

“이렇게 형이랑 잘 지낼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뭐야, 이번엔 네가 분위기 잡냐?”

지훈이 눈썹을 올렸다. 희원은 낄낄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형이 아무렇지 않게 대해주니까 좋네요.”

“그럼 나랑 인연 끊으려고 했어?”

“서로 불편할 줄 알았죠, 뭐.”

“너랑 희나랑은 별개지.”

이번에는 정말 심장이 욱신거릴 정도로 울렸다. 지훈에게 희나의 남동생이 아닌 자신은 아무 가치도 없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말로요?”

“그래. 내가 너희들 힘들게 사는 걸 얼마나 많이 봤는데. 희나랑 별개로 너도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

그냥 담담하게 한 말인데 희원은 무척 기분이 좋아졌다.

표정이 밝아진 그를 보면서 지훈이 캔을 내밀어 둘은 건배를 나눴다.

“그러니까 혹시 뭔가 생각해서 희나네 내려가 있는 거면 그러지 마. 거기서 딱히 할 만한 거 없잖아?”

“그렇지도 않아요. 뭐, 여기 있어도 마찬가지고.”

“곱창집 아르바이트 같은 건 관두고 우리 모델이나 하라니까 그러네.”

모델은 지훈이 쇼핑몰 처음 만들 때부터 몇 번이나 권했던 일이다. 희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언제나와 같은 대답을 했다.

“난 그런 닭살 돋는 짓이랑 안 어울려요.”

“정말로 모델이 그냥 싫어서 그러는 거야?”

계속 거절해왔지만, 진짜 이유를 말한 적은 없었다. 희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처음으로 속내를 털어놓았다.

“나는 누나랑 달라요. 지저분하게 살기도 했고.”

“왜, 무슨 현상수배라도 당했어?”

“얼굴 팔리는 일에 내가 엮여서 좋을 건 하나도 없을 거라고만 해두죠.”

경멸당하는 건 아닐지 두려워서 결코 예전에 있었던 일들은 밝히고 싶지 않았다. 이만큼 얘기하는 것도 무척이나 껄끄러웠다.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있는 지훈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희원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잠시 뒤.

그는 목덜미에 와 닿는 따스한 손을 느꼈다.

“그렇게 있지 마라. 남자가 가오 떨어지게.”

지훈의 손은 희원의 목을 가볍게 주무른 뒤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넌 무슨 일을 했어도 이상할 거 없어. 내가 너였다면 훨씬 심하게 살았을 거야.”

나지막한 목소리를 듣고 난 희원은 고개를 들었다. 술을 마셔서인지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흐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소 충혈된 희원의 눈을 보고 지훈은 쿡쿡 웃었다.

“그런 의미에서 희나는 참 대단한 애야, 그렇지? 편한 방법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지훈은 희나의 그 강단 있고, 자신의 문제에 정신이 팔려 이쪽에는 안중도 없는 모습이 좋았다. 희원도 진심으로 맞장구를 쳤다.

“걔는 진짜 어이없을 정도죠. 새벽부터 밤까지 알바하다가 코피 쏟고, 얻어맞아 가면서 집에 살고. 학교도 가고.”

“그러니까 내가 희나를 내가 못 미워해. 걔는 정말 행복해져야 돼.”

씁쓸한 목소리였지만 지훈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유려한 옆얼굴을 쳐다보다가 희원은 불쑥 물었다.

“그 드레스 형이 사준 거죠?”

희나가 결혼식에 입었던 드레스에 대해 들었을 때부터 줄곧 묻고 싶었던 질문이다.

최근 가장 잘나가는 디자이너가 그런 고급 물건을 한 번 만난 사람에게 그냥 주는 건 말이 안 된다. 돈을 받고 만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호의니까.

지훈은 색이 옅은 눈동자만 돌려 희원을 쳐다보더니 물을 툭 내뱉었다.

“그럼 안 되냐?”

“형 진짜 바보네요.”

“이제 알았어?”

아무리 좋아하던 여자라고 해도 다른 남자랑 결혼하는데 드레스를 사주다니 제정신이 아니다. 그러나 희원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고마워요, 형.”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낯간지러운 걸 싫어하는 지훈은 팔을 벅벅 긁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고맙긴 무슨. 어차피 희나 입으라고 만들었던 건데.”

“자기 싫다는 여자 따라다니면서 웨딩드레스도 만들었어요? 형 진짜 안습이다.”

“주먹 안 쓴 지 너무 오래됐는데 오랜만에 휘둘러봐?”

“항상 존경하고 있습니다, 형님.”

금방 꼬리를 내리는 희원을 보며 지훈은 쿡쿡 웃었다. 그리고 희나처럼 곱슬거리는 희원의 머리카락을 비비며 말했다.

“희원이 너 가지 말고 그냥 나랑 살자.”

“갈 거예요.”

“가지 마. 나 혼자 있기 싫어.”

지훈은 농담처럼 가볍게 말했지만, 희원의 귀에는 진심처럼 들렸다. 항상 사람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말이다.

“형, 애정결핍이죠?”

“그런가?”

“주변에 사람도 많으면서 왜 나랑 누나한테 그래요?”

“그러게. 난 누가 떠난다고 해야 붙잡는 거 같아.”

“형 좀 메저인 거 같아요.”

“뭐가 어째, 인마?”

희원은 헤드록을 걸어오는 지훈의 팔을 날렵하게 피하면서 턱짓으로 위층을 가리켰다.

“혼자 있기 싫으면 쟤는 어때요? 갈 데 없어 보이던데.”

“내 인생에 갈 곳 없는 여자는 하나면 족해. 아무나 갖다 붙이지 마라. 의리 없는 녀석.”

“그래서 나 좋아하잖아요, 형이.”

“시끄러워. 꺼져.”

지훈이 발로 희원의 배를 꾹꾹 밀었다. 희원은 낄낄 웃으면서 피하고는 맥주캔을 집어 들었다.

“어어, 나 맥주 들었어요! 계속 밀면 다 쏟아.”

“쏟으면 소파 물어내라! 한 2년은 노예로 부려먹을 거야.”

“으악, 하지 마요!”

서로 그렇게 장난치면서 놀고 있는데 거실 계단을 누군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일부러 들으란 듯이 쿵쿵 발걸음 소리를 내며 온 것은 소윤이었다. 둘이 그쪽을 쳐다보자 그녀가 새침하게 말했다.

“나 나갈 거예요. 오빠는 나한테 관심도 없잖아요.”

희원은 묘한 표정이 되었다.

방 안에서 혼자 있다가 찾아주지 않으니 심통이 나서 나온 모양이다. 누가 봐도 붙잡아 달라는 것처럼 보이는 그 단순함이 너무 애들다워서 웃음이 나왔지만, 그녀는 심각했으므로 웃을 수가 없었다. 옆을 보니 지훈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가면 어디 갈 데는 있고?”

“어디든 가면 되겠죠.”

정말 나갈 거면 갈 곳 있다고 거짓말이라도 한다. 저렇게 신경 쓰이는 말을 남기는 의도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아는 희원이었다.

“형, 나간다는데요? 형 잘하는 거 하세요.”

“제길, 타이밍 죽이네.”

희원의 놀리는 말에 나간다는 사람 붙잡기 전문인 지훈은 낄낄 웃더니 소윤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야, 나가지 마라. 여기서 한동안 있어도 되니까.”

“……뭐예요? 아까는 해 뜨면 나가라더니.”

“삐지지 말고 있으라고 할 때 있어. 맘 바꾸기 전에.”

소윤은 매우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투덜거리면서도 이쪽으로 스멀스멀 걸어왔다. 그녀는 맞은편 스툴에 앉아서 씩 웃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툴툴거렸다.

“나한테 관심도 없으면서 왜 있게 해주는 거예요?”

“여기에 있으면 너 있든 말든 관심 없어. 근데 네가 딴 데 가면 신경 쓰일 거 같아.”

“오빠 성격 완전 나쁘네요.”

“이제 알았어? 알면 네가 어쩔 건데? 갈 곳 없는 청소년아.”

지훈은 발끈한 그녀에게 몸을 기울이고 놀리듯 혀를 내밀었다.

얼굴이 가까워지자 소윤의 뺨이 발그레하게 붉어졌다. 아무래도 제대로 지훈에게 반한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지훈도 눈치챘을 텐데 아무런 내색이 없었다. 다 비운 맥주캔을 내려놓고 냉장고에서 새 캔을 꺼내는 지훈에게 소윤이 손을 내밀었다.

“나도 주세요.”

“넌 주스나 마셔, 멍청아.”

“뭐래. 그럼 주스라도 줘요.”

“이건 술 냉장고야. 저쪽에 있으니 네가 가져다 마셔.”

소윤이 입술을 깨물고 일어나서 휙 가버리자 희원이 혀를 내둘렀다.

“완전 동생 다루듯 하네. 형이 여자한테 이러는 거 처음 봐요.”

“쟤가 여자야? 애지.”

지훈은 그렇게 일축해버렸지만, 희원은 속으로 웃었다.

아무튼, 그는 주워 온 생물에 끔찍이도 약한 남자니까.

“희원아, 너 며칠 더 있다가 가. 알았지?”

“응. 그렇게 할게요.”

희원은 주스를 가지고 열심히 걸어오고 있는 소윤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간 지켜보는 것도 재밌겠다고 생각하면서.

***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음산한 목소리에 희원은 뻑뻑한 눈을 떴다.

현상이 인상을 찌푸리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형, 왔어요?”

희원은 부스스 몸을 일으키다 신음을 냈다. 등과 목 관절이 쑤셨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제 거실에서 술을 마시다가 그대로 널브러져 잔 듯했다. 소파 위에 길게 누워 있는 지훈의 넓은 등도 보였다.

“하암. 어제 마시다 그냥 잠들었나 봐요. 형 지금 온 거예요?”

“태평하게 말하지 말고 설명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희원에게 현상이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쟨 누구야?”

“쟤요?”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본 희원이 “아.” 하고 소리를 냈다.

간이 주방에서 소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뭔가 요리를 만들고 있었다. 어제 얼굴에 잔뜩 칠해져 있던 화장이 전부 지워져 생얼이 된 그녀는 훨씬 앳되고 예뻐 보였다. 옷차림도 어제의 클럽용 의상이 아닌 티셔츠에 바지로 바뀌어 있었는데, 굉장히 헐렁한 것으로 보아 지훈의 옷인 것 같았다.

“그냥 어제 클럽에서 만나서 집에 데려온 거예요.”

“클럽에서 데려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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