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리플렉션 (3)
실장이 다시 돌아온 건가 싶어 돌아본 지훈의 눈은 갈색 머리 웨이브를 발견하고 찌푸려졌다.
“왜 다시 돌아와?”
쌀쌀맞은 물음에 소윤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지훈이 뭐라 더 말하려는데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르는 사이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우리 룸 있어요. 거기로 가요.”
“싫어요. 이거 놓으세요.”
술에 잔뜩 취한 남자가 소윤의 어깨를 안은 채 잡아끌고 있었다. 둘이서 가네 마네 실랑이 벌이는 걸 잠시 보고 있던 지훈이 인상을 팍 쓰면서 일어났다.
“싫다잖아. 적당히 좀 해.”
“뭐? 이 새끼가. 네가 무슨 상관이야?”
지훈을 밀치려던 남자는 다음 순간 바닥을 나뒹굴었다. 희원은 중학교 때부터 주먹으로 유명했던 지훈의 과거를 오랜만에 상기했다.
“형, 그만해요. 그리고 너는 처맞기 싫으면 빨리 꺼지세요.”
희원이 끼어들어서 만류하자 어차피 더 할 생각이 없었던 듯 지훈은 물러섰다. 남자는 희원의 모욕에 가까운 말을 듣고도 스타일을 더 구기고 싶지는 않았는지 물러섰다.
소윤은 뻣뻣하게 선 채로 지훈이 룸의 문을 닫고 자리로 가서 털썩 주저앉는 걸 쳐다만 보고 있었다.
희원이 말을 걸었다.
“괜찮아?”
“아, 네. 저 사람이 자꾸 따라오고, 친구 있다는데 안 놔줬어요.”
“그거 가지고 그렇게 겁먹으면서 클럽에서 논다고 그래?”
설명하는 소윤의 말을 들은 지훈이 퉁명스럽게 끼어들었다.
“빨리 나가서 일단은 집에 돌아가라니까.”
“갈 데 없단 말이에요.”
소윤이 지훈을 향해 말하려 목을 돌리자 하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희원은 그곳을 빤히 쳐다보았다. 예뻐서라기보다는 목 뒤편으로 시퍼런 멍 자국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시선을 느낀 소윤은 가리는 대신 머리카락을 휙 걷어서 그것을 오히려 드러냈다.
“보여요? 집에 가기 싫어요. 무섭고, 다 싫어.”
떨어져 있는 지훈의 눈에도 그녀의 상처들이 보였다.
지훈은 심드렁하니 잔에 술을 따르며 가여운 거랑 별개로 저런 걸 보여주는 것부터가 희나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형네 집에서 하루 재워주지 그래요?”
희원이 지훈의 맞은편으로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 지훈이 곧장 잘생긴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쟤를 왜 재워줘.”
“가엾잖아요. 어차피 형네 집에 사람 한 명쯤 있든 없든 티도 안 날 텐데.”
희원은 여전히 문 쪽에 쭈뼛쭈뼛 선 채로 눈치만 보고 있는 소윤에게 말을 건넸다.
“너 여기서 나가면 어디로 갈 거야? 또 다른 재워줄 남자 찾아다닐 거야?”
“그래야겠지요.”
소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까보다는 상당히 자신 없는 고갯짓이었다. 방금 일어난 일 때문에 겁을 먹은 모양이다.
지훈은 그러든 말든 그녀에게 시선도 주고 있지 않았다. 희원이 그의 잔에 술을 채워주며 다시 부추겼다.
“다른 남자 또 따라간다잖아요. 그냥 데리고 나가죠?”
“왜 그렇게 신경 써? 혹시 네가 쟤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 거냐?”
“에이. 나의 한결같은 연상 취향을 잊은 거예요?”
희원이 의심스레 묻는 지훈을 향해 손사래를 쳤다. 그건 지훈도 인정하는 부분이었으므로 더 캐묻는 대신 술을 들이켰다. 희원은 끈질기게 말했다.
“같이 집에 가죠? 어차피 형도 신경 쓰여서 못 내버려 둘 거잖아요.”
“…….”
“그러지 말고요. 네? 형.”
“아, 거 되게 끈질기네.”
희원이 계속 조르자 지훈은 짜증을 냈지만, 흔들리고 있었다. 희나와 붕어빵처럼 닮은 희원의 얼굴에 무척 약한 탓이다.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해!”
결국, 지훈의 입에서 승낙이 떨어지고야 말았다. 희원은 헤헤 웃으면서 소윤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럼 이제 나갈까요?”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나가?”
“애를 앞에 두고 어떻게 놀려고요. 가요, 이제. 그냥 형네 집에서 한잔 더 해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한잔 더 하자는 제안이 마음에 든 듯 지훈도 일어섰다.
나가기 위해 문으로 다가가자 줄곧 그 앞에 서 있던 소윤이 움찔했다.
“왜 그렇게 놀라? 안 잡아먹어.”
지훈이 그렇게 툭 말하고 먼저 나가버린 덕에 소윤의 표정은 희원만 보게 되었다. 빨개진 양 뺨에 수줍은 기색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자신을 구해준, 싸움도 잘하고 잘생긴 연상의 청년에게 반한 모양이다.
상황이 재밌게 돌아간다고 희원은 속으로 쿡쿡 웃으면서 소윤을 데리고 지훈의 뒤를 따랐다.
스포츠카를 타고 왔기 때문에 세 사람은 택시를 잡았다. 희원은 차가 멈춰 서자마자 일부러 빠르게 조수석에 앉았다. 지훈은 별생각 없는 듯 뒷좌석에 앉아 창에 팔을 기대고는 쭈뼛거리고 있는 소윤에게 툭 말을 던졌다.
“안 타고 뭐해?”
소윤이 지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옆에 앉아 문을 닫았다.
“삼성동 XXXX로 가주세요.”
희원이 목적지를 말하자 택시는 부드럽게 밤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휴대폰 벨소리가 요란스레 차의 실내를 울렸다.
소윤은 액정을 확인하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통화 거절로 아이콘을 슬라이드 했다. 희원이 뒤를 돌아보고 물었다.
“왜 안 받아? 부모님이야?”
“그 인간들은 나한테 전화 같은 거 안 해요.”
“그럼 누군데?”
소윤이 우물쭈물하며 얼른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희원이 모양 좋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남자야?”
“…….”
“맞구나. 너 따라다니는 남자?”
희원이 넘겨짚자 소윤은 정곡을 찔린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눈치를 보듯 지훈을 흘깃 보았으나 그는 흥미 없는 듯 창밖만 보고 있었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같은 학교 남자앤데, 맨날 자기네 집에 오라고 난리예요.”
“자기네 집에? 왜?”
“갈 데 없으면 다른 사람네 가지 말고 자기네 오라고요.”
“그럼 잘됐네. 걔네 집에 가지그래?”
“동정 받는 건 싫어요. 나는 관심 없는데 좋아한다는 마음을 이용하는 것도 싫고. 부담스러운 건 싫어.”
“다른 남자 따라가서 당할 일에 비하면 양반이지.”
“싫어요. 어쨌든.”
이상한 부분에서 결벽한 성격이다. 소윤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계속 싫다고 말해도 자꾸 따라다녀요. 나는 아르바이트하기도 바쁜데 같이 놀자고 불러내고, 데이트하자고 조르고.”
“……그만큼 좋은가 보지.”
듣고 있지 않은 듯했던 지훈이 불쑥 입을 열었다. 소윤이 자그마한 분홍빛 입술을 비죽거렸다.
“좋아도 내가 그 정도 관심 없다고 했으면 알아들어야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자기 여친이라고 주변에 말하고 다니는 것도 짜증 나는데 일진이라서 무시할 수도 없고.”
이야기를 들을수록 희원과 지훈의 표정이 다른 느낌으로 일그러졌다. 지훈은 어딘가 켕기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희원은 웃음을 힘들게 눌러 참는 것처럼.
“그러지 말고 받아주지그래? 알고 보면 잘 맞을지도 모르잖아.”
“……절대 내 취향이 아니에요. 그런 민폐 바보.”
칼 같은 소윤의 말에 지훈은 반쯤 돌리고 있던 몸을 완전히 이쪽으로 향했다.
“왜 그렇게 싫은데? 뭐가 문제야? 못생겼어?”
“사진 있어?”
희원이 묻자 소윤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휴대폰을 내밀었다. 카카오톡 프로필에 떠 있는 소년의 얼굴은 다소 불량스럽게 보였지만, 꽤 인기가 있을 법했다.
“이 정도면 귀엽구먼.”
“외모는 상관없어요. 내 처지 알리는 것도 싫은데 자기 맘대로 가볍게 다가오는 거 너무 짜증 나요. 나는 그럴 여유 없다고요.”
지훈의 입이 벌어졌다. 뒤늦게 뭔가 깨달은 표정이었다.
그는 뒷좌석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아, 이런 기분이었나.”
“뭐가요?”
지훈은 소윤의 물음을 무시했다.
소윤이 뭐라 한마디 하려는데 다시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다시 통화 거절을 하려고 하려던 그녀는 지훈이 손을 잡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뭐, 뭐예요?”
“야, 받아봐. 그러지 말고. 응?”
“싫어요! 왜 그러는 거예요?”
“에이. 다 너 좋자고 하는 거지. 받아. 알았지?”
“알았으니까 이거 놓으세요.”
소윤은 빨개진 얼굴로 지훈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마지못한 듯 통화 아이콘을 슬라이드 했다.
[야, 너 어디야!]
“네가 무슨 상관이야?”
차 안이 조용해서인지 상대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애태우고 있는 게 다 티 나는데 센 척하면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소윤의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까지 겹쳐져서 그 미숙함이 애처로웠다.
“나도 저렇게 찌질했냐?”
문신이 새겨진 손가락으로 얼굴을 짚은 채 둘의 통화를 듣고 있던 지훈이 조수석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낮게 물었다. 희원은 차마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어깨만 슬쩍 으쓱댔다.
지훈은 충격을 받은 듯 입술을 악물더니 소윤에게서 전화를 빼앗아 들었다.
“? 왜 그래요?”
“가만히 있어봐. 야, 너 그러면 여자애가 더 싫어해.”
지훈이 통화에 등장하자 상대방은 놀란 듯 잠시 침묵하다가 버럭 화를 냈다.
[뭐야, 당신 누구야? 왜 소윤이랑 같이 있어?]
“아무 사이 아니니까 빡치지 말고. 형님 얘기를 좀 들어라. 내가…….”
[닥쳐! 당신이랑 얘기하기 싫거든? 어디야! 가서 반 죽여버린다!]
어린 녀석이 욕과 협박을 퍼부어댔지만,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지훈은 놀랍게도 히죽히죽 웃기만 했다.
“그래. 내가 네 맘 안다. 너무 흥분하지 말고, 형님이 잘 데리고 있다가 내일 안전하게 보내줄 테니 집에 들어가라.”
[너 누구야? 소윤이한테 무슨 짓 하려고 그래!]
“아무것도 안 해, 인마. 나도 보내주고 싶다만 지금 보내면 네놈이 나보다 위험할 거라고. 그럼 얘가 너 더 싫어할 거다.”
지훈은 소윤의 짧디짧은 바지와 파여서 가슴골이 드러난 상의를 보면서 말했다. 시선을 받은 소윤이 입을 앙다물고는 휴대폰을 빼앗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누구 맘대로 보낸대! 너 다시 전화하지 마! 안 받을 거니까!”
소윤은 앙칼지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뒤 창밖으로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지훈이 툴툴거렸다.
“왜 그렇게 화를 내?”
희원의 눈엔 소윤은 ‘보내주고 싶다’ 한 지훈의 말에 토라진 게 뻔해 보였다. 평소에는 눈치 빠른 지훈이 희한하게도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러는 사이 택시가 거대한 주상복합 단지로 들어섰다. 그들은 함께 택시에서 내렸다.
***
“이게, 진짜 집이에요?”
현관으로 들어선 소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집에 데려오면 대부분 이런 반응을 보였기에 지훈은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은 아무도 없어요?”
“응. 내일은 촬영이 없어서.”
희원이 따라가며 묻자 지훈이 대답했다.
희원을 1층에서 기다리게 두고 지훈은 소윤을 데리고 2층으로 앞장서 올라가 구석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그곳은 스태프들이 가끔 묵는 방으로, 인테리어가 화려한 다른 침실들과 달리 실용적으로 꾸며진 방이었다. 지훈은 방 불을 켜주고 소윤을 안에 들여보냈다.
“여기서 자. 샤워실은 왼쪽 두 번째 문이야. 목욕용품이나 수건은 거기 있는 거 마음대로 써. 그리고 이걸로 갈아입어.”
지훈은 미리 준비해두기라도 한 것처럼 빠른 속도로 말하며 붙박이 벽장에서 가운을 꺼내 소윤에게 내밀었다.
“그럼 잘 자라.”
“잠깐만요!”
어벙하게 서 있던 소윤이 미련 없이 나가려는 지훈을 불러 세웠다.
“나 혼자 여기서 자라고요?”
“그럼 나랑 같이 자려고?”
지훈은 건조하게 반문했지만, 소윤의 얼굴은 확 빨개졌다.
“그, 그런 게 아니고……. 오빠들은 뭐 할 건데요?”
“너 때문에 방해받은 술자리를 계속해야지.”
“저도 같이 놀면 안 돼요?”
“어린애가 무슨 술이야. 잠이나 자고 내일 해 뜨면 갈 데 알아봐. 인사할 필요 없으니 아무 때나 나가.”
“…….”
“그럼 난 이만.”
소윤의 발그레하던 얼굴이 굳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지훈은 그녀를 내버려 둔 채 문을 닫았다.
1층 거실로 내려오자 희원이 소파에 매우 편한 자세로 앉아 육포를 뜯고 있었다. 지훈은 그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소파 곁에 있는 간이 냉장고에서 맥주캔을 꺼냈다.
“걔는 자요?”
“몰라. 자겠지.”
지훈이 관심 없다는 듯 대꾸하고 맥주를 들이켜자 희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 그렇게 여자 밝히면서 걔한텐 유독 관심이 없네요. 형 취향 같은데.”
“취향은 무슨.”
“취향 아니에요? 우리 집 아줌마랑 닮은 거 같은데.”
“닮긴 뭐가 닮아? 희나가 훨씬 예쁘지.”
지훈이 맥주캔을 입에서 떼어내고 다소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콧방귀를 뀌면서 육포를 이로 질겅거리고 있는 희원에게 물었다.
“희나는……. 내 얘기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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