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 그 너머에는-133화 (133/140)

외전 2. 리플렉션 (2)

푸른 조명이 현란하게 일렁이는 청담동 클럽에 도착한 두 사람은 2층에 있는 VIP 전용 룸으로 안내되었다.

플로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소파에 걸터앉은 희원은 오랜만에 듣는 음악에 가볍게 리듬을 타며 지훈이 따라주는 술잔을 받아 들었다.

들어올 때까지는 내키지 않았지만, 예전 생각도 나고 해서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지훈은 다소 밝아진 희원을 보며 물었다.

“나가서 춤출래?”

“아니요. 난 여기서 술이나 좀 더 마실래요. 형 나가실 거예요?”

“아니. 얘기나 좀 할까?”

클럽에 굳이 왜 왔는지 의아해지는 제안이었으나 희원도 그편이 더 좋았다. 그러나 지훈이 말문을 열자마자 희원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말았다.

“희나는 잘 지내?”

“……뭐 그렇죠.”

“식은 잘 올렸고?”

희원은 술을 홀짝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거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 불편한 화제가 빨리 끝났으면 했지만, 지훈은 한술 더 떠 손을 내밀었다.

“사진 있어? 좀 보여줘.”

“그걸 형이 왜 봐요? 봐서 뭐하려고요.”

“그러지 말고.”

계속 뺐지만, 지훈은 막무가내였다. 희원은 오만상을 쓴 채로 휴대폰을 내밀었다.

지훈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진혁의 품에 안겨 밝게 웃고 있는 희나의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유심히도 보았다.

“예쁘네.”

화면에 떠올라 있는 희나의 모습은 물론 예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련한 눈빛으로 그녀의 사진을 확대하고 있는 지훈의 모습은 보는 사람이 괴로워질 지경이었다. 셀프 고문을 즐기고 있는 그가 이해가 안 돼서 희원은 그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듯 되돌려 받았다.

“역시 잘 어울린다. 그럴 줄 알았어.”

“이런 거 왜 봐요? 기분만 상하잖아요.”

“난 괜찮은데.”

지훈은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희원은 삐딱하게 얼굴을 기울였다.

“형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나? 괜찮지?”

지훈은 희고 가지런한 이를 내보이며 킥킥 웃었다.

“왜 사람들이 나만 보면 그걸 물어보는 거야.”

“안 괜찮아 보이니까 그렇죠.”

“음. 정말 나도 안 괜찮을 줄 알았어.”

커다란 반지를 낀 손가락으로 위스키 글라스를 만지작거리며 지훈이 말했다.

“희나가 내 손에 안 닿는 곳에 가버린다는 상상만 해도 미쳐버릴 것 같았거든. 죽어라 매달린 것도, 정말 내 옆에 없으면 내가 탁 죽어버릴 것만 같아서 그런 거야.”

“…….”

“그런데 살아지네. 막 죽을 거 같은데, 살아도 하나도 재미없는데 그냥 살아지기는 하네. 웃어지기도 하고.”

웃음을 섞어가며 담담하게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아린 심정이 전해져 왔다. 희원은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위스키만 홀짝였다.

“다시 얼굴 보는 게 무서운데 보면 어떻게 되나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 보여달란 거야.”

“……보니까 어때요?”

“이렇게 오랜만에 보니까 좋아. 막 마음은 무거운데, 그래도 희나 웃는 거 보니까 좋다.”

지훈의 긴 속눈썹이 흔들렸다. 마음이 아픈 게 전해지는데 좋다는 말이 거짓처럼 들리진 않았다. 희원은 지훈이 비워낸 술잔에 투박한 손놀림으로 얼음을 채워주며 물음을 던졌다.

“걔가 밉지도 않아요?”

“희나? 왜?”

“어떻게 보면 걔가 형 이용한 거잖아요. 좋은 건 다 받아먹고 다른 남자한테 가버렸으니까요.”

희원은 희나와 지훈이 함께 살던 시절 내내 그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진혁을 잃은 희나는 지훈을 벗어나려고 노력할 때마다 강한 만류에 붙들렸고, 그게 반복되다 보니 떨어져 나갈 기력 자체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진심으로 희나가 그를 이용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일부러 거칠게 말했다.

“이상하게 말하지 마. 내가 준 건지 희나가 받음 당한 건지. 하하. 희나가 나쁘다고 생각해?”

“남의 남녀 관계에 나쁘고 좋고 그런 거 몰라요. 누군가에게 나쁜 사람이었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나쁜 사람인 건 아니잖아요. 그냥 걔는 형의 인연이 아니었어요.”

별로 틀리거나 심한 말을 한 것 같지 않은데 지훈의 유려한 얼굴이 굳었다. 얼굴빛이 달라진 그를 보고 놀란 희원이 황급히 덧붙였다.

“그러니까 형이랑 잘 맞는 좋은 사람 만나요. 걔보다 훨씬 나은 여자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요.”

“나는 지금도 그런 얘기 들으면 ‘아, 내가 다른 좋은 사람 만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기보다는 ‘왜 내가 희나의 인연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속이 쓰려.”

“형이 대체 뭐가 아쉬워서 걔한테 그래요? 그렇게 예쁜지도 모르겠는데.”

“난 네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다. 내 눈에는 세상에서 제일 예뻐.”

말투도 담담하고 웃고 있는데, 오히려 더욱 보기 안타까웠다. 잠시 룸 안에 정적이 흘렀다.

멀리 들리는 바깥의 음악 소리만 쿵쿵 울리는 가운데 홀짝홀짝 세 잔째 술을 비우고 네 잔째를 따르고 있을 때였다.

“신 대표님 나오셨습니까?”

검은 정장을 입은 30대 전후의 남자는 클럽의 자칭 홍보실장이었다. 예전에 지훈을 따라 클럽에 놀러 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자주 오는 데다 제법 큰손인 지훈을 접대하러 나온 모양이었다.

그는 아부 섞인 어조로 친절하게 말했다.

“두 분이서만 계시지 마시고 좀 노시죠? 아니면 제가 몇 명 데려올까요?”

클럽 손님으로 온 아가씨들을 데려다주겠다는 제안이었다. 희원도 지훈을 따라 처음으로 VIP룸에 와보기 전까진 클럽에 이런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지훈은 즉답하지 않고 희원을 힐끔 바라보았다. 아까까지의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뭐든 하고 싶었던 희원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래. 데려와 봐. 신나게 좀 놀아보자.”

허락이 떨어지자 실장은 곧 나갔다. 그 사이 둘이서 다시 또 술을 몇 잔 기울여 희원은 제법 취기가 올랐다.

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자, 이리로 들어와요.”

아까의 실장이 두 명의 여자를 데려왔다.

그녀들을 본 지훈과 희원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처음 오시는 분 중에 두 분한테 제일 맞을 거 같은 분들이에요. 다들 이야, 이쁘죠? 재밌게 노세요.”

실장은 수다스럽게 말하며 잔을 세팅하고 능숙하게 위스키를 따라낸 후 휙 나가버렸다.

원래라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어야 할 타이밍이지만, 희원과 지훈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로 들어온 여자들을 쳐다보기만 했다.

새카만 긴 생머리, 그리고 갈색 웨이브 머리를 가진 그녀들은 실장의 말대로 제법 예쁘긴 했다.

작은 얼굴에 가늘고 긴 팔다리, 그리고 깨끗한 피부까지, 오늘 클럽에 온 여자 중에서도 상위급 외모일 것이다.

그러나…….

“오빠들 왜 말이 없어요? 짠 한 번 안 해줄 거예요?”

희원의 옆에 있던 검은 생머리의 여자가 유흥에 익숙한 듯 제법 능숙하게 교태를 부리며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지훈의 퉁명스러운 말이었다.

“뭐야. 너희 미성년자잖아.”

희원도 고개를 끄덕여 그에게 동조했다.

어색한 화장. 아직 미성숙한 바디라인. 둘 다 딱 보기에도 고등학생 정도로 보였다.

“아니거든요? 민증 보여줘요?”

아마도 됐다고 할 거라 예상하고 말한 거로 보였다. 하지만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머리 여자는 입술을 비죽거리긴 했으나 모처럼 들어온 VIP룸에서 나가긴 싫은지 들고 있던 담뱃갑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서 내밀었다.

지훈은 그걸 받아 들어 흘깃 보자마자 코웃음을 쳤다.

“너랑 닮지도 않았다. 이걸로 어떻게 뚫고 들어온 거야?”

“나 맞아요!”

“이 사람이 너라고?”

호기심이 일어 쳐다본 희원도 픽 웃음을 터뜨렸다. 사진 속의 여자는 검은 생머리라는 점을 빼면 모든 면에서 그녀와 달랐다. 통통한 얼굴과 낮은 콧대, 그리고 넓은 미간은 수술로도 지금의 그녀로 탈바꿈될 수 없을 것 같았다.

“여기 애들 노는 데 아니야. 어서 돌아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모님 걱정 꽤 시켰을 것 같은 비주얼로 점철된 지훈이 그렇게 말하자 검은 생머리도 빈정이 상한 모양이었다.

“아, 경찰이야, 뭐야? 짜증 나. 야, 나가자. 다른 사람이랑 놀면 되지.”

그리고 검은 머리는 붙잡을 새도 없이 휙 나갔다. 뻘쭘하게 앉아 있던 갈색 머리 소녀도 쭈뼛쭈뼛 몸을 일으켰다.

“그럼 가볼게요.”

인사하고 나가는 모양새가 검은 머리와 다르게 이런 곳에 익숙하지 않아 보였다.

지훈이 나가려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야, 잠깐.”

“네?”

“나가서 어쩌려고?”

“민영이 따라가야지요.”

검은 머리 이름이 민영인 모양이다. 지훈이 팔을 뻗어 잡자 갈색 머리는 깜짝 놀라 움찔했다.

“너 아직 학생 맞지?”

지훈이 똑바로 바라보면서 묻자 갈색 머리 소녀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뭐야?”

“김…… 소윤이요.”

“클럽 자주 오는 거야?”

“아뇨. 오늘 처음 왔어요.”

처음 왔다는 건 대부분 거짓말이지만, 그녀는 어딜 보나 처음인 티가 역력했다. 이름도 본명인 것 같았다.

“친구 따라서 온 거?”

끄덕.

“그럼 이러지 말고 집에 가.”

집 이야기가 나오자 그럭저럭 고분고분하던 소녀의 눈빛과 말투가 확 변했다.

“집에 가기 싫어요. 우리 집 거지 같아요.”

앙칼지게 말하는 그녀를 보고 잠잠히 있던 희원이 툭 물었다.

“가출 소녀냐? 언제 나왔어?”

“…….”

“오늘 나온 거야? 나오자마자 클럽?”

“민영이가 따라오면 좋은 데서 잘 수 있다고 해서…….”

변명 조의 말투로 보아서는 스스로 별로 안 좋은 길에 들어섰다는 걸 자각하고 있는 듯했다.

가출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희원이 충고했다.

“너 마음은 알지만, 공짜로 재워주는 좋은 사람 같은 건 없어. 여기서 만난 사람 따라가면 험한 꼴 당할 거야.”

“……집에서 나갈 수만 있으면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중얼거리더니 소윤은 뭔가 결심한 것 같았다. 그녀는 지훈의 손을 붙잡고 적극적으로 말했다.

“오빠가 나 데려갈래요? 나 뭐든 잘할 수 있어요.”

자기가 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것 같은데 위험하기 짝이 없다. 흥미 없는 듯 손을 뿌리치며 그녀를 흘깃 본 지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제대로 보니 반항스러운 눈매, 갈색 머리카락과 예쁘장한 얼굴은 누군가를 아주 진하게 떠오르게 한다. 지훈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소윤은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

“데려가 줄 거예요?”

“웃기지 마. 빨리 집에 가. 안 그러면 경찰서로 데려갈 거야.”

소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지훈 쪽으로 기울이고 있던 몸을 거두고 휙 돌아섰다.

그녀가 나가자 희원이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입을 열었다.

“형이 그렇게 미성년자 보호에 열심인 줄은 몰랐는데요.”

“어린애랑 만나는 놈들은 다 쓰레기야.”

일반론이었지만, 왠지 진혁에 대한 미움 때문에 격렬해진 느낌이었다. 지훈은 술을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쟤도 문제네. 왜 집에 안 들어가고 이런 위험한 데를 돌아다니는 거야. 무슨 일을 당할 줄 알고.”

“위험하더라도 집에 들어가는 거보다 밖이 더 나을 수 있죠.”

희원이 한마디 거들자 지훈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희원의 과거를 떠올린 듯 뭐라고 태클을 걸지는 않았다.

둘이 말 대신 다시 잔을 부딪치고 있는데 다시 룸의 문이 열렸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