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리플렉션 (1)
세련된 청색의 아우디 컨버터블이 청담동의 카페 주차장에 들어섰다. 통유리로 된 카페 안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능숙하게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내린 청년에게 쏠렸다.
180은 가볍게 넘는 키와 긴 다리,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가 자그마한 두상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잘 어울렸다. 헐렁한 체크 셔츠에 청바지를 걸쳤을 뿐이지만, 패셔너블해서 모델처럼 보인다.
이 청년의 이름은 주희원. 청담동 풍경에 화보처럼 어우러져 있었지만 사실 그는 바로 오늘 아침까지 과수원에서 비료 포대를 나르다 왔다. 꽤 고단한 일을 하고 바로 서울로 올라온 강행군이었지만, 워낙 체력이 좋아서 그다지 피로를 느끼지 못했다.
희원은 훤칠한 키만큼 시원스런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카페에 들어섰다. 그리고 구석에 앉아 있는 청년을 향해 반갑게 인사를 던졌다.
“형, 안녕하세요!”
청년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보고 있던 잡지에서 눈을 떼어 고개를 들었다. 갸름한 얼굴에 까칠해 보이는 이목구비. 지훈의 친구인 현상이었다.
“제가 좀 늦었죠? 미안해요. 차가 좀 막혀서.”
“됐어. 뭐 마실래?”
“아무거나 시원한 거, 아, 이거 맛있겠다. 이거 마실래요.”
“모히토? 이거 칵테일 아니야?”
“맞아요. 이거 시켜주세요.”
현상은 눈썹을 살짝 못마땅하게 올렸지만, 손을 들어 모히토를 주문해주었다. 희원이 방금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것을 본 직원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으나 토를 달지는 않았다.
“낮부터 무슨 술이야?”
“뭐 어때요. 오래간만에 이런 거 마셔보는구먼. 아, 좋다.”
희원은 곧 나온 모히토를 쭉 들이켜며 말했다. 얼음 섞인 럼에 민트의 청량함이 더해져 짜릿하도록 시원했다. 도수가 강하지 않았지만, 살짝 취기가 올라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걱정이 되진 않았다. 희원은 현상에게 차를 돌려주러 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진짜 잘 탔어요.”
“이거 돌려주면 너는 어떻게 내려가려고?”
차 키를 내밀자 현상이 비뚜름하게 턱을 괸 채 물었다.
“버스 타고 내려가면 되죠.”
“됐어. 어차피 3년간은 계약해둔 거니 그냥 타도 돼.”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유지할 돈도 없고요.”
희원은 딱 잘라 말하면서 재촉하듯 키를 흔들었다. 그간 많이 익숙해진 차여서 떠나보내기 아쉽긴 했지만, 말한 대로 유지할 능력도 없고, 또 남의 비싼 차를 계속 타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럼 그런 시골에서 차도 없이 살게?”
“같이 사는 형님이 새로 차 뽑아서 원래 타던 거 나 주겠다고 했어요.”
사실 원래 진혁은 희원에게 차를 하나 뽑아주려고 했지만, 희원이 극구 사양해서 원래 타던 차를 받았다. 차값도 내겠다고 했으나 이번엔 진혁 쪽이 사양해서 그냥 받게 되었다. 오래된 차였지만, 현재 자신의 처지에 잘 어울려서 마음이 편했다.
받은 거긴 해도 뭔가 소유하게 되었다는 뿌듯함도 컸다. 현상의 차를 탈 때는 방향제 하나 산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이런저런 자동차용품도 사들일 생각에 들떠 있었다.
즐겁게 대답하는 희원을 보고 현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너 정말 아예 거기에 자리 잡을 거냐?”
그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최근 이런 얼굴로 자신을 보는 사람이 참 많다고 생각하며 희원이 대답했다.
“그럴 생각인데요.”
“왜 그러는 거야? 네 나이에 대체 뭐가 아쉬워서 그런 시골 일꾼을 하려고 해?”
“좋은데요, 뭐.”
그냥 으레 하는 말이 아니라 희원은 진심이었다.
밥도 맛있고 가게에서 일하는 것보다 야외에서 일하는 게 적성에 맞았다. 밤에 나름대로 공부도 해서 얼마 전 검정고시도 붙었다. 진혁은 자기 일처럼 좋아하며 축하 파티도 열어주었다. 희나의 친구들까지 불러다 과수원 원두막에 상을 펴놓고 신나게 놀았다. 밤이 어두워질 무렵 동네 사람들까지 모이는 바람에 그야말로 잔치가 되고 말았다.
“얼마나 재미있다고요. 다들 정말 잘해줘요. 그리고 우리 꼬맹이가 이제 살이 좀 찌고 있어요. 요즘 이거저거 먹고 싶다고 떼쓰는데 웃겨 죽겠다니까요.”
데면데면 고개를 끄덕이는 현상에게 희원은 미래의 사진을 몇 장 보여주었다. 어린아이에 별로 관심이 없던 현상이 스마트폰 시계를 보며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흠. 벌써 6시네.”
“아, 그러네요. 이제 일어나야겠다.”
“바로 내려가게?”
“네. 버스 막차 끊기기 전에 가야죠.”
“여섯 시도 안 됐는데 무슨 막차?”
“고속버스는 있는데 그 동네에 도착했을 때 차가 없어요. 데리러 나오라고 하면 미안하잖아요.”
고속버스로 2~3시간 거리이니 도착하면 기껏해야 9시 경일 것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현상은 밤 10시도 되기 전에 버스가 끊기는 동네에 살아본 적도 없었다.
전에 지훈과 함께 학교 축제에 갔을 때 대충 보긴 했지만, 정말 시골이라는 게 새삼 실감되자 더더욱 그런 곳에 틀어박히려는 희원이 이해되지 않았다.
“됐고, 그냥 좀 있다가 내려가.”
“좀 있다가요?”
“그래. 오랜만에 왔는데 술이라도 한잔해야지. 그리고 할 얘기도 좀 있고.”
희원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 분명히 미래가 섭섭해할 거고, 다 나르지 않고 내려온 포대도 신경 쓰였다. 건강이 좋지 않은 진혁의 어머니나 희나가 끙끙거리며 일하는 게 보기 싫었다.
그러나 섭섭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현상의 얼굴을 보고 희원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갈 곳 없는 처지일 때 몇 년간이나 신세를 졌는데 야박하게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그렇게 할게요.”
“그래, 그럼 일단 나가자.”
현상은 먼저 일어섰다. 희원은 황급히 남은 모히토를 죽 빨아 마시고 현상의 뒤를 따랐다.
“형, 차 바꿨네요.”
현상이 처음 보는 벤츠 카브리올레 앞에 가서 문을 여는 걸 보고 희원이 물었다. 현상은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하고 차에 먼저 올라탔다.
본인은 곱창집 사장이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사실 그가 영업하는 가게의 건물은 전부 현상의 것이었다. 그 역시 지훈 정도는 아니어도 상당한 금수저였다.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그들과 희원의 삶은 너무나 달랐다. 현상이 몇 번이나 연락했지만, 올라오고 싶지 않았던 것은 돈이 돈을 버는 걸 보는 박탈감이 크기 때문도 있었다.
“가게로 가요?”
“아니.”
“그럼 어디로 가려고요?”
현상이 뭐라 대답하려고 하는데 차 거치대에 꽂아둔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에 뜬 것은 지훈의 이름이었다.
희원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으나 현상은 거리낌 없이 통화 아이콘을 슬라이드 했다.
“왜?”
[어디야?]
스피커폰으로 해놓아서 지훈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희원은 더욱 불편해졌다.
“여기 청담동.”
[오, 그래? 한잔하자.]
“나 지금 희원이랑 같이 있어.”
희원은 움찔했다.
[그래? 잘됐네. 나도 같이 보자.]
잠시 뒤 흘러나온 지훈의 목소리는 그늘 없이 밝아 보였다. 하지만 말을 꺼내기 전 몇 초간 묘한 정적이 흘렀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이 자식 와도 괜찮아?”
현상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희원에게 물었다. 치사한 질문이다. 이 상황에서 오지 말라고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야 당연히 괜찮지요. 그런데…….”
[그래. 그러면 나 지금 바로 나갈게. 아무 데나 먼저 들어가서 전화해.]
지훈은 그렇게 말하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런데 뭐?”
현상이 대신 맺지 못한 희원의 말에 대해 질문해주었다. 희원은 애매하게 펼친 손가락 하나를 휴대폰 쪽으로 흔들거리면서 물었다.
“오라고 해도 괜찮은 거예요?”
“괜찮다며?”
“그래도……. 그래도…….”
희원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서 말을 더듬거렸다.
희원이 마지막으로 본 지훈의 모습은 상당히 비참한 것이었다. 그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의 친누나인 희나고.
애초부터 희나 때문에 시작된 인연인 만큼 더는 희원과는 마주치고 싶지도 않아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이쪽으로 흔쾌히 오겠다고 한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들을 시원히 말해버릴 수도 없어 어버버거리던 희원이 꺼내놓은 말은 이랬다.
“지훈이 형은 잘 지내고 있는 거예요?”
“좀 이따 보면 알아.”
말하면서 현상이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불을 붙이고는 희원에게도 내밀었다.
“됐어요. 난 끊었어요.”
“그 과수원 혹시 무슨 종교단체냐? 진짜 적응 안 되네.”
“그렇게 말하지 마요. 얼마나 좋은데.”
현상은 못마땅한 얼굴을 한 뒤에 차를 출발시켰다.
“내가 타고 온 차는 어쩌고요?”
“나중에 직원 시켜서 가져오라고 하지 뭐.”
현상은 대수롭지 않게 말한 뒤 5분 정도 운전해 종종 가곤 하던 청담동 일식 주점에 차를 세웠다.
아늑하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의 룸으로 안내돼서 가볍게 몇 잔 주고받은 뒤 얼마나 지났을까.
나무로 된 격자무늬의 미닫이문이 열리고 지훈이 모습을 드러냈다.
“희원,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친근하게 웃는 지훈을 보고 희원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원래 호리호리한 사람이 살이 빠져 완전히 마른 체형이 되었다. 그 특유의 스타일리시함에는 어울렸지만, 어딘지 위태로워 보였다.
그러나 지훈은 조금도 변함없는 태도로 희원의 옆에 앉아 떠들기 시작했다.
“너 키가 좀 더 큰 거 같네. 시골 공기가 잘 맞아? 얼굴 엄청 까무잡잡해졌다.”
“밖에서 일하다 보니까 좀 많이 탔죠?”
“그래. 전에는 희나 남자 버전 같더니, 이젠 좀 달라졌는데.”
지훈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희나의 이름이 나왔다.
“희나는 잘 지내?”
“뭐, 그렇죠.”
희원은 대강 웃고 고로케를 젓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얼버무렸다. 아무리 본인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오히려 이쪽이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그런 공기를 눈치챈 듯 지훈은 희나 이야기를 더 꺼내지는 않았다.
“희원이가 내려간 지 몇 달 정도 됐지? 너 상일 씨 기억하나?”
“네. 상일 형님 기억하죠.”
“이번에 지혜랑 속도위반으로 결혼한단다.”
“에엑? 사귀는지도 몰랐는데요?”
“하하하. 그러니까. 아무도 몰랐어. 바로 다음 주에 식 올린다.”
공통으로 알고 있던 사람들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하고 술자리의 어색함이 천천히 걷혀나갔다. 그간 지냈던 이야기를 하고 서로의 근황을 전하다 보니 분위기가 물씬 좋아졌다.
술잔이 한 잔 두 잔 돌아가고 모두의 얼굴에 얼근히 취기가 올랐을 무렵 지훈이 희원에게 물었다.
“너 오늘 바로 내려가?”
“아뇨. 자고 갈 거예요.”
“오, 그래?”
희원의 대답에 지훈이 신난 얼굴이 되더니 어깨를 팔로 감싸며 제안했다.
“그럼 이차로 클럽 가자! 형이 쏠게.”
“아니, 괜찮아요.”
“왜, 너 여자친구 생겼냐?”
“아뇨. 내려간 지 얼마나 됐다고요.”
“그럼 왜? 빼지 말고 가자~! 오래간만에 신나게 놀아보자고.”
희원은 몇 번 더 사양했지만, 지훈은 물러나지 않았다.
“하아. 알았어요, 갈게요, 갈게요.”
끈질긴 꼬드김에 희원이 백기를 들자 지훈은 헤헤 웃더니 화장실에 가겠다고 룸을 나섰다. 그가 나가자 현상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을 집어 들며 말했다.
“난 슬슬 들어갈 테니 클럽 잘 갔다가 내일 연락해.”
“엑? 그런 게 어딨어요!”
“난 여자친구 있어서 클럽 같은 거 가기 싫어.”
5년간 현상이 제대로 된 여자친구를 만드는 걸 본 적이 없었기에 믿을 수가 없었다. 희원이 불신의 눈초리를 날리자 현상이 한숨을 푹 내쉬며 나직하게 말했다.
“난 이제 진짜 못 보겠다. 내 친구 저런 꼴을.”
툭 내뱉는 말에 불만스레 나와 있던 희원의 입술이 쑥 들어갔다. 현상의 푸념이 계속 이어졌다.
“낮에는 죽어라 일하면서 밤마다 클럽이나 다니고, 이 여자 저 여자 전전하고. 잠도 거의 안 자고 제대로 처먹지도 않아서 너 없는 사이에 두 번이나 쓰러졌다. 부모님께라도 연락해야 하지 싶은데 그러면 인연 정말 끊는다고 길길이 날뛰고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지훈이 형 편력이 일이 년 된 것도 아니잖아요.”
“난 그게 네 누나랑 서로 이도 저도 아니게 썸 타는 거 때문인 줄 알았지. 그런데 걘 내려가서 결혼까지 했는데 여태 이러고 있잖아. 그러니 안 돌아버리고 배겨?”
정말 지긋지긋한 것처럼 현상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다. 그가 어깨를 들썩이며 감정을 가라앉히는 동안 희원은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물었다.
“그거 때문에 화나서 나 붙잡은 거예요?”
“섭섭한 소리 하지 마. 내려가서 연락 한 번 없다가 얼굴 보자길래 좋다고 나왔더니 차 돌려준다고? 차 한잔 마시고 바로 쌩하니 내려간다고나 하고. 인연 끊으려고 드는 건 너잖아.”
“……형들이 나 불편해할 것 같아서 그런 거죠.”
“난 그런 거 없어. 네 누나는 누나고, 너는 너지.”
현상의 말에 희원의 가슴 한구석이 찡해졌다.
저런 대단한 사람들은 자신 같은 사람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을 거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가 섭섭해한다는 사실이 고맙기도 하고, 면목도 없었다.
“미안해요, 형. 그런 식으로는 생각도 못 했어요.”
“미안하면 오늘 하루만 저 자식 좀 부탁해. 해 뜨면 꼭 연락하고.”
“그럴게요.”
“전화 안 받아서 그냥 내려갔다거나 그런 핑계 대면 죽는다. 사무실로라도 꼭 전화해.”
신신당부한 뒤 현상은 지훈이 돌아오기 전 도망가려는 듯 다소 황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룸의 문을 연 지훈은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는 희원을 보고 한쪽 눈썹을 올렸다.
“이 자식 도망간 거야?”
“그렇게 됐네요.”
“쳇. 좋아, 뭐. 우리 둘이 즐기면 되지. 나가자!”
희원은 한숨을 쉬며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지훈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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