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허니문 (2)
그러나 진혁의 품에 순순히 이끌리던 희나의 눈이 시계에 닿았다.
“아, 우리 지금 나가야 해요!”
“어?”
“저녁 식사가 9시 반까지라고 했거든요! 지금 안 가면 첫날 날리는 거예요.”
진혁은 다른 쪽 욕구 때문에 식욕은 상당히 억제된 상태였다.
그러나 비행기에서 먹은 부실한 기내식 외에 먹은 게 없었으므로 희나는 배가 고플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출발 전부터 이곳 식당에 대한 기대를 끊임없이 쏟아냈기 때문에 만류하기도 뭐했다.
“우리 여기 4일 있을 거니까 식당 종류별로 전부 이용하려면 오늘 놓치면 안 돼요! 어서 나가요.”
“알았어. 가자.”
진혁은 희나와 함께 방을 나가며 물었다.
“어디 식당으로 갈 거야?”
리조트에는 네 종류의 식당이 있었다. 코스 요리를 제공하는 레스토랑과 뷔페, 한식당, 그리고 일식당이었다.
숙박객은 모든 종류의 식당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지만, 뷔페와 한식당을 제외한 레스토랑은 식사 전 예약해야 했다.
“바로 뷔페로 가요.”
“어?”
희나의 말이 진혁은 내심 의외였다.
일반적으로 허니문의 첫 디너라고 한다면 코스 요리가 적합할 것이다. 그러나 희나의 눈에는 분위기보다는 음식에 대한 전투심이 가득해 보였다.
“많이 먹고 체력을 비축해야지요!”
곧 도착한 식당의 분위기는 무드를 잡기엔 몹시 부적절해 보였다.
분위기도 아기자기한 데다 어린아이를 데려온 가족들이 많아 왁자지껄했다. 뷔페에 맥주와 와인도 제공 중이었기 때문에 취한 사람들도 제법 돌아다니고 있었다.
“다 맛있겠네요! 음식 엄청 많아요. 여기 이거 봐요.”
희나가 파파야를 신기한 듯 가리켰다.
이것저것 살펴보던 그녀는 진혁을 창가 쪽의 동그란 테이블로 데려가 앉혔다.
“선생님은 여기 앉아 있어요. 내가 음식들 가져다줄게요.”
“같이 가자.”
“아뇨, 아뇨. 내가 해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희나는 혼자 음식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진혁이 앉아 기다리는 사이 희나는 수많은 음식을 예쁘게 담아서 테이블로 날랐다. 샐러드, 고기, 밥이나 파스타 같은 탄수화물류까지 골고루 세팅한 그녀는 마지막으로 와인까지 두 잔 들고 와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헤헤. 건배할까요?”
두 사람은 기분 좋게 잔을 맞대고 와인을 마신 뒤 식사를 시작했다.
뷔페치고 음식들은 상당히 훌륭했다. 한동안 거의 한식만 먹었기 때문에 더욱 기분 좋은 식사였다.
“선생님, 맛있어요?”
“응, 다 맛있어.”
“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내가 다 갖다 줄게요.”
희나의 말에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맙긴 한데 왜 그렇게 열심인 거야?”
“열심이라고요?”
“응. 너무 잘해주니까 불안하네.”
진혁은 장난스레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아까 망쳤으니까, 보상하려고요.”
“그럴 필요 없는데. 그리고 그 전부터 계속 그랬잖아?”
진혁은 포크를 놓고 와인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계속 물었다.
“여행 계획도 혼자 짜고, 예약도 혼자 하고. 귀찮은 거 전부 혼자 해결하는데, 신경 써주는 거 고맙긴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돼.”
“하지만 맨날 선생님이 다 나한테 해주잖아요.”
희나가 입술을 비죽거리며 대답했다.
“집도 다 준비해주고, 희원이도 돌봐주고. 나도 뭔가 해주고 싶어요.”
“무슨 소리야. 네가 나한테 해주는 게 훨씬 많잖아.”
진혁은 진심으로 말하는 것 같았지만, 희나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미래도 봐주고 과수원 일도 도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별로 할 게 없었다. 가까워도 다른 집에 살기 때문에 미래랑 놀아주는 것도 매일은 아니었고, 학교 공부에 집중하라며 진혁의 어머니는 집안일에 손도 못 대게 했다.
결혼해서 달라진 건 오로지 좋은 방향으로만 있었다.
진혁이 오길 기다리다가 오면 맛있는 거 먹고 귀염 받으면서 도란도란 얘기하다가 함께 잠든다. 주말에는 같이 나들이도 가고,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고, 친구들이랑 놀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게 너무 행복해서 불안할 지경이다.
“얼마나 고마운데. 나 같은 사람한테 시집와 주고.”
이런 말 들을 때마다 가슴이 뭉클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너무너무 좋은 사람이라서, 자신은 그만큼 좋은 사람이 아닌 거 같아서 미안해진다.
“선생님도 가끔은 나한테 잘해줄 기회를 줘야 돼요.”
“내가 못 그러게 해?”
“그냥 놔두면 선생님은 선생님 생일에도 나한테 선물 사줄 거 같다고요.”
진혁은 뜨끔한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정말 그럴 모양이었나 보다.
“자꾸 그러면 나한테 못 잘해주게 할 거예요!”
희나는 말도 안 되는 협박을 하고 그를 보며 쿡쿡 웃었다.
“그래, 고마워.”
진혁은 작게 속삭이며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놓인 희나의 손을 꼭 잡았다.
주변에 사람이 워낙 많아 잠깐 움찔했다가 희나는 이곳이 소곡리가 아님을 깨달았다.
여기는 일상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가 떨어진 외국이다.
둘이서 눈만 마주 보고 있어도 히죽히죽 웃는 동네 사람들이 없는 거다.
여기서라면 애정표현을 마음껏 해도 상관없다.
진혁도 희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단단한 팔이 희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희나는 그보다 더욱 대범한 행동을 했다. 고개를 내밀어 진혁의 뺨에 입을 맞췄다.
금방 떨어질 예정이었던 입술은 그대로 머물렀다.
진혁이 놔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희나의 머리를 감싼 채 천천히 앞으로 끌어당겼다. 곧 두 개의 입술이 맞닿았다.
뷔페 한가운데에서 키스하는 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입술을 벌리고 그를 받아들이기 직전 멈춰야만 했다.
두 개의 동그란 눈동자와 마주쳤기 때문이다.
“이다음은 방에 돌아가서 하는 게 나을 거 같네.”
진혁이 작게 중얼거렸다. 바나나를 꼭 쥔 채 이쪽을 헤벌레 보며 서 있던 아이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둘은 쿡쿡 웃으며 다시 식기를 집었다.
***
방에 돌아오자마자 희나는 리모컨을 찾았다.
“TV 보려고?”
“아뇨. DVD 가져왔거든요.”
희나는 보란 듯이 DVD 케이스를 내밀며 말했다.
그 표지의 <카사블랑카>라는 제목을 보고 진혁은 난처한 표정을 했다.
“그거 보려고?”
“네. 가장 위대한 로맨스 영화래요! 일부러 검색해서 찾아왔어요.”
틀린 평판은 아니지만.
진혁은 뭔가 만류하고 싶었지만, 희나가 눈을 반짝거리고 있으니 말을 꺼내기가 난감했다.
아마 이것도 그녀가 말한 ‘잘해주고 싶다’는 기분에서 나온 것임을 알기에 보지 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진혁은 희나와 함께 누워서 영화를 보게 되었다
곧 시작된 영화는 흑백 영화로서도 아름다운 영상미와 탄탄한 내러티브를 자랑했다.
그러나 30분이 채 지나기 전에 신혼여행 첫날에 보기에는 상당히 부적합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두 사람은 새벽 일찍 일어나서 네 시간 이상의 비행을 하고 공항에서 몇 시간을 대기한 끝에 녹초가 된 상태였다. 1940년대 영화의 완만하고 서정적인 전개를 감당하기에 희나의 눈꺼풀은 너무나도 무거웠다.
“희나야, 졸려?”
꾸벅꾸벅 졸고 있는 희나의 뺨을 건드리며 진혁이 물었다. 손가락이 닿자마자 고개가 푹 꺾여버린다. 아무래도 일어날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들떠 있었고 긴 비행을 했으니 피곤한 게 당연하다. 깨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착한 진혁의 심성은 그러지 못했다.
“바보네, 정말.”
잘해주길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인데.
진혁은 작게 중얼거리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흐트러진 옷 사이로 희나의 뽀얀 속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깊이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옆에 누웠다. 좁다란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그녀를 꼭 안은 채 눈을 감았다.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
둘째 날.
“선생님, 일어나세요! 이거 봐요!”
진혁은 또다시 희나의 재촉에 눈을 떴다.
그녀는 커튼을 활짝 연 채 창가에 서 있었다. 그 바깥으로 새하얀 모래가 바닥까지 비치는 투명한 에메랄드빛 바다가 보였다.
“정말 예쁘죠! 우아, 진짜 미쳤다!”
잔뜩 들뜬 그녀는 당장에라도 바다에 뛰어들고 싶은 듯했다. 진혁도 풍경이 몹시 마음에 들었으나 아직 오전 6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계가 더욱 신경 쓰였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면 또 밤에 지쳐 쓰러져 잠들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씻고 내려가서 밥 먹어요! 오전에 ATV 타고 타포차우 산에 올라갈 거니까요!”
일어나자마자 두 사람은 몹시 바쁘게 움직였다.
조식 뷔페를 먹고 나와 우선 프런트로 가서 방을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9월이라 비수기인 리조트에는 빈방이 많았으므로 두 사람은 더블베드가 있는 방에 무사히 입성했다.
분위기도 좋고, 더없이 허니문다운 분위기였다.
그 후 둘은 곧장 ATV를 타고 타포차우에 올라갔다.
경사가 있는 데다가 길이 무척이나 거칠어서 초심자가 타기에는 어려운 코스였다.
MT 갔을 때 몇 번 타본 적 있는 진혁과 달리 희나는 익숙지 않아서 몇 번이고 도랑에 빠지곤 했다.
비록 내려올 때는 안내인과 함께 타야 했지만,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이국적이고 선명한 녹색의 초원과 푸른 하늘의 조합은 너무나 인상 깊었다. 희나는 제대로 ATV를 즐기지 못했다는 건 아무래도 좋아졌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진혁과 잔뜩 찍은 사진을 보며 웃고 떠들었다.
산에서 돌아온 두 사람은 그 후로는 워터파크에서 놀았다.
비수기였으므로 리조트에 사람이 거의 없어서 전세 낸 거나 마찬가지였다. 조금도 기다릴 필요가 없이 놀이기구를 연달아 탈 수 있었다. 친절한 원주민 직원들은 신나하는 둘을 웃으며 반겨주고, 친절하게 보조해주었다.
즐거운 물놀이 후 저녁에는 석양이 저무는 바다에서 단둘이 카누를 탔다.
카누를 타고 돌아오니 녹초가 되었지만, 쉴 겨를이 없었다.
예약해둔 바비큐 식당에 가서 공연을 보며 바비큐를 먹었다.
너무나 맛있고, 생각보다 공연의 질도 높았다.
정말 완벽한 하루였다.
오직 방에 들어오자마자 희나가 곯아떨어진 것만 빼면 말이다.
“휴. 이렇게 방전될 때까지 노는 걸 보면 아직 애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잠들어버린 희나를 내려 보며 이제는 반쯤 체념한 말투로 진혁은 중얼거렸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여자에게 반해버렸다.
기다리며 참는 거에 익숙하긴 해도, 신혼여행에서까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며 진혁은 희나를 끌어안고 누웠다.
그렇게 그날도 진혁은 금욕의 밤을 이어가야 했다.
***
셋째 날.
진혁의 타는 속도 모르고 새근새근 잠들었던 희나는 또다시 해가 뜨자마자 일어나 진혁을 깨웠다. 그러나 똑같은 것에 세 번 당하는 바보는 없다.
“선생님? 앗!”
진혁은 희나를 끌어당겨서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오늘은 일찍 안 일어날 거야.”
“네? 하지만…….”
“하지만이라고 해도 안 일어날래. 신혼여행인데 둘이서 조금은 느긋하게 있어도 되잖아.”
진혁의 말에 희나는 얼굴을 붉히고는 그의 품에 얌전히 얼굴을 기댔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진혁의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천천히 허리를 감싸는가 싶더니 입술이 맞닿았다.
두 사람의 호흡이 섞이고 키스는 점점 농밀해졌다. 몸을 쓰다듬는 손길에 점차 희나의 숨결이 뜨거워졌다. 녹아들 것 같은 달콤함이었다.
깊은 키스를 마친 뒤 진혁은 천천히 그녀의 몸 위로 올라왔다. 그녀를 열렬하게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입을 맞추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희나는 둘이 함께 있으면 행복함이 계속 갱신되는 것 같았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하고 신기한데, 그게 매번 매번 더욱 커진다.
이대로 그의 품에 안겨서 계속 시간이 멈춰 있었으면 좋겠다.
진혁의 단단한 몸을 끌어안던 희나는 옷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손길을 느끼고 움찔했다.
“자, 잠깐만요.”
희나가 불렀으나 진혁은 못 들은 척 진도를 나가고 있었다.
“안 돼요. 우리 30분 있다가 나가야 해요.”
“오늘은 천천히 나가자.”
“이미 예약해놨어요.”
“그럼 30분 안에 끝낼게.”
이렇게 막무가내인 진혁은 처음 본다. 사실 희나도 그의 품에 안기고 싶은 기분은 굴뚝 같았으나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다.
시간 여유가 없는 것도 문제지만, 진혁이 그 부드러운 성격과 다르게 꽤 격렬(?)한 탓에 끝나고 나면 완전 녹초가 돼버린다. 그 상태에서 나른한 감각에 취해 그의 품에서 잠들 때가 가장 행복하긴 하지만, 오늘 하루를 날려버리는 건 안 된다.
“오늘 마나가하 섬 가는 날이에요. 일정 중에 제일 기대했단 말이에요.”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있던 진혁은 희나의 투정에 한숨을 내쉬었다. 희나는 열심히 설득했다.
“그래도 오늘은 그렇게 일정이 바쁘지 않아요. 마나가하 섬에만 갔다가 바로 리조트로 돌아올 거니까. 그 이후에 여유가 있잖아요.”
“지금이 좋은데.”
“그러면 못 나갈 거 같은데. 여기 있는 건 그렇게 오래 아니잖아요.”
“……알았어.”
진혁은 마지못한 듯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희나는 몸을 돌리는 그를 죄책감 섞인 눈으로 바라보다가 냉큼 등에 매달렸다.
“화났어요?”
“화낼 일이 아니잖아.”
화나지 않았어도 섭섭한 기색은 있었다. 착한 사람이 이 정도 내색하는 걸 보니 많이 서운한 모양이다.
미안한데 뭐라 할 말이 없어서 희나는 등에 얼굴을 비볐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선생니임…….”
매달린 채로 꼬물꼬물 애교를 부리자 진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희나의 손을 끌어다가 깨물고는 작게 투정을 부렸다.
“바보야. 결혼하고 나서도 고문이야?”
“선생님이 나보다 더 오래 튕겼잖아요.”
희나도 볼을 부풀리며 진혁의 손을 깨물었다. 그렇게 둘이 장난을 치고 있으려니 진혁의 얼굴도 점점 밝아졌다.
“이제 기분 괜찮아졌어요?”
“응. 하지만 오늘은 절대 먼저 잠들지 않는다고 약속해.”
“알았어요. 절대 안 잘게요.”
진혁은 쿡쿡 웃으면서 일어서서 먼저 욕실로 걸어갔다.
희나는 다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나가기 아쉬운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어떤 후회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기분 좋게 창밖을 바라본 뒤 그녀는 일어서 욕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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