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허니문 (1)
촤아악.
커튼을 치는 소리와 함께 햇살이 쏟아져 진혁은 잠에서 깨어났다.
눈이 부셔 미간을 찌푸리고 앞을 보니 희나가 창가에 서 있었다.
“선생님, 오늘이에요! 빨리 일어나세요.”
“음. 아직 조금 여유 있지 않아?”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며 진혁이 말했다. 시곗바늘은 새벽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일찍 출발해야지요! 가는 데 시간이 걸릴 수도 있는데.”
“그럴 거 같진 않지만…….”
창밖에 시선을 던지자 늘 보이던 과수원 대신 탁 트인 콘크리트 벌판이 보였다.
둘은 인천공항 앞 호텔에 있었다.
진혁은 천천히 일어나서 희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창밖을 쳐다보는 희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전망이 예쁘지요?”
“응. 좋아.”
“식사도 맛있고, 정말 괜찮은 호텔이에요. 시작이 좋아요, 그렇죠?”
희나는 몹시 들뜬 것처럼 보였다. 진혁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은근하게 희나의 가느다란 허리를 더듬었다. 희나가 얼굴을 붉히며 그의 손을 막았다.
“우리 이제 금방 나가야 하잖아요…….”
“10시 비행기잖아. 한 번 정도는 괜찮을 거 같은데.”
속삭이면서 진혁은 희나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잠시 키스를 허용하며 나긋나긋해지는 듯했던 희나는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안 돼요, 이러면 안 돼.”
“안 돼?”
진혁이 가볍게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제도 늦게 일어날까 봐 안 된다고 했잖아. 일찍 일어났으니까, 응?”
희나는 그의 안경 벗은 얼굴에 약했다. 거기에 조르는 목소리까지 겹치자 달콤한 손길에 몸을 내맡기고 싶어졌다.
그러나 넘어가기 직전 희나의 사명감이 고개를 들었다.
“아, 안 돼요.”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다 완벽했으면 좋겠어요.”
그럴 기분이 가신 건 아니었지만, 진혁은 순순히 물러났다. 희나가 이번 여행을 얼마나 기대했으며, 얼마나 열심히 계획을 짰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났어요?”
“이런 거로 내가 화낼 거 같아?”
“섭섭해하지 마요. 네? 우리 신혼여행이잖아요.”
애교부리는 희나를 보고 진혁은 평소처럼 부드럽게 웃었다.
“응. 안 섭섭해.”
희나는 헤헤 웃으며 진혁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럼 내 일정대로 따라주는 거예요?”
“응.”
“그럼 씻고 와요. 7시에 조식 먹고 7시 반에 체크아웃할 거예요.”
“빡빡하네.”
진혁은 욕실로 들어가다가 덧붙였다.
“가서는 이쪽 일정도 많이 비워놨기를 바랄게.”
“바보. 빨리 씻어요!”
핀잔을 던졌지만, 희나는 킥킥 웃었다.
***
진혁과 희나는 방학이 끝나기 전 식을 올렸지만, 미래의 퇴원까지 신혼여행을 미뤘다.
진혁은 몹시 미안해했으나 희나는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미래를 병원에 두고 신혼여행을 가는 편이 훨씬 불편하니까. 마음에 걸리는 건 한 점도 두고 싶지 않았다.
완벽한 신혼여행.
희나는 그것을 원했다.
불우한 가정에서 자라 줄곧 일만 하느라 사는 도시 밖으로 나간 적이 거의 없었다. 처음으로 가는 해외여행은 희나에게 엄청난 로망이었다.
“그렇게 좋아?”
공항에 내리자마자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희나를 향해 진혁이 물었다. 고개를 크게 끄덕이자 그는 픽 웃었다.
“더 멀리 가도 괜찮았을 텐데.”
“사이판이면 충분해요!”
희나에게 있어 완벽한 신혼여행은 사치를 뜻하지 않았다.
도심보다는 휴양지로 여행지를 결정한 뒤 몇 주 동안이나 사진을 들여다본 끝에 희나는 사이판으로 마음을 굳혔다.
사진 속 맑고 푸른 에메랄드빛 바다는 정확히 그녀가 원하는 풍경 그 자체였다.
가격도 적당했다. 진혁은 경비에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지만, 희나는 둘 다 한동안 학생인 이상 큰돈을 여행에 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여행 책자에 실린 사이판에는 ‘뱀’이 없다는 문구였다.
도심에서 자란 희나가 시골에서 가장 익숙해지지 않는 것은 아주 가끔 출몰하곤 하는 뱀이었다. 지금 누가 세상에서 가장 싫은 것을 묻는다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뱀이라고 답할 것이다.
“다른 데 가서도 뱀을 볼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하지만.”
진혁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희나의 의견에 동의해주었다.
그리고 여행지가 정해지자마자 희나는 모든 일정에 대해서 철저하게 계획을 세웠다.
“저기로 가서 탑승 수속 하면 되는 거 같은데.”
게이트로 들어선 진혁이 커다란 ‘H’ 문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나 옆에 서 있던 희나에게서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응? 희나야.”
돌아본 진혁은 원래 희나가 있었던 자리에 아무도 없음을 발견했다. 놀라 고개를 돌려 그녀를 찾아보고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희나는 비행시간을 표시하는 커다란 전광판 앞에 입을 벌리고 선 채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가 다가가자 그녀는 눈을 반짝거리면서 휴대폰을 휘휘 흔들었다.
“선생님! 여기 완전 커요! 진짜 쩔어요! 이거 보세요!”
“내가 줄 서 있을 테니까 구경하고 와.”
“그래도 돼요?”
스키니진에 셔츠, 그리고 카디건을 입고 선글라스를 머리에 걸친 그녀의 모습은 연예인 공항 패션 사진에서 튀어나온 것 같다.
그러나 실상 해외여행은커녕 제주도도 가보지 않은 희나였기에 공항은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그렇게 좋아?”
“네!”
진혁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그녀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전에는 그가 이렇게 할 때마다 어린애 취급하는 것 같다고 싫어했지만 지금은 마냥 좋은 모양이었다.
너무 일찍 도착한 탓에 공항을 실컷 둘러보고 나서야 두 사람은 비행기에 탑승했다.
희나는 좌석에 앉아 진혁에게 방금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출발하기도 전에 찍은 사진이 벌써 100장도 넘었다. 대부분 비슷비슷했지만, 희나가 귀여워서 진혁은 흥미로운 척하며 사진을 보았다.
“빨리 출발했으면 좋겠다.”
사진을 다 보여주고 희나는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둘이서만 멀리 떠나는 건 처음이라 기대되는 건 진혁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은 비행기 탄 적 있다고 했지요?”
“응. 많지는 않지만.”
희나가 몇 번이나 했던 질문에 진혁은 똑같이 대답했다.
“내리자마자 수화물 찾는 데서 짐을 찾은 다음에 가이드를 찾아야 한대요. 게이트 앞에 있을 거래요. 패키지여행이니까, 절대 늦게 오면 안 된다고 하네요.”
희나는 조잘조잘 떠들었다. 그는 1학년 때 어학연수도 다녀왔고, 교수님의 학회에 따라가거나 친구들과 방학 때 놀러 간 적도 꽤 있었다.
반면 희나는 비행기에 탈 때는 신발을 벗고 타야 한다거나 내릴 때 교통카드를 찍고 내려야 한다는 낚시 글을 진지하게 읽고 있는 걸 몇 번 봤다.
객관적으로 여행의 리드는 진혁이 하는 게 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얼굴을 보면 말이지.’
진혁은 희나가 여행 관련 정보가 잔뜩 적힌 수첩을 읽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긴 걸 보며 빙그레 웃었다. 이렇게 좋아하는 그녀를 볼 수 있다면, 필요 이상으로 일찍 일어나서 공항에 오거나 탑승 시작하자마자 굳이 줄 서서 기다리는 불편함 정도는 감수할 만했다.
“우아아, 선생님, 출발하네요! 힉.”
비행기가 이륙을 시작했다. 속도가 빨라지자 놀라 굳은 희나는 진혁의 팔에 딱 달라붙었다. 그녀를 다독이며 진혁은 슬그머니 손을 뻗어서 희나의 휴대폰을 슬쩍 비행기 모드로 바꾸었다.
***
사이판까지 4시간 반 동안의 비행은 순조로웠다.
처음 타는 비행기에 기분이 업 돼서 사진도 잔뜩 찍고, 기내에서 제공하는 맥주를 4캔이나 마셨다. 그러는 사이 실력 좋은 기장이 아주 부드러운 착륙에 성공해서 아무 문제 없이 두 사람은 사이판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처음으로 뭔가가 틀어진 것은 입국심사부터였다.
“우와 사람들 진짜 많네요.”
희나는 혀를 내둘렀다. 세 대의 비행기가 동시에 도착하는 바람에 입국심사장은 몹시 붐볐다.
“선생님, 저쪽이에요. 저쪽으로 가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희나가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쪽에는 ESTA(전자여행허가) 소지자들을 위한 대기 줄이 늘어서 있었다. 당연히 그쪽이 빠를 것이 뻔했으므로 진혁은 그녀의 유도에 따랐다.
문제는 한 시간 반이나 기다려 희나의 차례가 되었을 때 발생했다.
“네? 뭐라고요?”
“Sorry. ESTA holders only.”
짧은 한마디로 희나는 줄의 마지막으로 되돌려졌다.
“선생님. 저 다시 줄 서야 한대요!”
“어? 희나야?”
먼저 나갔던 진혁은 당황했지만, 입국심사장으로 다시 들어올 수는 없었다.
결국, 진혁과 따로 떨어진 채 두 시간이나 더 기다린 끝에 심사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
게이트 앞에서 여행용 가방을 들고 기다리고 있는 진혁을 발견하자마자 희나는 울상을 지었다.
“미안해요. 그게 뭔지 몰랐어요.”
“그런 거 같더라.”
몇 시간을 기다리게 했는데 진혁은 화난 기색 없이 웃고 있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그거 있었어요?”
“난 작년에 학회 때문에 신청한 적 있어서…….”
“힝. 그럼 말해주지.”
“미안. 생각을 못 했네.”
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진혁은 희나의 이끌림에 따랐을 뿐이다.
그녀가 몇 날 며칠 사이판에 대해 조사한 데다가 너무나 당당히 걸어갔으므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희나가 그 줄로 진혁을 끌고 간 것은 단지 그 줄이 짧았기 때문이다.
‘내가 잘못한 건데 선생님이 사과하네.’
뭔가 미안함이 몰려와서 희나는 고개를 떨궜다. 그러자 희나의 귀에 진혁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풀 죽어 있을 필요 없어.”
“하지만 나 때문에 몇 시간이나 기다리고.”
“그게 어때서 그래. 정말 바보네.”
진혁은 오히려 쿡쿡 웃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희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다리 아프지? 빨리 리조트로 가자.”
희나는 진혁의 이끌림에 따라 걷기 시작했다.
곧 두 사람의 발길은 택시 승차장에 멎었다.
“택시 타요?”
“응. 다른 일행들이 많아서 가이드는 먼저 갔어.”
보통이라면 가이드에게 데리러 오라고 전화하겠지만, 희나는 진혁이 그러고 싶어 하지 않을 걸 알아서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택시에 올라타 목적지를 말하자 곧 출발했다.
바깥은 이미 캄캄해서 아름다운 정경 같은 건 딱히 보이지 않았다.
멍하니 창밖을 보며 내내 말이 없는 희나를 끌어당겨 진혁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우울해하고 있으면 안 돼.”
돌아보자 까만 눈동자가 다정하게 빛나고 있었다.
희나는 그의 어깨에 기대서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이렇게 있으니까 이제는 뭐든 괜찮을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두 사람이 예약한 것은 워터파크가 딸린 리조트였다.
비록 도착했을 때 어둡긴 했지만, 리조트의 자태는 조금도 실망스럽지 않았다.
입구부터 웅장했고, 아기자기한 정원도 잘 가다듬어져 있었으며, 로비에 늘어진 샹들리에는 희나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하였다.
멋진 리조트를 보고 희나의 얼굴에도 웃음이 돌아왔다.
신나서 체크인하고 예약해둔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와아. 멋지다.”
문을 열자마자 희나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방 한쪽 벽을 가득 메운 커다란 창 바깥으로 리조트의 조명에 비친 탁 트인 바다 정경이 펼쳐져 있었다. TV에서나 보던 것처럼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홀린 듯 안으로 들어가던 희나는 뭔가 잘못된 것 같은 위화감을 느꼈다.
그 위화감의 정체는 뒤따라 들어오던 진혁의 목소리로 드러났다.
“신혼여행인데, 침대가 두 개인 방은 좀 그렇네.”
“이, 이런 거 아니었는데!”
방 한가운데에는 슈퍼 싱글 정도로 보이는 침대 두 개가 협탁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번에는 트윈과 더블을 헷갈린 모양이었다.
“어, 이거 어떻게 해요.”
“내가 프런트에 전화해볼게.”
진혁이 협탁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곧 그의 입술에서 제법 유창한 영어가 흘러나왔다.
희나는 입을 헤 벌리고 바라보다가 그가 전화를 끊자마자 물었다.
“선생님 영어 할 줄 알아요?”
“음. 조금은.”
“조금이 아닌데요?”
하긴, 영어로 된 원서를 집에서 허구한 날 읽는데 말은 못하는 것도 이상하다. 희나는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다가 불쑥 말했다.
“멋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바보가.”
진혁은 쿡쿡 웃었다. 그리고 희나의 머리를 감싸서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지금은 담당 직원이 퇴근해서, 빈방으로 옮겨줄 수가 없대. 오늘은 여기서 잘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
“힝. 그러면 따로 자야 하는 거예요?”
“괜찮아, 한쪽에서 같이 자면 되잖아.”
“침대가 이렇게 작은데.”
“꼭 끌어안고 자면 되지.”
안고 있던 희나를 더욱 세게 품에 안으며 진혁이 속삭였다. 그가 흘깃 침대를 바라보는 눈길은 바로 그렇게 잠들고 싶은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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