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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128화 (완결) (128/140)

128화. 환상을 걸어서 (2)

“이거, 이렇게 많이…… 어떻게…….”

“마을 회관이랑 교회에서 빌렸어. 승수랑 희원이가 도와줬고…….”

희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결혼식이 하고 싶다고 진혁을 졸랐다.

생각했던 건 나무 한두 개에 전구 몇 개 걸고 그 사이에서 둘이서만 결혼식을 올리는 소박한 장면이었다.

상업용 일루미네이션처럼 화려한 전구들이 아닌, 크리스마스에 사용하는 소박한 전구들이 걸려 있을 뿐이었지만, 희나의 예상 이상이었다.

이 정도의 빛의 길을 만들어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었다.

희나가 아름다운 광경에 눈을 떼지 못하고 멍하니 주변을 쳐다보았다.

“너무 예쁘다.”

“네, 진짜, 진짜 너무 예뻐…….”

말하면서 진혁을 돌아보다가 희나는 말을 삼켰다. 진혁은 주변이 아닌 성장한 희나를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희나도 진혁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몸에 잘 맞는 슈트를 입고, 안경을 벗은 채 머리를 멋지게 넘긴 모습이었다. 색이 진한 슈트 덕에 흰 얼굴이 더 돋보이고 멋져 보인다.

새삼스럽게 두근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다듬으려 애쓰며 희나는 진혁의 손을 꼬옥 쥐었다.

“이 드레스는…… 어떻게 된 거야?”

“선물 받은 거예요. 예뻐요?”

“응. 정말…….”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이야말로 너무 멋져서 희나는 다시 뺨을 붉혔다. 오래 시간을 들여서 서로 모르게 준비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꿈 그 자체다. 물론 손을 잡고 있는 이 남자만 있다면 어디서든 그렇겠지만 말이다.

“좋아요, 시작해요. 우선…….”

귀 기울이던 진혁은 그녀의 손에 쥐어진 것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휴대폰은 어디다 넣어 온 거야?”

“일단 이런 건 사진 먼저 남겨 놔야 돼요!”

그러면서 희나는 진혁의 팔을 끌었다. 진혁은 킥킥 웃으면서도 순순히 끌려왔다. 그대로 둘이서 관광객처럼 사방에서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나무에 달린 미니 전구를 확대해서 바라보며 희나가 중얼거렸다.

“이렇게까지 준비했을 줄은 몰랐는데.”

“네가 하고 싶어 하니까.”

사진을 잘 찍을 수 있게 잡아주면서 하는 말에 희나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렇게 많은 나무에 듬성하게라도 전부 전구를 건다는 건 보통 작업이 아닐 것이다. 그걸 증명하듯 진혁의 손에는 생채기도 잔뜩 나 있었다.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는 말 한마디에 진심으로 응해준다.

무슨 억지를 부려도, 언제나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주기만 하는 오직 한 사람.

희나는 괜스레 솟아오르는 눈물을 애써 참으면서 단정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진혁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기분 좋아? 그나저나 오늘, 정말 예쁘네.”

“언제는 안 예뻤어요?”

“지금은 정말 거짓말같이 예뻐.”

진심이 가득 담긴 칭찬의 말이 쑥스러워서 희나는 새침하게 고개를 팽 돌리고는 걸음을 재촉해서 길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거치대에 카메라를 척 세우고 다가오는 희나를 진혁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선생님, 준비했어요?”

누구도 부르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주례가 되어서 맹세하기로 했다. 떠올릴 때는 멋진 아이디어 같았는데, 상황이 되니까 말할 수 없이 민망하다.

하지만 계속 계획해온 걸 그냥 하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것 같아 밀고 나가기로 했다.

“어, 응…….”

진혁 역시 고개는 끄덕였지만 쑥스러운 얼굴이었다. 하긴, 하자고 한 희나 쪽도 부끄럽고 긴장되는데 그는 오죽할까. 그녀는 그렇지 않아 보이려고 억지로 여유로운 척 진혁의 손을 잡았다.

“내가 먼저 할게요.”

막상 하려니 더더욱 말이 나오질 않는다. 희나는 깊이 심호흡을 한 뒤 따뜻한 손의 온기에 용기를 얻어 더듬더듬 말을 시작했다.

“지금…… 지금까지 힘들었던 거, 고생했던 거 다 지금을 위해서였다고 생각하면, 백번이라도 더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물론 진짜 다시 하라고 하면 좀 재고해봐야 할 말이지만…….”

희나의 말에 진혁이 풋, 하고 웃었다. 분위기가 유해졌지만 희나는 계속 긴장한 채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이름을 기억하는 딱 한 명뿐인 선생님이고, 정말 마음이 통한 첫 친구였고,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어른이었고, 정말 사…… 사랑하게 된 한 사람이고, 이제는 내 모든 거예요. 가족이 돼서, 평생, 평생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요. 선생님과 결혼하게 돼서 너무 기쁘고…….”

말하면 할수록 감정이 북받쳐 올라서 눈에 눈물이 고였다.

희나는 아름다운 불빛과 그 가운데의 진혁, 그리고 그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지금 순간이 너무나 행복해서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젖어 들었다.

목이 메어 말을 멈춘 희나를 진혁이 끌어안았다.

희나가 그 몸을 꼬옥 붙잡자 진혁이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지금 한 말들 때문에 내가 어떤 기분인지 넌 상상도 못 할걸.”

아마 비슷한 기분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희나는 울어버릴까 봐 아무 말 없이 잠잠히 있었다.

진혁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계속 이어졌다.

“너랑 떨어져 있던 5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도 안 나. 나한테 네가 없었으면, 난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몰랐을 거야. 나는…….”

“…….”

“네가 내 곁에 계속 있어줄 거란 것만으로도 더 바랄 게 없어.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이…….”

진혁 역시 말을 맺지 못하고 희나를 끌어안았다. 재촉하듯 잡아당기자 그가 그녀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여 말을 맺었다.

희나는 진혁의 품에 얼굴을 꼬옥 묻고, 숨을 골랐다. 오늘만은 절대로 울고 싶지 않았다.

한동안 그렇게 안긴 채 감정을 추스른 희나는 여전히 남아 있는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투정을 부렸다.

“잉, 치사하게……. 나도 얼굴 안 보고 할걸. 그리고 선생님이 한 말이 더 좋은 거 같아요. 내가 그 말들 했어야 되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바보.”

“오늘은 바보라고 하기 없기예요!”

희나는 말하면서 비로소 얼굴을 떼어 진혁을 보았다. 진혁의 얼굴은 여전히 빨간 데다 눈가도 살짝 촉촉해 보였다.

그걸 보니까 말하는 진혁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게 더 아쉬워진다. 하지만 아직 한 가지 더 남아 있었다.

“이제 다음, 다음이에요.”

“그거 진짜 할 거야?”

“꼭 할 거예요.”

진혁은 한숨을 내쉬면서 “좀 살려 주라…….” 하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희나는 못 들은 척 헤헤 웃으면서 등 뒤에 매달고 온 작은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상자를 쏙 꺼냈다.

진혁이 체념한 듯 입술을 살짝 깨무는 가운데, 희나가 상자를 열었다.

투명한 다이아몬드가 빛을 받아 눈물처럼 반짝 빛났다.

“유진혁은 주희나를 신부로 맞이하겠습니까?”

“네.”

진혁은 엄청 쑥스러워하면서도 작게 대답했다. 희나는 진혁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고 재촉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주희나는 유진혁을 신랑으로 맞이하겠습니까?”

“네.”

그리고 진혁이 희나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그녀의 앞에서 진혁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숨을 쉬었다.

“아, 이거 두 번은 진짜 못 하겠다.”

“아무도 없는데 뭐가 부끄럽다고 그래요.”

희나도 너무 어색하고 쑥스러웠지만 쿨한 척 진혁을 때려주었다. 진혁이 그런 희나를 꼬집어서 희나는 세게 때리고 몸을 돌려서 도망쳤다. 드레스를 입은 희나는 당연히 금방 잡혔고, 그렇게 둘은 투닥거리면서 빛의 길을 몇 번이나 왕복했다.

다툼은 얼마 가지 못한 채 입맞춤으로 변하고, 꼬집던 손은 허리를 다정하게 감싸 안는다.

둘은 몇 걸음마다 사진을 찍었다. 이상한 표정도 지어보고, 나무 뒤에 숨어도 보고, 키스하는 사진도 찍었다.

찍힌 사진을 보고 마구 웃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갑자기 너무 좋은 감정이 솟구쳐서 끌어안았다가 놓기도 하고, 입도 맞추고, 업히기도 하고, 내키는 대로 둘이 같이 손을 잡고 걸었다.

계속 사랑의 말을 속삭이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었다. 불편한 옷차림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한참을 둘이서 놀러 온 것처럼 왔다 갔다 한 끝에 두 사람의 발길이 한 곳에 닿았다.

희나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떨구었다. 최근, 과수원에 볼일이 있을 때도 일부러 이 근처는 비켜서 다녔다.

“이제 봐도 괜찮잖아.”

진혁이 낮게 웃으며 희나의 고개를 잡았다.

희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말도 안 돼…….”

희나는 눈을 의심했다. 바로 2개월 전까지는 그냥 밭이었던 곳에 목조 주택이 지어져 있었다.

진혁이 기존의 집으로 그냥 들어오는 것은 무리라며 과수원 내에 작게라도 집을 짓자고 했고, 노지 딸기를 재배하던 노는 땅을 택지로 바꾸었다.

희나는 농가에 흔히 있는 조립식 가건물 같은 걸 상상했었다.

하지만 눈앞의 목조 건물은 진혁의 집 본채에 비하면 작았지만 그래도 희나의 예상보다 훨씬 컸고, 가건물 같은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이렇게 커요? 어떻게 2달 만에…….”

“아는 분 소개로 한 거라 일정에 맞춰주셨어.”

“이런, 어, 돈, 돈 괜찮아요? 돈 있었어요?”

“네가 많이 줬잖아.”

평범한 결혼은 어차피 안 될 거 같아서 희나는 이런저런 거 잴 거 없이 한 푼 두 푼 열심히 모아온 돈을 진혁에게 몽땅 넘겨버렸다. 액수에 놀란 진혁이 사양했지만, 집을 짓는 데 보태라고 마구 우겼다.

그러나 그 금액으론 어떻게 생각해도 이런 집은 무리였다.

정갈하게 돌을 댄 외벽과 밝은 빛의 지붕, 그리고 예쁜 아치형 도어까지 달려 있었다. 문 앞으로 돌을 놓은 길이 이어지고 있었고, 옆에는 텃밭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꿈같이 지어진 집 앞에서 희나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하염없이 서 있었다. 여태껏 집이란 걸 가져 본 적이 없는 그녀였기에 의미가 더욱 특별했다.

진혁이 희나의 손을 잡아끌어 나지막한 대문 앞으로 데려갔다.

“어, 이거…….”

그리고 희나는 문 앞에 걸린 나무 명패를 바로 알아보았다. ‘그’ 나무로 만든 명패다.

한 달쯤 전 마당 한편에 베어진 채 덩그러니 남아 있던 그루터기를 제거하고 아카시아나무를 심었다. 그 나무토막을 차마 버릴 수 없어 고심하다가 간판과 명패를 제작했다.

과수원 입구에도 명패를 걸고, 약국과 본가에도 제작했다. 토막이 커서 각 방에도 만들어 걸어주었다. 이젠 아예 주소지까지 옮겨 온 희원의 방에도, 미래의 방 앞에도 이름이 새겨져 걸렸다.

제 것은 주지 않길래 희나는 집 안에만 사용하는 건가 보다 했는데, 그녀의 것은 여기 있었다.

희나는 ‘유진혁, 주희나’라고 단정한 글씨체로 나란히 새겨진 명패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집에 들어갈까?”

다정한 물음에 희나가 고개를 들었다.

“벌써요?”

“계속 있고 싶어?”

희나는 아쉽게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았다. 마법의 숲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불빛들. 영원히 머물고 싶은 순간을 지나 온 것이다.

끝내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기에 희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물끄러미 자신을 보는 진혁을 마주한 뒤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들어가요.”

“괜찮아?”

“네, 지금이 좋아요.”

마법 같은 날이 끝나는 건 아쉽지만 머물고 싶지 않다. 특별한 하루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내일이 시작되는 거니까.

이 손만 잡고 있으면 특별하고 행복한 하루는 언제까지든 이어질 거다.

이 밤의 의미는 내가 영원히 선생님의 것이 된 것으로 충분하다.

“내일 일찍 일어나야 되니까요. 일찍 자야겠어요.”

희나는 예쁘게 미소 지었다. 완벽한 결혼식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내일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벅찼다.

벌써 며칠째 이것저것 음식을 준비하느라 온 마을이 떠들썩했다. 가을의 수확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 집집들이 풍족했다. 아마 엄청난 잔치가 될 것이다.

그 속에 스며들어 시달릴 생각을 하니 신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희나는 단단한 팔을 꼬옥 끌어안은 채로 가볍게 그의 뒤를 따랐다.

“음, 그렇지만 일찍 잘지는 모르겠는데.”

진혁의 말에 희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새 목제의 향기가 풍기는 문을 열자 깜깜한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진혁이 먼저 들어가 희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희나야.”

“네.”

모든 것을 넘어온 그곳에는 언제나 당신만이 있을 거야.

희나는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았다. 다시는 놓지 않을 그 손을 잡고 희나는 웃으며 문을 닫았다.

과수원은 본래대로 어둠에 잠겼다.

그리고 문 안으로 둘을 감춘 새집에 환한 빛이 들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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