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금단의 너머에는
“일어나, 일어나, 희나야.”
부드러운 목소리가 희나의 잠을 깨웠다.
잘 떨어지지 않는 눈을 가늘게 떠보니 진혁의 흰 얼굴이 눈앞에 보였다.
“우웅. 지금 몇 시예요?”
“아직 새벽이야.”
그 말을 증명하듯 단정한 미소가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여름인데 해도 뜨지 않았다면 정말 이른 새벽인 거다.
희나는 볼멘소리로 잠투정을 했다.
“이런 시가네…… 왜 깨우는 거예여…….”
“잠깐 갈 데가 있어.”
“졸린데…… 좀 나중에 가며 안 대여?”
희나는 딱히 아침잠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밤새도록 진혁에게 시달린 탓에 무척이나 피로했다.
“잠깐만 일어나 봐. 차에서 자도 되니까.”
희나를 억지로 깨우는 법이 없던 진혁이었는데 이번엔 자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졸린 와중에도 궁금해졌으나 희나의 눈은 다시 스르륵 감겼다.
“못 일어나겠어?”
“아녀. 이러나께여…….”
희나가 눈을 감은 채로 손을 뻗어서 바닥에 놓인 옷가지를 더듬더듬 찾자 진혁이 옷을 손에 쥐여주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꾸물거리며 맞는 구멍에 몸을 꿰지 못하는 희나를 보던 진혁이 작게 물었다.
“내가 입혀줄까?”
“으앗, 싫어여!”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는 희나를 보고 진혁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피해주었다.
희나는 느릿느릿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와 조수석에 앉았다.
“어디 가는 거예요?”
그렇게 묻고, 웃는 진혁의 입매를 보다가 희나는 다시 스르르 잠들어버렸다.
중간중간 잠에서 깨어나 밖을 살피니 차는 고속도로에 들어서 있었다. 진혁은 줄곧 말이 없었고, 희나를 재우려는 듯 아주 조용한 음악을 틀어놓았다.
꾸벅꾸벅 졸던 희나가 완전히 잠에 빠져든 지 얼마나 지났을까.
의식이 돌아온 희나는 앞을 보기도 전에 차가 멈춰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휴게소라도 들어왔나 싶어서 눈을 뜬 희나의 동공이 커다랗게 열렸다.
“여, 여기는…….”
눈앞에 보이는 것은 희나의 모교인 천호고등학교였다.
졸업하고 나서 천호동에는 얼씬도 한 적이 없었기에 대단히 오랜만이었다.
그럼에도 예전에 학교 다닐 때 모습에서 조금도 변한 것 없이 우뚝 서 있는 모습에 희나는 진한 향수를 느꼈다.
감회에 젖은 얼굴로 진혁을 돌아본 그녀는 그제야 그가 평소보다 훨씬 신경 쓴 차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부드러운 체향과 잘 어울리는 크림색 셔츠에 진을 입고, 살짝 머리를 넘긴 진혁의 모습이 너무나 멋져서 희나는 잠시 저도 모르게 입을 헤, 벌렸다.
그런 희나를 보고 낮게 웃으며 진혁이 말했다.
“내리자.”
말을 마친 진혁이 먼저 내리자 희나는 황급히 거울을 보고, 자다가 대충 나와서 흐트러져 있는 머리카락과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내리기 전 확인한 시계는 오전 7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새벽에 출발했기에 주말의 학교는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희나가 늘 학생들로 떠들썩하던 운동장을 문 너머로 멍하니 보고 있는데 진혁이 교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귀퉁이의 문을 미는가 싶더니 철문이 갈라지며 끼익 열렸다.
희나는 깜짝 놀라서 진혁 쪽으로 다가갔다.
“들어가도 되는 거예요?”
“응. 허락받았어.”
“누구에게요?”
“박 선생님, 기억해?”
희나는 곧장 그녀를 떠올릴 수 있었다.
2학년, 진혁이 교생으로 왔을 때 담임이었고, 진혁과 헤어지기를 종용했던 사람이다.
지나고 나서 그녀가 옳았다는 것을 알았기에 희나도 어느 정도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를 떠올린 희나가 미소를 짓다가 물었다.
“선생님, 잘 계시대요?”
“응. 아직도 이 학교에 계시대.”
“뭐라고 하고 허락받았어요?”
“결혼할 거라고 했지.”
희나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러나 진혁은 장난기 있는 표정으로 빙글빙글 웃기만 해서 그 말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희나는 진혁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뭔가를 말할 필요도 없이 둘은 같은 방향을 향해 걸었다.
계단을 오르고 모퉁이를 꺾어 두 사람의 발길이 멈춘 곳은 사회과 지도실 앞이었다.
조금도 변함없이 낡고 작은 문 앞에서 진혁은 먼저 들어가라는 듯 멈춰 선 채 희나를 바라보았다.
희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추억의 한 페이지를 현실로 펼쳐낸 것처럼 보였다.
좁고 어두컴컴한 실내, 매캐한 먼지,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책 더미, 어슴푸레 들어오는 햇살.
놀라울 정도로 기억에 남아 있는 모습 그대로여서 희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언가 벅차서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서 있는데 진혁이 들어와 문을 닫는 기척이 있었다.
희나는 돌아서서 그를 보았다.
어딘지 앳된 얼굴이 여유가 깃든 표정으로 바뀌었지만, 그는 그대로였다.
처음 그가 이 문으로 들어서던 때가 떠올랐다. 놀라고 당황해서 심술궂은 말만 했지만, 그녀 본인조차 자각하지 못한 마음 깊은 곳에선 솔직히 반가움이 앞섰다.
혼자 있고 싶어서 이곳에 틀어박혀 있었지만, 누군가가 찾아와 주길 바랐던 거다.
희나는 마주 서서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진혁에게 화를 내고 뛰쳐나갔을 때만 해도 다시 그와 이곳에서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될 거란 생각은 못 했었다.
추억의 장소에 오니 너무도 달라진 상황이 강하게 실감이 되었다.
희나는 설레는 기분으로 지도실을 둘러보다가 진혁을 돌아보며 물었다.
“다시 프러포즈할 거예요?”
희나의 말에 진혁은 웃더니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니.”
여기까지 온 이유는 당연히 그거일 거라고 생각했던 희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왜 온 건데요?”
“그냥, 밥이나 먹자고.”
그러면서 진혁이 한쪽 손에 든 쇼핑백을 내보였다.
같이 걸어오는 동안 희나는 학교를 둘러보느라 그의 손에 저런 게 들려 있는지 전혀 몰랐었다.
어안이 벙벙해 있는 희나를 내버려둔 채 진혁은 잔뜩 꽂혀져 있는 책을 꺼내 바닥에 깔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태연하게 쇼핑백에서 음식들을 꺼내 바닥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서울 올라오시기 전에 만들어주고 가신 거야.”
“…….”
“여기 앉아.”
진혁은 서서 내려다보기만 하는 희나에게 책 더미를 톡톡 두들겼다. 희나는 킥킥 웃으며 예전처럼 책 더미에 분방한 자세로 걸터앉았다.
나물, 고기나 조림 반찬이 색색별로 예쁘게 가득 들어 있는 먹음직스러운 찬합.
늘 먹어서 이제는 상당히 익숙해져 있었지만 희나는 괜스레 툴툴거려 보았다.
“아저씨 맛 나는 도시락이에요?”
“먹어보면 그런 말 못 하지?”
마주 보고 웃은 뒤 진혁이 희나에게 젓가락을 건네주었다.
집 반찬이어도 찬합에 담겨 있으면 색다른 느낌을 준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입맛이 돌아서 희나는 야금야금 음식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장소의 분위기에서 그리움이 섞여들어 설명할 수 없는 맛이 났다.
정신없이 집어 먹다가 문득 통째로 들어 있는 바나나를 발견한 희나가 눈을 빛냈다.
껍질을 벗겨서 진혁에게 내밀자 진혁은 무의식중에 한입 베어 물었다. 그걸 보고 희나는 웃음을 참으며 드립을 날렸다.
“바나나를 먹으면 나한테 반하나?”
자신의 흑역사가 떠올라 민망해진 진혁의 뺨이 좀 붉어졌다. 그는 손가락이 오글거리는 걸 티 안 내려 노력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지나서 그렇지 그때는 그거 진짜 재미있었던 개그야.”
“내 인생을 걸고 그 개그가 재미있었던 때는 없거든요?”
“에이, 어쨌든 결국 먹고 반했잖아.”
“반한 게 아니라 깬 거거든요?”
희나가 새침하게 말하자 진혁이 한쪽 눈썹을 장난스럽게 들며 협박(?)을 했다.
“오랜만에 개그 몇 개 더 해줄까?”
“으악, 제발 참아줘요.”
거부해도 진혁이 개그를 하려 들자 희나는 커다란 복숭아를 집어 그의 입을 막았다.
그렇게 투닥거리고 있는데 문 밖을 지나가는 발걸음 소리에 둘은 동시에 조용해졌다.
“누가 있나 보네요?”
“그러게. 나름 스릴 있는데?”
“스릴은……. 빨리 먹고 나가요.”
방문 허락을 받았다 해도 이런 곳에서 밥 먹다 들켜서 좋을 일은 없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했어도 바로 나가기는 아쉬웠다.
희나는 전을 하나 집어 우물거리면서 물었다.
“이따 어머니랑 희원이랑 만나서 같이 내려가요?”
“만나서 같이 가긴 할 건데, 내일 내려갈 거야.”
“내일요? 그럼 우리도 친척집에 가요?”
희나는 진혁의 어머니가 친척집에 간 것을 떠올리며 말했다.
프러포즈를 했으니 소개시키려나 보다고 조금 콩닥거렸으나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나중에. 오랜만에 서울에 왔으니 다른 데로 가자.”
“그럼 어디서 자려고요?”
“너랑 이렇게 되면 꼭 가려고 줄곧 생각해오던 곳이 있어.”
진혁의 진지한 말에 희나는 또 지끈 마음이 설렜다. 뭔가 준비했나 싶어 기대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그게…… 어딘데요?”
“궁전 모텔.”
예상치 못한 대답에 희나는 빵 터져서 소리 내어 웃었으나 진혁은 웃지 않았다.
“그때 해탈할 뻔한 거 생각하면…… 너 각오해.”
원한이 사무쳤는지 진혁이 이를 갈았다.
발그레해진 희나는 진혁을 괜히 꾹 밀어내고는 궁전 모텔이 아직 있는지 찾아보려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여전히 촌스러운 궁전 모양 탑은 드높게 솟아 있어 그 모습이 뚜렷이 보였다.
그 근방에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지나고 나서 오랜만에 보니 괜스레 애잔하다.
그대로 못 박힌 듯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 희나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진혁에게서 조용한 질문이 흘러나왔다.
“매일 그렇게 창밖을 보고 있었지?”
“네.”
“뭘 보고 있었어?”
희나는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 잠시 기억을 되짚어 보고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냥요. 상상하고 있었어요.”
“무슨 상상?”
“평범하게 가족들이랑 살면서, 친구들이랑 웃고 떠들고 하는 쟤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뭐 그런 거.”
누군가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도, 누군가가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해주는 것도 그때의 희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전혀 모르는 미지였지만, 그래도 그것을 가진 창밖의 아이들을 동경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었다.
“……지금은 무슨 생각 해?”
회상에 잠긴 표정으로 창밖을 보는 희나를 진혁이 가만히 자기 쪽으로 감싸 안았다.
희나는 어깨를 감싼 손을 꼭 잡으면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냥, 이제는 알 거 같다는 생각?”
“혼자 여기 있는 거 힘들었어?”
“혼자 있던 때의 기분이 전혀 생각 안 나요.”
그런 거 전부 잊어버렸어. 선생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던 그때부터.
아련하던 희나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녀는 예쁜 눈을 들어 진혁의 단정한 얼굴을 보며 경쾌해진 톤으로 화제를 돌렸다.
“헤헤헤. 나가면 어디 갈 거예요?”
“말했잖아.”
“아직 대낮인데요?”
“음, 역시 너무 이른가?”
“그렇죠, 아무래도.”
“그럼 교내라도 둘러볼래?”
교내? 희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런저런 추억이 있을 텐데, 가 보고 싶은 데 없어?”
“글쎄요, 딱히……. 선생님은 있어요?”
“난 한 달밖에 안 있어서 별로 없는데.”
3년간 꼬박꼬박 다녔지만 희나 역시 다른 추억의 장소가 떠오르진 않았다. 그때의 기억들을 떠올리면, 진혁이 있던 한 달을 빼면 전부 색이 바래 흐릿하기만 하다.
희나가 고개를 젓자 진혁은 어디 갈지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좋은 생각이 먼저 떠오른 희나가 손뼉을 치며 제안했다.
“그럼 에버랜드 갈까요?”
진혁의 단정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고양이 귀 사줄까?”
“당연한 거 아니에요? 사진도 또 찍어요.”
“그래그래.”
“이번엔 선생님도 고양이 귀 커플로 같이 해요.”
“……그건 좀 봐줘.”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식사를 마친 둘은 주변을 깔끔히 정리했다.
그리고 일어나서 나가려는데 진혁이 희나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
“왜……. 읍!”
돌아보는 순간 희나의 입술에 진혁이 진한 키스를 했다.
입술을 떼어내고 빨개진 얼굴로 토끼 눈이 되어 있는 희나를 보며 진혁은 씩 웃었다.
“그때 못 해준 거.”
흰 치아가 드러난 진혁의 미소는 상쾌했지만 홍당무가 된 희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웃는 듯한 기묘한 표정이었다.
“느끼해-! 오글오글해요! 진짜!”
희나는 앙탈을 부리며 계속 빙글빙글 웃고 있는 진혁을 막 깨물었다. 잠시 당해주던 진혁이 반격하자 희나가 뒤로 밀려났다.
그녀가 벽에 기대선 채 진혁을 올려다보자 안경 너머 긴 속눈썹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커다란 희나의 눈이 새침하게 스스르 감기고 따르듯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 겹쳐졌다.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어도 서로에게 손을 내밀 수 없었던 그때는 이미 지나간 과거가 되었다.
원하는 만큼 입을 맞추고 서로를 끌어안았다. 잔뜩 호흡과 타액을 교환한 두 사람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희나는 사랑하는 남자의 뺨을 확인하듯 꾸욱 눌렀다.
쿡쿡 웃다가 진혁은 희나의 손목을 쥐고 소중히 입을 맞췄다. 햇빛이 반사된 손의 반지가 반짝, 하고 빛났다.
눈이 부신 듯 그것을 보고 있는 희나의 귓가에 진혁이 낮게 속삭였다.
“갈까?”
“네.”
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둘은 손을 잡은 채 함께 추억에서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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