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필요한 때, 필요한 곳에서 (2)
“무슨 말인…….”
진혁은 결의에 찬 데다 긴장까지 한 희나의 모습에 당황한 얼굴이 되더니 황급히 말을 잘랐다.
“지금 하지 마.”
“……네?”
“뭔지 몰라도 지금은 하지 마.”
단호하게 말을 끊은 진혁이 희나의 몸을 잡아끌었다.
“그러지 말고 이리 와. 좀 누워 있으면 내가…….”
“중요한 말이에요!”
“하지 말라니까.”
몸을 일으키려는 그녀를 자꾸 잡아끌려 해서 희나는 팔을 확 뿌리쳤다. 그리고 입술을 앙다문 채로 진혁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저러는 건가. 또 널 위해서라든가 걱정하는 척 밀어내려고 못 들은 걸로 하고 싶은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답답해졌다. 이제 희나도 어른이고 걱정 같은 건 필요 없었다.
“할 거예요.”
“정말 고집쟁이네.”
“선생님, 나, 선생님이랑……. 읍!”
희나의 말이 중간에 턱 멈췄다. 도저히 말릴 수가 없자 진혁이 희나의 몸을 끌어당겨 안고는 입을 막아버린 것이다.
진혁이 커다란 손바닥에 덮인 희나의 얼굴을 내려 보며 물었다.
“너, 내가 놔주면 지금 하려던 말 계속할 거야?”
아예 말도 못 하게 하다니.
오기가 잔뜩 난 희나는 부아가 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진혁이 난감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더니 손을 떼어냈다.
순간 희나는 들으려는 건가 생각했지만 진혁은 그대로 몸을 일으켜버렸다.
그가 나가려 한다는 것을 깨달은 희나는 몸을 휙 일으켰다.
“도망가지 말아요!”
방금 전에 사랑을 나눴는데 등을 돌리는 건 싫다.
진혁도 맘에 많이 걸리는지 일어나지 못하고 난처한 듯 이마를 짚었다.
“……제발 오늘은 좀 참아줘.”
“왜 못 하게 하려고 해요!”
결국 섭섭함이 폭발해서 희나의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그걸 보고 깜짝 놀란 진혁이 바로 몸을 돌려 희나를 안았다.
“울지 마, 바보야.”
이미 울음이 터졌는데 이런 말에 그칠 리 없다.
희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자 진혁은 “정말 미치겠네.” 하고 중얼거렸다.
그에게선 드물게 보이는 완전히 답답해하는 표정이었다.
그게 섭섭해서 희나는 입술을 앙 깨물고 몸을 돌려 이불을 휙 뒤집어써 버렸다.
“희나야. 하아…….”
“맘대로 가버려요! 말 안 할 거니까!”
삐져서 빽 소리치자 단단한 진혁의 팔이 이불 위로 희나의 몸을 감싸 안았다.
“왜 이렇게 못 기다리는 거야. 바보가, 정말.”
잠시 뒤 희나를 꼭 끌어안은 채 토닥거리던 진혁의 가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울고 있는 와중에도 의아해진 희나는 슬쩍 이불을 걷어내고 진혁을 돌아보다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어떻게 지금 웃, 흑, 웃어요!?”
“정말 하나도 안 변했네.”
평소엔 걱정쟁이 주제에 그녀가 울고 있는데 진혁은 귀엽다는 듯 웃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희나는 마구 히끅대면서 진혁을 때렸다.
“선, 흑 선생님이야, 히끅, 말로 하나도, 흑, 안 변했잖아요. 헝어엉!”
“안 변하긴 뭐가 안 변해, 바보야. 하여튼 기다리는 건 정말 못 하네.”
진혁은 희나의 팔을 잡아 못 때리게 누르고 그녀의 뺨을 꼬집었다.
“내가 말할 때까지 조금은 기다릴 수 있잖아.”
“뭘 기다려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몰라, 바보야.”
한숨을 내쉬면서 진혁은 이번엔 희나의 입술을 쭈욱 잡아당겼다. 그리고 우스운 얼굴이 된 희나를 보며 킥킥 웃더니,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기대고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런 데서, 이렇게 말하게 하지 마, 바보야.”
“무슨 말을 해요?”
“……알잖아, 바보야.”
“이씨, 자꾸 바보라고 하지 마요!”
진혁의 손을 팍 깨물고 희나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막 울고 있었는데 눈물은 어느새 그쳐 있었다.
“진짜 알아요?”
“그래.”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요?”
“……아마도?”
진짜 아는 건가? 희나는 불안한 얼굴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확인하듯 떠보았다.
“그래 놓고 또 딴소리하는 거 아냐!”
“내가 너처럼 바보인 줄 알아?”
“이익! 내가 왜 바보예요? 진짜 바보 주제에!”
“모르는 척하면 그냥 뭔가 있겠구나 해야지, 눈치 없고, 완전 바보.”
눈치 없다는 말에 희나는 뭔가 깨달은 표정이 되었다. 진혁이 눈치 없다고만 생각했지 자기가 눈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 이상할 정도로 피해 다녔던 건, 놀라게 해주려고 했던 걸까.
“그럼…… 다 알았어요?”
“그 정도면 강아지도 눈치채겠다.”
진혁의 말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진짜 같다는 실감이 오기 시작하자 놀라 멍하니 벌어져 있던 그녀의 예쁜 입가가 스멀스멀 올라가기 시작했다.
“뭐야, 이게.”
“뭐긴, 뭐야. 하여튼 진짜 바보.”
진혁은 핀잔을 주었으나 희나는 헤헤헤 웃으면서 진혁의 목에 와락 매달렸다.
“진짜 그거 생각한 거 맞아요? 뭐 준비했어요?”
“……몰라. 말 안 해.”
“왜 삐지고 그런대. 선생님이야말로 바보죠, 진짜.”
진혁은 토라진 표정을 유지하려 했으나 희나가 계속 애교를 부려오자 굳히고 있던 입가가 하염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희나는 옆구리를 찌르고 얼굴을 비비면서 진혁을 함락시킨 뒤 그의 품에 쏙 파고들며 웃었다.
“헤헤헤헤.”
“웃지 마, 바보야.”
“헤헤헤헤헤. 나 들을 준비 됐는데.”
희나의 말에 진혁은 입을 턱 벌렸다. ‘이 상황에? 농담이지?’라고 말하는 얼굴이었다.
희나는 새침하게 눈을 흘기면서 진혁을 잡아당겼다.
“이런 데서 이렇게 말하게 하지 말라니, 무슨 소리래.”
희나의 말을 들은 진혁이 옆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를 따라 정갈한 방 안을 한번 둘러본 희나가 진혁의 몸에 얼굴을 대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방 안 가득 차 있는 그의 향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래도.”
“세상 어디가 여기보다 좋을 거 같아요?”
“…….”
“지금보다 더 기분 좋은 때가 있을 거 같아요?”
진혁은 희나를 보면서 쿡쿡 웃었다. 그리고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네.”
나직하게 동의한 진혁은 희나에게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농밀한 키스를 나누고 그녀를 어루만졌다.
한참이 지난 뒤 진혁이 그녀에게서 얼굴을 거두어들였다.
바로 코앞에서 그는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하려는 것을 짐작한 희나의 심장이 기분 좋게 뛰기 시작했다.
침을 꿀꺽 삼키는 그를 보고 희나가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무릎 꿇는 거 아니에요?”
진혁이 희나의 뺨을 살짝 깨물었다. 드물게 쑥스러운 듯 그는 얼굴마저 붉히고 있었다.
단정한 얼굴이 부드럽게 꿈에 그리던 말을 자아낸다.
“결혼하자.”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렇게나 조바심을 내고, 참을 수 없어서 재촉했는데, 그래서 바로 대답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 순간이 되자 희나는 말문이 막혔다.
벅찬 표정으로 입술을 떨며 희나가 뭐라 말을 못 하는 사이 진혁이 긴 팔을 뻗어 떨어진 옷가지를 집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금빛의 조그만 상자.
멍한 희나의 눈동자 앞에서 그것이 열리고, 반짝이는 무언가가 나오는 모습이 상을 맺었다.
아름답게 반짝이는 반지를 꺼낸 진혁은 그것을 한 손에 들고 묻는 듯한 표정으로 희나를 쳐다보았다.
그 장면에 희나는 도무지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말을 못 하고 그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눈가에 멈췄던 눈물이 다시 고였다.
진혁은 떨리는 희나의 손가락을 잡아 올려 부드럽게 반지를 끼워주었다.
별 같은 반지는 희나의 가는 손가락에 꼭 맞았다.
손가락은 경련하듯 떨렸지만 희나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그것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뭐 할 말 없어?”
한참 반지만 쳐다보는 희나의 귀에 진혁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나는 그를 쳐다보며 드디어 말을 꺼냈다.
“그럼 날짜는 언제?”
프러포즈하자마자 날 잡으려고 드는 희나의 모습에 진혁은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못 기다리는 아가씨네.”
“이제 알았어요?”
희나가 예쁘게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내가 어른이고 선생님이 학생이었으면 우린 그때부터 일사천리였을 텐데.”
“아마 넌 잡혀갔을걸.”
그렇게 말한 진혁은 희나를 마주 보고 킥킥 웃었다. 그리고 곧 온몸의 힘이 빠진 것처럼 희나의 옆에 털썩 누웠다.
커다란 일이 지나가고 나자 썰물처럼 긴장이 풀리고, 행복과 안도감이 온몸을 가득 채운다.
만족감으로 가득 찬 희나와 달리 진혁은 허탈한 듯 눈을 살짝 내리떴다.
“놀라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 중얼거림을 듣고 희나가 얼굴을 살짝 들며 눈을 빛냈다.
“선생님, 그러고 보니 뭐 준비한 거예요?”
“……몰라. 이제 말 안 해줄 거야.”
“에이, 말해줘요~!”
희나가 또다시 애교를 부리며 자꾸 파고들자 진혁이 얄미운 듯 쳐다보더니 희나의 뺨을 살짝 아프게 깨물었다.
진혁은 준비한 프러포즈를 하지 못한 앙금이 남은 듯 눈을 흘겼지만 희나는 진혁의 목에 매달려서 고양이처럼 얼굴을 비볐다.
진혁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 누운 채 희나는 반지를 스탠드 불빛에 비춰 보았다. 단아하면서 깔끔한 디자인이 진혁을 연상시켜 너무 마음에 든다. 그리고 반지는 생각보다 소박하지 않았다.
“이거 비싼 거 아니에요?”
“벌써 바가지 긁는 거야?”
희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진혁이 바로 되받았다. 그런 말을 하고 둘은 뭐가 그리 좋은 지 또 괜스레 킥킥킥 웃었다.
그리고 질리지도 않는 듯 희나는 한참 반지를 바라보면서 실실거렸다.
“헤헤헤. 애들한테 자랑해야지.”
“……뭐라고 자랑하게?”
“프러포즈 받았다고 자랑해야죠~!”
“어떻게 받았냐고 물으면?”
“그야…….”
희나가 생각하려는 듯 말을 흐리자 진혁이 먼저 말을 이었다.
“둘이 이거 하고 나서 알몸으로 프러포즈했다고 말할 거야?”
희나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굳어버렸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차마 못 했었던 티가 나는 어벙한 얼굴을 꾸욱꾸욱 찌르면서 투덜거렸다.
“이거 봐, 바보 때문에 나 정말 멋없잖아.”
“우움, 나 때문이니까 괜찮잖아요.”
“맞아, 다 너 때문이야.”
“이잇! 내 탓 하지 마요! 바보 아저씨 주제에!”
“변덕은 하여튼…….”
둘은 그렇게 투닥거리는 와중에도 쉴 새 없이 손가락을 주무르고 뺨을 꼬집고 깨물며 잠시도 서로를 가만히 두지 못했다.
그냥 눈 마주치면 웃고, 삐진 척하고, 사르르 녹고, 장난을 친다.
무드 같은 것도 없고, 서로 생각했던 것이 잘 맞아떨어지지도 않은 프러포즈.
그 서툴고 어긋나고 빗나가는 것마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
희나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면서 해맑게 웃었다.
“나 지금 너무너무너무 좋아요.”
“좋기는…….”
진혁은 툴툴거리면서도 희나의 뺨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워서 목을 움츠리면서 희나가 물었다.
“결혼식도 하는 거죠?”
“당연히 해야지.”
“내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줄 거예요?”
“음,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진혁의 대답에 희나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다정한 눈동자에는 진심만이 가득하다.
모델로 계속 살았다면, 지훈과 계속 만났다면, 흔히 세간에서 부러워하는 결혼식을 했을지 모른다.
큰 호텔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화환들을 늘어놓고, 수천 명의 하객과 여러 유명인들이 모여들고 뭐 그런 거. 어쩌면 해외에서.
그렇지만 그런 결혼식 따위 희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희나는 대신 마을 회관 같은 곳에서, 동네 사람들 모아 놓고 그 사이를 걷는 모습을 떠올렸다.
건강해진 미래한테 공주님 같은 드레스를 입히고, 맛있는 거랑 막걸리도 잔뜩 준비하는 거다.
승수 오빠랑 농촌 총각들을 위해 친구들도 잔뜩 부르고, 그리고 선생님의 친구들도 초대해야지.
희나는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민지를 떠올렸다.
그때 에버랜드에서 친해진 후 진혁을 보내고 힘들어하는 희나를 누구보다 걱정하고 위로해준 친구였다. 희나가 지방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거리가 멀어졌지만, 그래도 서울에 올라가면 꽤 자주 만났다.
선생님에게만 온 신경이 쏠려서 민지에게 말하는 걸 깜빡했네. 아마 결혼식에 초대하면 엄청 놀라겠지?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면 할수록 가슴이 설렜다.
희나가 잔뜩 부푼 표정으로 진혁을 바라보자 그가 마주 웃어주었다.
“나 바라는 거 많은데.”
“다 말해봐.”
다정한 목소리에 희나는 막 생각한 것들을 신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말없이 미소 띤 얼굴로 듣기만 하는 진혁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뭐 바라는 거 없어요? 생각해놓은 거 없어요?”
“글쎄…….”
“에이, 하고 싶었던 거 하나도 없어요?”
진혁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희나를 보고는 눈을 장난스레 빛냈다.
“다른 생각하느라 바빠서.”
“무슨 생각요?”
“이리 와.”
진혁이 희나의 몸을 돌려 폭 안았다. 곧 입술이 마주치고, 혀를 얽다가 다시 진혁은 희나의 몸을 덮었다.
킥킥거리는 소리가 숨소리가 되고, 곧 그 숨소리가 방 안을 뜨겁게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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