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 그 너머에는-124화 (124/140)

124화. 필요한 때, 필요한 곳에서 (1)

“감사합니다, 정말 고마워요.”

“뭔, 이런 걸 가지구. 미래 퇴원하면 한번 꼭 데리고 와.”

희나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깊이 숙여 이장님의 부인에게 인사했다. 조카가 입던 예인유치원의 원복을 미래에게 물려준 것에 대한 감사였다.

벌써 여름방학이 끝나 가는 무렵인데 잠시 입을 하복을 구입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미래를 유치원에 입학시켜 준 이장님이 먼저 선뜻 물려주겠다며 나선 것이다.

몇 번이고 인사하며 원복이 든 쇼핑백을 들고 이장님이 하는 철물점을 나가기 직전 희나는 눈을 들어 입구 부근에 걸린 거울을 보았다.

그리고 살짝 흐트러진 머리를 바로잡고 있으려니 뒤에서 놀러 온 마을 아주머니들이 까르르 웃었다.

“아이구, 안 해도 이뻐. 오늘은 어디 좋은 데 가나 봐?”

“아,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기는, 진혁이네 서울 가서 집 텅텅 빈 거 온 동네가 다 아는디. 둘이 이제 깨가 쏟아지겄네.”

“오호호호. 오늘 밤에 미래 동생 보는 거 아녀?”

쏟아지는 수다와 웃음소리에 희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손을 내젓고는 황급히 철물점을 나왔다. 곧 바로 앞 도로에 세워져 있는 진혁의 차가 보였다.

희나가 빨개진 얼굴로 차에 올라타자 운전석에 앉아 있던 진혁이 미소 지었다.

“무슨 이야기 들었어?”

“으으으으. 완전 놀림감이에요.”

“고생했어.”

진혁이 이해한다는 듯 희나의 머리를 토닥였다. 사실 이걸 예상해서 희나도 진혁을 차에서 기다리게 한 거였다.

그나마 희나 혼자였으니 빠져나왔지, 둘이 함께 들어갔으면 꼼짝없이 붙잡혀서 수다에 익사했을 게 뻔하니까.

쇼핑백을 받아 뒷좌석에 두고 희나의 안전벨트를 매준 진혁이 차를 부드럽게 출발시켰다.

“이제 바로 집으로 가요?”

빨개진 얼굴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희나가 조용히 물었다.

안 그래도 의식하고 있는데 놀림을 당하니 쓸데없이 더 의식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보혜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는데.

집에 가서 보혜한테 진혁이 자러 오랬다며 마구마구 자랑을 했더니 보혜가 그야말로 앉은 자리에서 1m는 날아 달려들었다.

그리고 희나를 부둥켜안고 이것은 프러포즈의 징조가 틀림없다며 유도탄이 통한 것이라고 마구 생색을 냈다.

네 말은 안 믿는다고 쏘아붙이고 나오긴 했지만 마음이 설레는 것은 희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간만에 외모에 힘도 좀 주고 나왔다.

진혁은 최근 잘 안 입던 예쁜 원피스를 차려입은 희나를 보고 미소 지었다.

“글쎄.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

“선생님, 오늘은 한가해요?”

“응. 승수한테 미래 부탁하고 왔으니까 괜찮아.”

작정하고 놀러 나온 것 같은 말에 희나의 입이 더 헤- 벌어졌다.

“진짜요? 그럼 내일은요? 내일도 놀아요?”

“해도 안 졌는데 벌써 내일 생각하는 거야?”

“헤헤헤. 선생님은 뭐 하고 싶어요?”

“글쎄…… 나는 어디든 괜찮아.”

진혁의 대답에 ‘뭔가 데이트 준비해 놓은 거 아니었나?’ 하고 희나가 뾰로통해지려는 찰나, 진혁이 말을 덧붙였다.

“그냥 둘이 같이 있으면 좋아.”

주욱 나오던 희나의 입매가 미소로 바뀌었다.

손가락으로 기다란 머리카락을 괜스레 비비 꼬면서 희나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집으로 가요.”

희나의 말에 진혁은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예쁘게 입었는데, 그냥 집으로 가도 괜찮아?”

“밖에서 데이트는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집이 빈 건 오늘만이잖아요.”

진혁이 쿡쿡 웃자 희나는 새침하게 고개를 들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나 이쁜 건 선생님만 잘 보면 돼요.”

“그러네.”

‘물론 바보 아저씨가 웃는 모습도 나만 봐야 되고’ 하고 희나는 속으로 덧붙였다.

“그래도 배고프지? 식사는 밖에서 하고 들어갈래?”

“아뇨. 집에 있는 거면 됐어요.”

“그래도……. 음, 그럼 뭐 맛있는 거 같이 해 먹을까?”

진혁의 제안에 희나는 아주 오래전 둘이서 장을 봐다가 맛난 거 해 먹었던 것을 떠올리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희나의 반응에 진혁은 기분 좋은 듯 웃으며 차를 돌렸다.

그리고 차는 15분쯤 달려 대형 마트에 닿았다.

두 사람은 둘이서 먹기에는 너무 많다 싶을 만큼 장을 본 후 과수원으로 돌아왔다. 마당에 내려선 희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늘 오는 마당이었으나 인기척이 사라지자 굉장히 다른 장소처럼 느껴진다.

항상 열려 있는 거실의 유리문이 닫혀 있는 모습이 어색했다. 비어 있다는 느낌이 확 전해졌다.

그리고 둘만이 이곳에 존재한다는 느낌도.

“들어가자.”

희나가 멍해져 있는 사이 차에서 짐을 내린 진혁이 팔을 잡아끌었다. 그 감각에 희나의 심장이 콩콩 뛰었다.

여름 낮의 날씨는 아주 더웠지만 주변에 나무가 많아서인지 집 안은 서늘했다.

두 사람은 다정하게 손을 잡은 채 주방으로 가 식재료를 손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좋은 냄새가 집 안에 풍기기 시작했다.

희나는 옆에 서서 진혁을 도왔다. 요 몇 달간 요리를 슬금슬금 배워 가는 중이었지만 오래 자취한 진혁 쪽이 아직은 한 수 위였다.

“여기 좀 잡아줄래?”

고기를 손질하며 진혁이 한쪽 뼈를 가리켰다. 희나가 고기를 잡아주자 진혁이 칼을 들어 능숙하게 뼈를 발라내었다.

그리고 고기를 치우려다 손가락이 스치자 둘이 동시에 움찔하고, 그 반응이 우스워서 곧 마주 보며 풋, 하고 웃었다.

진혁의 눈이 부드럽게 휘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아진 희나가 까치발을 들어서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위험하잖아.”

진혁이 칼을 놓고 팔을 뻗어서 희나의 허리를 감싸 안고, 마찬가지로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고기를 손질하는 낭만적이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작은 접촉으로도 두 사람은 조금씩 고조되고 있었다. 사실 시작하는 연인에게 한 달간 금욕은 너무 길다.

미래가 쓰러지고 나서 딱히 문제될 것은 없지만 마음이 껄끄러웠기에 두 사람은 의식적으로 스킨십을 피했다. 아무 말 하지 않았어도 서로의 꺼리는 기분을 눈치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미래는 건강해질 것이고 거리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리를 안은 손의 움직임이 깊어지려는 기색에 희나의 숨결도 뜨거워졌다.

진혁이 침을 꿀꺽 삼킨 후 희나의 이마에 진하게 입을 맞췄다. 키스할 거란 직감에 희나가 눈을 내리 감으려는데 진혁이 살짝 몸을 떼어냈다.

“금방 끝나니까 잠깐 기다려.”

커다란 몸이 떨어져 나가자 희나는 급격히 허전해졌다. 요리하던 도중이긴 했지만 조금 더 안겨 있고 싶었다.

희나는 나만 그런가 싶어 서운한 마음에 진혁의 안색을 살폈다. 입술을 꼭 다문 진혁의 얼굴에도 어딘지 아쉬운 기색이 진하게 묻어나 있었다.

참고 있다는 느낌이 오자 심술을 부리고 싶어졌다. 희나는 거실로 가는 척 몸을 뒤로 뺐다. 진혁은 그것을 보았지만 거실에서 쉬게 하려는 듯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희나는 거실로 가는 대신 넓은 등을 꼬옥 끌어안고 몸을 밀착시켰다.

놀란 등의 근육이 긴장하는 게 전해지는 느낌이 재밌다.

“뭐 하는 거야, 바보야.”

진혁이 내려다보자 희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샤악 웃어 주었다. 커다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복숭아 같은 흰 뺨과 윤기가 흐르는 입술이 새침하게 움직였다.

진혁이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 진짜…….”

“헤헤.”

“미치겠네.”

진혁이 손질하던 고기를 내려놓고 손을 씻었다. 손질이 끝난 건가 싶어 도마를 들여다보는데 진혁이 갑자기 희나의 팔을 잡고 빠르게 주방 밖으로 끌었다.

“왜, 왜 그래요?”

“오늘은 참으려고 했는데.”

질문에 답하는 대신 진혁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어안이 벙벙해진 희나를 데리고 널찍한 거실을 지나 방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들어오는 진혁의 방이었다.

한동안 희원에게 내줬다가, 지금은 희원이 방을 따로 마련해서 빈방이 되어 있었다. 사용하지 않았어도 방 안에선 여전히 진혁의 향기가 풍겼다.

주인을 닮은 단정한 방으로 희나를 끌어들인 진혁이 문을 닫자마자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방금 전까진 제 쪽에서 껴안고 있었던 주제에 희나는 당황해버렸다.

몇 번 안 되긴 하지만 여태까지는 항상 진혁의 작업실에서만 안겼다. 아직 주변이 밝은데, 생소한 공간에서 진한 스킨십을 나누고 있으려니 부끄러워진 것이다.

게다가 이 집은 진혁의 어머니 외에도 과수원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금방이라도 방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설 것 같은 불안함까지 밀려와 희나는 얼굴을 붉히며 진혁을 가볍게 밀어냈다.

“잠깐만요.”

“여기서 잠깐만이라고 해도 무리인데.”

그러나 진혁은 희나의 말을 듣지 않고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드물게 자제심을 잃어버린 채 몸을 덮어 오는 진혁을 다시 한 번 희나가 가볍게 잡으며 만류했다.

“저기, 잠깐만요. 나 말이에요.”

“안 들을래.”

말하려는 희나의 입술을 진혁은 막무가내로 깊이 머금었다.

너무 오래 참아온 진혁의 입술은 성급했다. 농밀하게 혀를 얽는 사이 손은 노골적으로 희나의 스커트 안쪽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희나가 빨개진 얼굴로 ‘힉!’ 하고 고개를 돌리며 눈을 꼭 감자 진혁이 뺨에 닿아 있던 입술을 떼어냈다.

“싫어?”

조르는 듯 작은 목소리로 묻는 얼굴을 보고 희나는 입을 쭉 내밀었다.

이런 건 반칙이다. 이미 흐름을 탄 이상 멈출 수 없을 거면서.

그리고 사실 멈출 수 없는 건 희나도 마찬가지였다. 벌써 그녀의 몸은 받아들일 것을 기대하듯 촉촉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희나는 대답 대신 손을 뻗어 진혁의 안경을 벗겼다. 단정한 입매가 기쁜 듯이 살짝 꼬리를 올리더니 곧 희나의 입술에 다시 겹쳐졌다.

빠른 속도로 희나의 옷이 벗겨지고, 밝은 불빛 아래 흰 나신이 드러났다.

이미 몇 번이나 보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부끄럽다. 진혁은, 이럴 때만 노골적이다.

욕망에 충실하게 움직이는 손에 몸을 맡긴 채 희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이끌려가기만 하는 것이 분해서 뭔가를 하고 싶었지만 이때만은 저돌적인 희나도 얌전해졌다.

희나가 무엇을 할 필요도 없이 진혁은 이미 흥분해 있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진혁이 옷을 벗기 시작하자 줄곧 부끄러워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희나가 눈을 말똥말똥하게 떴다. 그리고 드러난 넓은 어깨와 단련된 몸을 흐뭇하게 감상하고 있는데, 그걸 발견한 진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엉큼하네, 조그만 게.”

“뭐가 엉큼해요. 자기는 맘대로 다 하고!”

“난 원래 엉큼하고.”

진혁은 유들유들 웃으며 희나의 풍만한 가슴을 감싸 쥐었다.

노골적인 행위에 들어가자 희나는 다시 얼굴이 빨개져서 나긋나긋해졌다. 느긋하게 말하던 진혁도 여유가 없는지 빠르게 몸을 겹쳐 왔다. 곧 희나의 몸이 진혁을 받아들였다.

강한 압박감에 희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진혁의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조금만 지나면 극상의 쾌감을 맛보긴 하지만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더 걸리지 싶다.

입술과 몸이 깊숙이 맞물릴 때마다 희나는 달뜬 숨을 내뱉으며 계속 생각했다.

이대로 언제까지나 이어져 있으면 좋겠다고.

나를 언제까지나 당신의 것으로 만들어 달라, 말하고 싶다.

말하지 않고 묻어두려 했던 말이 자꾸자꾸 입 밖으로 나오려고 했다.

누가 먼저든, 그런 거 이제 상관없었다.

“사랑해. 사랑해, 희나야.”

귓가에서 무의식처럼 진혁이 계속 속삭이는 말도 희나를 더욱 안타깝게만 만들었다.

희나는 팔을 들어 올려 살짝 붉어진 진혁의 흰 목덜미를 꼬옥 끌어안았다.

해가 완전히 질 무렵에야 진혁은 희나를 놓아주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데다 완전히 녹초가 되어 희나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운도 없었다.

한동안 그녀를 안은 채 숨을 고르던 진혁이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

감정적이 된 데다가 축 늘어진 얼굴을 쓰다듬으며 물어오는 얼굴이 너무 다정해서 그녀는 괜히 울컥했다.

너무 사랑해서 감당할 수 없는 기분이 솟구쳐 올라 희나는 눈을 꼭 감았다.

“많이 힘들어? 배도 고플 텐데…….”

“괜찮아요.”

“뭐 먹을 거 가져다줄까?”

희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진혁의 팔에 매달렸다. 진혁은 다시 누웠다가 희나의 이불을 고쳐주려는 듯 다시 일어났지만 희나에게 제지당했다.

조금도 떨어지기 싫은 듯 아기 고양이처럼 팔에 매달려 있는 희나를 보고 진혁은 미소를 짓더니 이마에 입을 맞췄다.

소중하게 다루는 작은 동작 하나하나에서 깊은 마음이 느껴졌다.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니, 더는 아무것도 기다리고 싶지 않다.

희나는 가만히 눈을 들어서 달력을 보았다. 얼마 안 가서 8월도 마지막이다.

달라지는 게 없을 거라 믿어도 이대로 방학이 끝나는 것은 싫었다.

그녀는 확실한 것을 원했고,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희나는 결심한 듯 내리감고 있던 눈을 뜨고 진지한 목소리로 진혁을 불렀다.

“선생님.”

“응?”

방금 전까지 찰싹 달라붙어 있더니 표정이 싹 변해서 일어나 앉은 희나를 보고 진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 할 말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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