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유도탄 (4)
“언니, 병원에 가는 거예요?”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고 있는 희나를 보며 보혜가 물었다.
“그래, 가봐야지.”
“지금은 그냥 안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뭐가 옳든 이제 네가 하는 말은 안 들을 거야.”
희나의 냉랭한 말에 보혜는 깨갱하며 물러났다. 유도탄이 영 결과가 좋지 않았던 관계로 보혜의 발언권은 격하되어 있었다.
4일 전, 그렇게 병원을 뛰어나오고 나서 집에서 24콤보로 이불 킥을 시전한 희나는 보혜에게 원망을 마구 쏟아냈다.
그리고 다음 날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서 미래만 보고 오자는 마음으로 병원에 갔다.
그런데 단단히 각오를 하고 가보니 막상 왕바보 아저씨는 교수님이 불렀다며 병원에 오지도 않았다.
희나는 차라리 없어서 잘됐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기분이 묘했다. 전날 내내 진혁으로부터 연락이 없었기 때문이다.
화내고 가버린 저를 모른 척할 성격이 아닌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경이 복잡했으나 희나도 그날은 그냥 바쁜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어차피 얼굴을 마주치면 몰려오는 이불 킥 욕구에 버틸 수가 없을 테니 잘됐다고 위안하면서.
그러나 다음 날, 이번에는 진혁이 희나가 오는 시간에 자리를 비워서 만나지 못했다.
거기까진 우연이 겹쳐서라고 납득하려 애썼으나 그 다음 날도 진혁을 만나지 못하자 희나도 심상치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3일간 얼굴 한 번 보지 못하다니, 방학이 되고 나서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틈나는 대로 보내오던 연락도 뚝 끊겼다.
고집 부리면서 가출했을 때도 매일 찾아왔던 사람인데 말이다.
이렇게 되자 희나는 진혁의 행동에 섭섭한 것보다 불안함이 훨씬 커졌다.
‘역시 툭하면 뛰어나가니까 화난 걸까?’
입장 바꿔서 천천히 생각해보면 진혁으로선 희나가 왜 이렇게 감정 기복이 심해졌는지 어리둥절할 법도 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희나는 신발 끈을 매다 말고 한숨을 폭 내쉬며 중얼거렸다.
“진짜 무슨 일 있는 건가. 왜 연락이 없지…….”
“아직도 안 왔어요?”
그녀의 말에 찌그러져 있던 보혜가 뒤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희나는 보혜를 무시하던 것도 잊은 채 순순히 대답했다.
“응. 이거 뭐 버릇 고치려는 거라든가 그런 걸까?”
“글쎄요, 진혁 오빠가 그런 성격은 아닐 거 같은데…….”
“그럼 뭐지. 잉……. 내가 너무 애매하게 굴었나?”
“그 정도면 충분히 돌직구 같은데요. 그때 당시에는 눈치 못 챘더라도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깨달을 법도 하지 않아요?”
“그런가, 그럼 나 까인 건가?”
보혜는 잠시 말이 없다가 무릎걸음으로 희나에게 다가오더니 어깨를 토닥였다.
“언니, 괜찮아요? 언니는 예쁘니까 기회가 많을 거예요. 힝…….”
이미 수없는 이불 킥으로 이불이 두 토막 나기 직전이지만 그래도 희나는 신경 안 쓰는 쿨한 여자로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그렇지 않음을 아는 보혜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진혁 오빠도 나중에 분명히 후회하실…….”
“으아아악! 불쌍하게 보지 말라고! 동정하지 마!”
결국 폭발해버린 희나는 보혜를 마구 구박한 뒤 아슬아슬한 시간이 되어서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 병원으로 향했다.
***
“왔어?”
병실 앞에 다다르자 다정한 목소리가 희나를 반겼다. 변함없이 웃고 있는 그를 보자 희나는 눈물이 확 쏟아질 뻔했다.
“선생님, 언제 왔어요?”
“아까부터 와 있었어. 많이 덥지.”
진혁은 희나를 에어컨 바람이 잘 닿는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태도가 아주 자연스러워서 마치 그간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다.
“미래 보러 온 거지?”
“그렇죠. 근데 그동안 마, 많이 바빴어요?”
“응, 일이 좀 있어서. 미안.”
그러면서 진혁은 아무렇지 않게 흰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그간 불안했고 서운한 것도 잔뜩 쌓였는데, 저 미소를 보니 희나는 화내고 싶었던 마음이 살살 녹아버렸다.
계속 불편하던 마음도 안심이 푹 되는 걸 보니 그 짧은 사이에도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새삼 느껴졌다.
그런 마음을 담아서 진혁의 손을 찾아 꼬옥 잡자 희나는 그냥 유도탄이고 뭐고 괜한 짓 하지 말고 솔직해질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어떤 이유든 잠시라도 떨어져 있는 것은 싫었다.
아무렇지 않게 대해줘서 다행이다, 어색하지 않은 걸로 만족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희나가 가만히 서 있는데 진혁이 잡은 손을 살짝 잡아당기며 물었다.
“이제 면회 시간 됐는데 안 들어가?”
“가요. 근데…….”
“근데 뭐?”
“선생님 또 나가 봐야 돼요?”
희나가 아기 새처럼 바라보며 묻자 진혁이 킥킥 웃었다.
“아니, 오늘은 여기 있을 거야.”
“그럼 나 나와도 계속 있어요?”
“응. 안 그래도 좀 할 얘기도 있고.”
진혁의 말에 희나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에 그냥 어색하지 않은 걸로 좋다고 생각했었으면서도 할 얘기가 있다는 말을 들으니 어쩔 수 없는 기대가 솟아올라 얼굴이 괜스레 붉어졌다.
“할 얘기요? 무슨 얘긴데요?”
희나는 최대한 무심함을 가장해서 물었다.
“좀 있다 얘기하자. 갔다 와. 난 잠깐 승수한테 다녀올게.”
하지만 진혁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가장이 아니라 진짜 무심한 말투여서 희나는 다시 차게 식었다. 그래도 혹시나, 혹시나 하는 생각에 머릿속의 피는 여전히 빠르게 돌고 있었다.
그 탓에 희나는 병실에 들어가긴 했지만 미래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도 모른 채 30분이 빠르게 지나갔다.
평소보다 후다닥 나와서 진혁을 찾아보았으나 아직 승수의 병실에 있는지 그는 복도에 없었다. 꺼 두었던 휴대폰 전원을 켜 보니 진혁에게서 카톡이 도착해 있었다.
「입구로 와.」
보자마자 생각할 것도 없이 희나는 날듯이 입구로 달려갔다.
정문 앞에 차분하게 서 있던 진혁은 어마어마한 기세로 다가오는 희나를 보더니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데…….”
“할 얘기가 뭐예요?”
너무나 궁금했던 희나는 그를 보자마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진혁은 바로 말을 꺼내는 대신 뺨을 살짝 긁적이더니 희나를 잡아끌었다.
“카페테리아로 가자.”
그렇게 둘은 함께 병원의 카페테리아로 갔다.
마주 앉아서 진혁의 얼굴을 본 희나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진혁의 얼굴도 살짝 상기되어 있고, 어딘지 기쁜 듯 보이는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희나가 잔뜩 기대에 부풀어서 기다리는데 드디어 그가 말을 시작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정말 오랫동안…….”
그러면서 그가 테이블에 올려진 희나의 손을 잡았다.
희나는 계속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어서 이야기해보라는 듯 그를 열심히 바라보았다.
진혁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까 의사 선생님이랑 이야기 나눴는데, 미래가 슬슬 격리 병동으로 가도 될 거 같다고 하셨어. 퇴원은 아직 무리지만, 아마 내일쯤 옮기게 될 거야.”
“네?”
“이제 안심해도 될 거래.”
예상과 다른 말이 나오자 희나의 입가가 갈 곳을 잃고 어중간하게 움직였다.
“그러니까 이제 전처럼 네가 고생할 일은 없을 거야. 미래 걱정도 더 이상 안 해도 돼.”
“…….”
“왜 그래?”
뛸 듯이 기뻐할 줄 알았던 희나가 멍하니 있자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나는 그제야 화들짝 현실로 돌아와서 허둥지둥 대답했다.
“아, 아녜요. 그, 그러면 미래가, 어…… 그러니까.”
“이제 좀 있으면 건강해질 거래. 조금만 더 지나면 다른 아이들과 다를 게 없을 거라고 말씀하시더라.”
진혁이 기쁜 어조로 말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희나도 건강해진 미래의 모습을 떠올리자 며칠간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프러포즈 같은 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희나는 기쁨을 누르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서 진혁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있었기에 약간 엉거주춤한 자세였지만, 진혁은 미소를 지으며 희나를 마주 안아 주었다.
얼마간 그러고 있던 희나는 주문한 음료가 나왔음을 알리는 진동 벨이 울리자 진혁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두 사람은 음료수를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인유치원도 이장님이 어찌어찌 연줄을 대서 들어가게 해주시겠대. 미래가 아주 좋아하겠지?”
“헤헤. 원복 사러 가야겠네요. 엄청 귀엽던데.”
“미래가 정말 좋아하겠어.”
“네. 지금도 귀엽지만 미래는 살 좀 찌면 진짜 예쁠 거예요. 어머니한테 요리도 배워서 맛있는 거 많이 해줘야지.”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희나를 보고 진혁은 기쁜 듯 웃었다. 그간 못 봐서 섭섭하던 것도 잊고 신나게 수다를 떨던 희나는 진혁이 시계를 확인하는 것을 보고 말을 멈췄다.
“선생님 들어가 봐야 돼요?”
“아니, 아직은 괜찮아. 그보다 할 말이 더 있는데…….”
“뭔데요?”
진혁은 검지로 테이블을 톡톡 두들기면서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게, 내일 어머니가 볼일이 있어서 서울에 좀 다녀오신대. 아마 모레 오실 거 같아.”
“그래요? 무슨 일이요?”
“그냥 이런저런…….”
진혁은 똑바로 말을 하지 못하고 끝을 흐렸지만 희나는 그냥 그런가 보다 생각하며 넘겼다.
진혁이 잠깐 텀을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희원이도 모셔다 드릴 겸 같이 서울 가서 자기 볼일 좀 보고 짐도 챙겨 오겠대.”
“그래요…….”
내용 자체는 별 얘기 아닌데 진혁은 묘한 표정을 지은 채 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챈 희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그렇게 봐요? 뭐 할 이야기 있어요?”
“응, 그러니까…….”
진혁이 주변에 누가 듣는 사람이 없는지 흘긋 살피고는 그녀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내일 자고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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