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유도탄 (3)
“그래요. 얼른 프러포즈하라고 신호를 주는 거죠.”
하지 말라고 반대하는 말에는 내내 심드렁하던 희나가 그 말에는 솔깃했다.
희나가 흥미를 보이자 보혜가 신이 나서 꼬시기 시작했다.
“생각해봐요, 언니. 언니가 먼저 하면 프러포즈 받을 기회를 놓치는 거란 말이에요.”
“괜찮은데…….”
“진혁 오빠가 멋지게 차려입고, 꽃다발 들고 반지 딱 주면서 그 멋진 목소리로 희나야, 결혼하자! 하는 거 안 듣고 싶어요? 진짜?”
희나의 머릿속에 보혜가 말한 시추에이션이 그대로 사악 그려졌다.
입을 헤 벌리고 발그레하니 상상을 하던 희나가 말했다.
“어떻게 유도할지 가르쳐줘.”
뜻을 이룬 보혜가 희나에게 이리 오란 듯 까딱까딱 손짓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희나의 눈물겨운 유도탄 플랜이 시작되었다.
***
다음 날.
희나는 밤새 흥청망청 마신 탓에 부석부석해진 얼굴로 병원에 갔다. 짧은 면회 시간이라도 미래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환자실에 도착하니 미래의 병상은 비어 있었다. 간호사가 검사할 것이 있어서 나갔다고 가르쳐 주었다.
희나가 휘적휘적 검사실 앞으로 가니 진혁이 대기석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를 보자마자 긴장이 돼서 희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조심스레 다가가자 진혁이 희나를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일찍 왔네?”
“네…….”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서 희나는 작게 대답하고 얼른 그의 옆에 가서 앉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데 진혁이 살짝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어제 한 이야기 말인데, 내가 좀 생각해봤거든.”
“무슨 생각요?”
“그, 같이 살자던 거 있잖아.”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 희나는 숨마저 죽이면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생각해보니까 준비해야 할 것이 좀 많더라고. 당장 어디서 어떻게 지낼지 서로 상의해봐야 하지 싶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하나하나 현실적인 문제들을 지적하는 진혁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질수록 희나의 얼굴은 뾰로통해졌다.
아니, 그런 구체적인 건 됐으니까, 천천히 정해도 괜찮으니까, 그 전에 먼저 치를 걸 치르자고!
“그래서 말인데, 내 생각엔 우선…….”
“아, 제가 먼저 할 말이 있어요.”
세부적 논의로 그냥 넘어가 버릴 것 같아서 희나는 선수를 치기로 하고 말을 가로챘다. 그리고 밤새 보혜와 장전한 유도탄들 중 첫 번째 신호를 던져 보기로 했다.
“그냥 사귀기만 하는데 같이 살면 이상하지 않을까요?”
“응?”
“집이 따로 있고 그때그때 같이 있는 거랑 아예 들어가서 계속 같이 사는 건 다르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희나는 딱 자르고 새침하게 앉아 있었다. 진혁은 하룻밤 새 갑자기 태도가 확 달라진 희나의 모습에 혼란스러운 듯했다.
희나가 아무 말 없이 뻣뻣하게 있자 그는 희나의 의중을 가늠하려 애쓰는가 싶더니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그냥 기숙사에 있으려고?”
“글쎄요, 뭐…….”
희나가 슬쩍 진혁의 안색을 살피니 어째 그녀가 같이 사는 걸 꺼려한다고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말을 어떻게 고칠까 생각하고 있는데 진혁이 실망한 기색으로 읊조렸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
“같이 있고 싶은데.”
아쉬워하는 말과 아련한 표정에 희나는 하마터면 코피를 쏟을 뻔했다. 갑자기 이렇게 심장에 안 좋은 소리를 하다니.
‘같이 살아요! 같이!’라고 마구 외치고 싶은 걸 꾹 눌러 담으며 희나는 다시 떠보았다.
“뭐, 그렇잖아요. 안 될 것도 없지만, 굳이, 뭐, 뭐 같이 살 이유가 뭐 있으면 몰라도요. 그쵸?”
“음…….”
“생각해보면 희원이도 있고 같이 살 이유도 있는 거 같은데, 막 확신이 없네요. 들어갔다가 막, 막, 그러니까…… 뭐 확신 같은 게 있으면 몰라도.”
확신에 힘을 주어 말할수록 희나는 점점 스스로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자기가 말하면서도 이게 프러포즈를 하란 유도탄인지 그냥 우주 대폭발 슛인지 분간이 안 갔다.
그런 생각을 증명하듯 진혁의 얼굴은 복잡 미묘했다. 그러다 고심한 끝에 나온 말이 희나를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그래, 그럼 우선 잘 생각해본 다음에 이야기해줘.”
으으, 이게 아닌데. 보혜가 말해 준 대로 잘되질 않아서 희나는 허둥지둥했다.
그러는 사이 운이 나쁘게도 검사실 문이 활짝 열렸다.
“유미래 양 보호자 계신가요?”
“아, 여기 있습니다.”
진혁이 얼른 대답하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검사는 잘 끝났고, 한 시간 정도 후에 깨어날 겁니다. 경과가 좋네요.”
“네, 감사합니다.”
그 외에 이런저런 설명을 해준 뒤 의사는 진료실로 돌아갔다.
진혁이 희나를 돌아보며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이야기 도중에 미안해. 들어가 봐야겠어. 바로 집으로 갈 거야?”
“아, 네.”
“그래. 그럼 주차장까지 데려다줄게.”
간호사에게 아직 자고 있는 미래를 맡긴 진혁이 선뜻 말했다.
함께 주차장으로 향하며 희나는 자신을 마구 쥐어박고 싶어졌다. 방금 전에 한 대화의 민망함이 벌써 몰려왔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헛발질을 해놓고 그냥 돌아가면 진짜 하루 종일 이불 킥을 할 것 같았다.
초조하게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안절부절못하는 희나를 보고 진혁이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어? 아니, 그게…….”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희나가 우물거렸다.
“손가락이 쪼끔, 막, 간질간질한 거 같아요. 허전하기도 하고…….”
“그래?”
진혁이 단정하게 미소를 짓더니 손을 내밀었다.
희나가 뭘 하나 두근두근하고 지켜보는데 그녀의 손을 끌어 깍지를 꼈다.
“이제 괜찮아?”
“…….”
희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으으으으, 이 둔탱이 아저씨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막상 깍지를 끼니 너무 좋아서 떼어내지는 못했다.
희나는 볼을 잔뜩 부풀리고 뚱하면서도 손은 은근슬쩍 계속 깍지를 풀지 않았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으론 심란했다.
에휴, 어쩌지, 하고 자괴감에 빠져 있는 사이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에 올라타는 척하고 진혁을 보낸 희나는 승수의 병실로 향했다. 이대로 돌아가면 스스로 벌인 짓이 민망해서 과수원 나무들에 머리를 헤딩할 것 같았다.
“엥? 올 거 없다니까, 자꾸 오네?”
“아흐으으으……. 오빠 나 어떻게 해요!”
희나는 침대 옆에 풀썩 엎드린 채 승수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푸핫, 윽! 으흐르흐흐흐흙흙! 끄아아아악! 캭캭캭!”
희나의 허술한 실패담을 들은 승수가 폭소를 쏟아내다 수술 부위를 부여잡았다. 아파서 기괴한 소리를 내면서도 승수는 한동안 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으씨! 그만 좀 웃어요! 안 그래도 화나는데!”
“웃기잖아, 바보야! 그런 신호를 어떻게 알아먹냐! 하여간 여자들이란.”
“그걸 모르는 게 더 이상하거든요? 이만하면 좀 알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독심술사인 줄 알아? 네가 상대방 입장에서 좀 생각해봐라.”
선생님 입장? 희나는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
“바보 아저씨가 무슨 생각 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너도 모르면서 진혁이는 어떻게 아냐?”
“이익! 알기 쉽게 행동하고 있잖아요!”
“그게 너나 알기 쉽지, 바보야. 넌 이제 사귄 지 2~3달 된 데다 일곱 살이나 어린 대학생 여친이잖아. 보통 남자라면 청혼 같은 거 생각할 단계가 아니라고.”
희나는 찔끔했지만 곧 기죽지 않고 항변했다.
“그치만, 그치만 미래도 보고 집안일도 같이 하잖아요. 보통이랑 다르다구요!”
“뭐, 것도 그렇지만……. 오히려 저쪽에선 네가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배려 아냐? 이런 경우 여자 쪽이 결혼하기 싫어하는 게 보통이니까.”
맞는 말이지만 희나는 짜증만 더 치밀어 올랐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놈의 졸업! 졸업이란 단어에 학을 뗄 지경이었다.
잔뜩 부아가 나 있는 희나의 머리를 승수가 토닥거리며 달랬다.
“그러지 말고 어지간하면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지 그래? 너를 위해서도 그게 좋을 텐데.”
“싫어욧, 그놈의 졸업! 난 기다리는 거 이제 지긋지긋하단 말이에요. 맘도 몰라주고 확 도망가 버릴까 부다.”
삐진 희나를 보고 승수가 이죽거렸다.
“좋아 죽으면서 도망은 무슨.”
“이이이이이잉……. 짜증 나. 왜 내 맘대로 안 되는 거야.”
대놓고 짜증 내면서 침대에 몸을 비벼대는 희나를 승수가 잡아서 일으켰다. 그리고 이마에 딱밤을 턱 먹이며 말했다.
“그럼 차라리 그냥 돌직구를 던지든가.”
“돌직구요?”
“그래. 프러포즈 받고 싶다고 한 방에 알아먹게 말을 해버리라고.”
“그럼 그냥 내가 프러포즈하는 거랑 별다를 거 없잖아요.”
“지금도 딱히 다를 거 없거든? 하여튼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빨리 사라져. 솔로가 니들 사랑싸움이나 들어야겠냐!”
그렇게 희나는 승수에게 등 떠밀려 쫓겨났다.
이쯤에서 돌아가서 얌전히 이불 킥을 하는 게 나을 법한데, 유감스럽게도 희나는 어렸을 때부터 칼을 뽑으면 무라도 썰지 않으면 안 되는 성격이었다.
마구 서성이다가 희나는 결국 순순히 돌아가지 못하고 중환자실이 있는 병동에 발을 들이고야 말았다.
중환자실 앞에 도착해보니 미래와 진혁이 보였다. 미래는 아직 비몽사몽인 듯 멍했고, 그 옆에서 진혁이 미소를 지으며 뭔가 말을 걸고 있었다. 처음에는 진혁을 불러달라고 할 생각이었지만, 희나는 그냥 안쪽을 응시했다.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희나는 앞으로에 대해서 생각했다.
아까 경과가 좋다고 했으니 이제 일반 병동으로 갈 거고, 그럼 며칠 후면 퇴원이다.
미래가 어려서 보호자가 24시간 대기해야 해 건강해진 미래는 어머니가 도맡아 기르겠다고 했으니 선생님하고 난 학업으로 돌아가면 된다. 다 잘된 거다.
‘내가 욕심 부리는 건가.’
몇 주 전까지만 해도 희나는 미래만 건강해진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이루어지자 이젠 다른 바람이 마음 한구석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희나는 자꾸만 조급해졌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프러포즈 받는 건 아주 먼 훗날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또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 싫어서.
희나는 창밖에 서 있는 자신이 답답했다. 저 안에 들어가서 같이 서 있고 싶었다. 미래의 손도 잡아주고, 진혁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서글퍼졌다.
한참을 하염없이 안을 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 진혁이 고개를 들다가 희나와 눈이 마주쳤다.
하얀 얼굴이 놀란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곧 밖으로 걸어 나왔다.
“무슨 일이야? 왜 다시 왔어?”
“선생님, 나…….”
“응.”
희나는 창문 쪽을 보고 있던 시선을 돌려 진혁을 보았다.
“창문 밖에서 계속 기다렸어요.”
희나의 나직한 말에 진혁이 마음 아픈 표정을 짓더니 어깨를 토닥이며 희나를 달랬다.
“미안. 내가 너무 늦게 눈치챘나 보네.”
“…….”
그녀를 계속 보듬으려던 진혁은 평소라면 벌써 헤실헤실 웃으면서 쳐다보았을 희나가 묵묵히 있자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왜 그래? 아까부터 이상하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완전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요.”
“응?”
“나도 들어갈 수 있잖아요, 저기에.”
진혁이 무슨 말이냐는 듯 묻는 얼굴로 희나를 보았다.
눈을 아주 천천히 세 번 깜빡이고 나서야 진혁이 뭔가 눈치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표정이 난감함으로 바뀌자 희나는 드디어 폭발해버렸다.
“에이, 나도 몰라요. 바보 아저씨! 답답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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