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유도탄 (2)
“어? 그거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야…….”
그제야 진혁도 질문에 숨은 의미가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마지막 말을 조금 흐렸다. 이왕 어색해진 김에 희나는 확 단도직입적으로 질러버렸다.
“선생님은 뭐 할 말 없어요?”
곧 진혁의 얼굴이 살짝 발갛게 물들었다.
그는 난감한 듯 입술을 깨물더니 주변을 살폈다.
“어, 지금 할 이야기는 아닌 거 같네. 나중에…….”
“나중에 같은 거 싫어요. 지금 말해줘요.”
희나가 조르듯 진혁의 팔에 매달리자 그는 한숨을 작게 쉬더니 희나와 함께 자판기 옆 벤치에 앉았다.
3~4m 떨어진 곳에 노인들이나 문병객들이 옹기종기 나와 있었는데 이쪽을 힐끔힐끔 보는 듯했다.
진혁은 그쪽을 힐끔 쳐다보더니 희나의 어깨를 긴 팔로 폭 감싸 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희나에게만 들리도록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같이 살까?”
뜨거운 날씨보다 훨씬 뜨겁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이 말을 듣고 나니 그제야 희나는 아, 진짜 이런 데서 지금 할 얘기는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확 들었다. 목가적인 병원 정원에서 아이를 보러 중환자실에 가던 도중에 할 얘긴 전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미 들어버렸다. 그동안 그렇게나 진혁의 집에 쳐들어와 댔지만 그가 먼저 같이 살자든가 하는 말을 한 적은 없다.
얼굴이 확 달아오른 희나는 당장 고개를 수백 번 끄덕이려다가 멈칫했다.
같이 살면? 그냥 같이 살기만 하는 건가. 희나는 빨개진 얼굴로 더듬거리며 수줍게 물었다.
“서, 선생님은 나랑 같이 있고 싶어요?”
“당연하지, 바보야.”
진혁은 픽 웃으며 희나의 뺨을 꼬집었다. 희나는 기뻐서 활짝 웃으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그치만 어, 어쩌죠? 어떻게 같이 살아요?”
“그러게…….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현실적인 문제로 들어가자 두 초보 연인은 멍해졌다. 잘 생각해본 적도 없는 주제에 서로 엄청난 말을 주고받아 버린 것이다.
그냥 음료수 마시면서 시간 때우려고 꺼내기엔 화제가 너무 무거웠다.
서로 얼굴도 마주치지 못하고 빨개진 채로 앉아 있으니 건너편의 할머니들이 수군거리면서 히죽히죽 웃는 게 보였다.
너무 부끄럽고 어색해서 목이 탄 희나는 음료수를 벌컥벌컥 원 샷 하고 캔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아, 다 마셨다! 여, 역시 이건 나중에 얘기하는 게 좋겠네요.”
“어? 어, 어, 그런 거 같네. 뭐, 천천히 생각해볼까?”
“네. 아, 너무 덥다. 선생님 나 먼저 들어갈게요.”
희나는 끝까지 진혁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뻣뻣하게 말한 뒤 후다닥 병동으로 돌아왔다.
심상치 않은 희나의 표정을 보고 승수와 희원이 무슨 일이냐 물었지만, 희나는 급한 볼일이 생각났다고 더듬거리며 말한 뒤 병실을 나섰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진정이 되질 않아서 누구와도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차에 올라탄 그녀는 핸들에 머리를 묻은 채 방금 전 상황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같이 사는 건가?’
그건 생각만 해도 기쁜 일이었다. 물론 그녀가 옆구리 찌르긴 했지만 진혁이 먼저 말해주었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나 쿵쿵 뛰던 심장은 이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번에 같이 살게 되면, 그 다음은? 그냥 흐지부지 저 나중으로 흘러가 버리는 거 아닐까?’
같이 사는 건 물론 좋았다. 그치만 희나는 그냥 같이 사는 거 말고, 뭔가 더 있었으면 싶었다.
어느덧 방학은 거의 끝나간다. 모든 상황은 또다시 변한다.
미래는 퇴원해서 건강해질 거고, 그렇게 되면 진혁의 어머니 혼자서도 충분히 돌볼 수 있었다.
희나는 학교생활을 해야 되고, 진혁은 대학원에 진학해야 한다. 지금처럼 하루 종일 보고 싶을 때 볼 수는 없게 되는 것이다.
그 전에 변하지 않는 걸 만들어두고 싶었다.
희나는 조바심이 났다. 무엇이 변해도 둘은 언제까지나 함께라는 확신과 약속이 필요했다. 그게 없는 것은 싫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다시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희나는, 진혁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다가 화들짝 놀랐다. 차창 밖에서 누군가 희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진혁의 어머니였다.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핸들에 엎드려 있어서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희나는 붉은 뺨을 문지르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잠깐 졸았어요.”
“괜찮은 거 맞아? 얼굴이 많이 빨간데.”
“괜찮아요! 집에 들어가세요?”
희나가 생기 있게 고개를 끄덕이자 진혁의 어머니는 조금 안심한 얼굴이 되었다.
“아니, 오후에 손님들이 병원으로 오신대서 좀 있다 갈 거야. 희나는 바로 집으로 가니?”
“아, 아뇨. 기숙사에 좀…….”
“그래? 그럼 저녁은 집에서 먹을 거야?”
희나는 금방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이렇게 복잡하고, 아직 뭐 하나 정해지지 않았는데 집에서 진혁을 기다릴 자신이 없었다.
희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작게 말했다.
“저기 오늘은…… 친구 만나느라 좀 늦을 거 같아요.”
“에고, 친구 만나? 가만있어봐라.”
진혁의 어머니는 손가방을 주섬주섬 뒤적이더니 지갑을 꺼냈다.
“어? 아니에요, 어머니. 괜찮아요.”
“됐으니까, 받아. 도와준 게 있는데 이 정도는 좀 받아. 나도 마음 편하게.”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차마 더 사양할 수가 없어 희나는 5만 원짜리 한 장을 감사하게 받았다.
꾸벅 인사를 하고 희나는 차를 달려 과수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주차한 뒤 기숙사로 향했다.
***
“……나 없으면 맨날 이러는 거야?”
희나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헤헤헤. 누나, 왔어요?”
“와, 희나 언니 오랜만!”
“희나 너 얼굴 보기 너무 힘든 거 아냐?”
간만에 돌아온 기숙사 방은 희나의 동아리원들의 아지트가 되어 있었다.
방을 점령하고 있던 보혜, 은영, 도한은 방 주인이 왔는데도 당황한 기색도 없이 태평하게 인사를 건넸다.
희나가 어이없는 얼굴로 말없이 서 있자 침대에 떡하니 자리잡고 맥주를 마시고 있던 도한이 느물느물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지 말고 앉아요. 은영 누나가 룸메들 다 방학이라 집에 가고 누나도 없다고 심심하대서 우리가 놀러 와준 거라구요!”
“거짓말 마! 하루 이틀 있었던 게 아닌 거 같은데!”
“에이, 에이- 얼른 와서 앉으라니까.”
진혁의 어머니에게 친구를 만날 거라 둘러대고 왔지만 정말 만날 계획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내 비워뒀던 방에 친구 좀 불러서 논다고 화내고 있을 수만도 없어 희나는 한숨을 쉬며 체념했다.
침대로 가서 털썩 주저앉은 희나에게 도한이 맥주 캔을 내밀었다.
“한잔할래요?”
“됐……. 아니, 그냥 한잔 줘.”
희나는 맥주를 받아 마셨다. 지금은 맨정신보다는 취기가 더 나을 것 같아서였다.
홀짝홀짝 맥주를 마시면서 희나는 아까까지 하던 생각을 다시 이어갔다. 진혁에게 해야 할 말에 대해서 말이다.
처음에는 자기들끼리 대화에 빠져 있던 도한이 희나가 계속 말이 없자 그녀의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으며 물었다.
“누나, 무슨 일 있어요? 왜 이렇게 멍하대.”
“…….”
“누나!”
“어? 어?”
부르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던 희나는 도한이 어깨를 잡아 흔들자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났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불러도 눈치를 못 채요?”
“어, 그게 있잖아…….”
방금 전까지 하고 있던 생각을 떠올린 희나는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단숨에 말했다.
“프, 프러포즈는 어떻게 해야 되지?”
“꺄앗, 프러포즈요?”
“벌써?”
“아직 학생인데?!”
보혜가 양 뺨을 부여잡으며 소리치는 걸 필두로 은영과 도한도 입을 떡 벌렸다.
“거기다 받는 게 아니고 한다고요? 왜? 형님이 생각 없으시대요?”
“몰라, 있는지 없는지.”
희나는 눈을 굴리며 생각해보았다. 매일매일 미래를 보고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있다.
진혁도 학생이고 희나 역시 아직 대학교 2학년에, 스물셋. 그녀 스스로도 아직 그런 걸 생각하기엔 빠르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는 5년 전에도 ‘때’를 기다렸던 남자니까 아마 아직 이르다고 생각할 거다.
그러나 그때도 지금도 희나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둘이 이렇게 좋아하는데,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빨리 그의 여자가 돼버리고 싶은 거다.
방황은 이미 충분히 오래 했으니 어딘가의 울타리에 속해 살아가고 싶었다.
은영이 입을 주욱 내밀면서 말했다.
“모르면 그냥 할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거 아니야? 굳이 먼저 할 필요는 없잖아.”
“그치만 내가 못 기다리겠어.”
희나는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씩 웃었다.
셋은 입을 허탈하게 벌린 채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우와, 대박이다…….”
“난 가끔 누나 머릿속이 궁금해. 생긴 건 다이아몬드 반지 샤넬 백에 담아 와야 받아줄락 말락 하게 생겨 가지고.”
“그러게. 진짜진짜진짜 좋아하나 보네요.”
“이렇게 좋아하고, 내 인생에 하나뿐인 사랑이라고 생각하는데 망설일 게 뭐 있어. 기회는 있을 때 잡아야지.”
희나가 또박또박 말하자 다들 닭살 돋는다며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보혜는 손가락이 잔뜩 굽어서 맥주잔을 떨어뜨릴 뻔한 걸 간신히 캐치하며 진저리를 쳤다.
“으……. 우리 나이에 그런 생각 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내가 그렇게 이상한가?”
“나는 뭐 괜찮은 거 같아요. 꼭 남자가 하란 법 있어요?”
남자라서 그런지 도한은 희나의 의견을 흥미로워했다. 그러자 보혜가 눈을 곱게 흘기며 팩 쏘아붙였다.
“너한테 프러포즈까지 해줄 여자가 어딨냐? 넌 만나주는 여자 있음 고마운 줄 알아!”
“나야말로 너 데려갈 남자가 걱정되거든? 얼굴밝힘증녀!”
보혜는 도한에게 혀를 베 내밀어 보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언니, 나는 반대, 반대. 평생 한 번 있는 건데 받아야죠! 나는 진짜 로맨틱하게 프러포즈 안 하면 결혼 안 할 거야~!”
“난 딱히 그런 거 아무 상관없는데.”
“아무 상관 없다뇨-! 은영 언니, 언니도 좀 말려봐!”
희나가 굳건하자 보혜는 은영에게 편을 들어달라 보챘다. 그러나 그녀의 뜻과 달리 은영은 희나의 편을 들고 나섰다.
“근데 좀 전통적이지야 않지만 괜찮은 것도 같은데.”
“에엑? 언니까지?”
“저렇게 확신 가지는 것도 쉽지 않은 거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부럽기도 하네. 평생 동안 그렇게 느껴지는 사람을 못 만날지도 모르잖아.”
“그래, 맞아. 희나 누나 파이팅! 나도 누나 응원할게요! 건배, 건배!”
도한이 불만스러워하는 보혜의 입을 꾸욱 누르면서 잔을 들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건배를 하던 은영이 곧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 맞다!”
“뭐가?”
“너 기숙사 방 나가면 난 이상한 룸메이트들만 남는데. 힝. 가지 마, 희나야!”
은영이 달려들어 희나를 와락 안아 버렸다. 멀쩡해 보여서 몰랐는데 안기고 보니 술 냄새가 풍기는 것이, 꽤 오래 마시고 있었던 모양이다.
희나는 그런 은영을 토닥토닥 두들기며 달랬다.
“이런 거 아직 이른 걱정 아냐?”
“뭐가 이르다고 그래! 너 시집가면 나갈 거잖아.”
“그렇지만…… 거절할지도 모르잖아.”
고등학교 때 진혁이 잡아주지 않았던 일을 떠올린 희나가 시무룩해지자 보혜가 말도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거절할 리가 있어요? 오빠도 언니한테 완전 러브러브잖아요!”
“맞아. 눈꼴실 정도로 눈에 하트 띠우고 쳐다보는데.”
“이건 레알 인정함. 둘이 얼마나 오그라드는데요.”
단순하게도 그런 말을 듣자 희나는 금방 기분이 밝아졌다.
헤실헤실 웃고 있는 희나의 뽀얀 이마를 손가락으로 꾸욱 밀며 은영이 말했다.
“이거 완전 얼음 공주인 줄 알았더니 그냥 팔불출이었어.”
“그러게요. 힝, 그나저나 진짜 희나 언니가 프러포즈하는 건가요?”
“누나, 누나! 할 거면 이렇게 해!”
혼자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던 도한이 벌떡 일어나며 손뼉을 쳤다.
“어? 어떻게?”
“귀 좀 대봐.”
희나가 귀를 가져다 대자 도한이 뭔가 속닥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 듣기도 전에 얼굴이 빨개진 희나가 도한의 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이 변태가 진짜!”
“뭐라 했는지 모르지만 저 똥멍청이가 하는 말은 듣지 마.”
은영도 등 뒤로 숨어드는 도한을 발로 밀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테이블에 손을 얹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보혜가 불만스러운 듯 툭 던졌다.
“음, 언니가 결정하는 거지만, 난 역시 맘에 안 들어요.”
“뭐가?”
“여자가 먼저 하지 말라는 법 없다든가 다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좀 뭐한 거 같아. 나라면 기다릴 거 같아요.”
“그치만 언제까지 기다려. 언제 할 줄 알고.”
진혁의 성격상 졸업할 때까진 말도 꺼내지 않을 것 같아서 희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보혜는 들으려 하지 않는 희나에게 쿵쿵 무릎 발로 다가와서는 뺨을 꼬옥 부여잡고 말했다.
“언니, 하지 마요. 정 못 기다리겠으면 차라리 하도록 유도하세요.”
“유도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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