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유도탄 (1)
희나는 커다란 눈동자를 깜빡이지도 않은 채 미래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잠시라도 눈을 감으면 그 사이 미래가 깨어날까 봐 불안한 것처럼.
혹시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미래가 부서질까 희나는 숨조차 죽인 채 안타까운 얼굴로 서 있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9시 50분. 10분만 있으면 나가야만 한다. 일어나 주길 바랐지만 깨우고 싶진 않았다.
초조하게 미래를 바라보면서 다시 5분이 흘렀을 때 감겨져 있던 미래의 눈이 반짝 뜨였다. 희나의 얼굴에 미소가 환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미소는 곧 창밖에서 시계를 가리키는 간호사를 보고 사라졌다.
“언니…….”
아파서 야윌 대로 야위었는데도 희나를 발견하고 미래는 웃었다. 반가워하는데도 도리어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애처로운 모습이다.
희나는 손가락을 뻗어서 미래의 작은 손을 꼬옥 쥐었다.
“아픈 데는 없어?”
“미래 괜찮아. 쪼끔만 참으면 예인유치원 가는 거지?”
“응. 미래 가고 싶은 데면 다 데려다줄게.”
예인유치원은 원복이 예쁘기로 유명한 사립 유치원이다. 유치원치고 등록금이 비싸기도 했지만, 과수원에서 멀어서 아픈 아이를 보내긴 무리였다.
미래가 건강해지기만 한다면 돈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아픈 수술을 하는 대신, 다 나으면 유치원에 보내준다고 약속했었다.
희나의 대답을 듣고 미래는 좀 전보다 더 밝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희나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미래의 수술은 2주 전 성공적으로 끝났다.
승수로부터 이식받은 교환 이식 대상자는 일주일 전 중환자실을 나가 격리 병동으로 이동했지만 미래는 아직 중환자실에 머물고 있었다. 나이가 어린 데다 상당히 쇠약해져 있었던 탓이다.
“30분입니다.”
희나가 미래의 베개를 고쳐 뉘어주고 있는데 뒤쪽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백해도 밝은 표정이었던 미래가 곧 울상을 지었다.
“언니, 지금 가야 돼?”
“응. 미안해. 내일 올게.”
“잉, 지금 왔잖아. 미래 아픈데 더 있다 가면 안 돼?”
미래의 조름에 희나는 울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손가락을 꼬옥 잡는 작은 손을 떼어냈다. 중환자실 면회 시간이 끝난 것이다.
병원 방침상 중환자실의 외부 간병인은 금지. 허용된 면회 시간은 아침 8시 반부터 9시까지 겨우 30분밖에 되지 않는다.
“좀 있으면 미래 다른 방으로 옮기잖아. 그때 언니 맨날 와서 있을게. 그때까지만 좀 참자. 알았지?”
열심히 달래자 미래는 섭섭해서 눈물이 그렁그렁하면서도 착한 아이답게 고개를 끄덕였다.
희나는 미래의 기특한 모습을 보니 억지로 참고 있던 눈물이 더 솟아올라서 후다닥 중환자실을 나와야 했다. 애도 안 우는데 우는 얼굴을 보여줄 수는 없으니까.
나와서 바로 눈을 비비고 있으려니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눈 시뻘거네. 또 울었냐?”
문 바로 옆에 서 있던 희원이었다.
희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쌀쌀맞게 대꾸했다.
“신경 끄시지?”
“왜 맨날 울어? 아픈 애 심란하게.”
“시끄러워. 뭐 좀 울면 안 되냐?”
“안 될 건 없지만, 너 원래 이렇게 자주 우냐? 지훈이 형은 너 사귀고 나서 우는 거 한 번도 본 적 없댔는데.”
자각하고 있긴 했지만 지적당할 정도로 자주 울긴 한 모양이다. 확실히 올해 들어서 평생 울 걸 다 울고 있는 것 같다.
이제 약한 모습을 보여도, 더 이상 무서워하거나 밉보일 것도 없다는 걸 알아서 편해진 걸까.
괜히 낯간지러워서 희나는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쓸데없는 소리. 그보다 넌 왜 기껏 여기까지 와서 안 들어가?”
“괜찮은 거 보면 됐지 뭐하러 굳이 안에까지 들어가.”
“울까 봐 그러지?”
“내가 너인 줄 알아?”
둘은 투닥거리면서 격리 병동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가기 전에 승수에게 들를 생각이었다.
사이 나쁜 남매답게 희원이 희나를 무시하듯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희나는 입을 비죽거리다가 문득 떠오른 것을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 보혜랑은 잘돼가냐?”
“잘돼가긴. 내 타입 아니라니까?”
“전에 둘이 밥 먹었다며.”
“걔가 사준대서 먹은 거야.”
그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예쁘장한 격리 병동 간호사가 희원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희원은 데면데면했으나 간호사의 얼굴에는 명백한 호감이 떠올라 있었다.
희나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긴 했으나 내심 이 녀석은 시골에다 던져놔도 노총각으로 늙어 죽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안심이 되었다.
희나가 쳐다보자 희원이 퉁명스러운 얼굴을 했다.
“왜 그렇게 봐?”
“그냥.”
“잘생겨서 그러냐?”
“꺼지시지.”
그러는 사이 승수의 병실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희나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어? 여기 와 있었어요?”
“아, 왔어? 미래한테 가기 전에 잠깐 들렀어.”
병실 안에는 진혁이 와 있었다.
희나가 바로 헤죽헤죽 웃으면서 진혁에게 다가가는데 핀잔이 날아왔다.
“너네 나 병문안하러 온 거 아니냐!”
침대 위에서 승수가 한쪽 눈썹을 치켜든 채 토라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혈색은 좋지 않지만 눈은 언제나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미래와 달리 승수는 수술 3일 후 무사히 퇴원했다. 그러나 일주일 뒤, 급작스러운 맹장염으로 다시 개복을 해야 했다.
워낙 건강한 체질이긴 하지만 연이은 수술이 부담스럽지 않을 리 없다. 해서 일반적인 맹장 수술 입원보다 조금 더 긴 기간을 병원에 머물고 있었다.
정작 침대 위에 있던 승수를 잊었음을 깨닫고 뜨끔한 희나는 평소답지 않게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
“아, 그렇지. 좀 괜찮아요?”
“……성의 없는 질문이구만. 역시 난 뒷전이군.”
삐지려는 승수를 위해 희나는 살가운 태도로 애교를 부리며 얼른 들고 온 과일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보고 진혁이 바로 손을 내밀었다.
“내가 할게.”
“아니요, 괜찮아요.”
과수원에 잔뜩 쌓인 과일을 매일 깎아 버릇 했더니 희나도 이젠 제법 껍질 까는 것에 능숙해졌다.
진혁이 빠른 속도로 껍질을 벗기는 그녀의 손을 흐뭇하게 보다가 승수에게 눈길을 주곤 곧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승수야, 이거 좀 먹어.”
“너네 먼저 먹어. 엥, 또 뭘 이리 바리바리 싸 왔냐?”
진혁이 가방에서 찬합을 꺼내자 승수가 픽 웃었다.
환자식 외에도 이래저래 신경을 썼지만, 승수는 입원 전보다 조금 핼쑥해져 있었다.
그것이 신경 쓰이는 듯 진혁은 올 때마다 어떻게든 그에게 영양 보충을 시키려 애썼다.
“야, 나 기껏 좀 빠졌는데 왜 자꾸 다시 찌우려고 해?”
“아플 땐 많이 먹어야지. 얼굴이 반쪽인데…….”
“원래 네 얼굴 2배인데 살 빠지면 좋지. 나는 어차피 모레 퇴원할 거니까 네 얼굴이나 좀 펴라. 미래는 좀 어때?”
미안해하는 진혁을 보기 안쓰러운 듯 승수는 과장해서 밝게 말했다.
사실 지금은 단순 맹장염으로 신장 이식과 별 상관없는 입원이었으나 그래도 진혁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진혁은 승수의 수술에 대해서도 역시 극렬 반대하다가 진혜와 승수 사이에 대해서 뒤늦게 알게 된 후 패닉에 빠졌다.
그리고 한동안 고뇌하는 듯하더니 “몰랐어서 미안하다. 내가 이래저래 끼어들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으니 네 뜻대로 해라.” 하며 조심스레 물러섰다.
그래도 자신의 여동생과 베프의 관계를 쉽사리 받아들이진 못하는 것 같았다.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고 있는 중이라 승수에 대한 태도가 무척 조심스러웠다. 그러다 보니 사이가 좀 어색해졌지만 승수는 진혁인 원래 진지한 데다 걱정쟁이라서 천천히 받아들일 거라며 태평했다.
희나가 진혁 대신 승수의 말을 받았다.
“아직 안 좋긴 한데 경과가 나쁘진 않대요. 아마 얼마 있으면 일반 병실로 옮길 거 같아요.”
“그거 다행이네.”
네 사람은 깎아 놓은 과일을 먹으며 잠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떠들썩한 시간이 지난 뒤 중간중간 시계를 체크하는 진혁에게 승수가 툭 던졌다.
“여기서 나한테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애나 봐라.”
“어머니 계시니까 조금은 괜찮아.”
“어머니 일찍 보내서 쉬게 해드려. 여기서 그렇게 다 내 탓이오, 하는 표정 짓고 있지 말고.”
진혁의 얼굴에 그제야 머쓱한 미소가 떠올랐다.
일어나는 진혁을 보며 이번에는 희원이 걱정을 했다.
“형 혼자 하루 종일 진짜 고생하네요. 많이 피곤해요?”
“내가 고생은 무슨……. 그보다 피곤할 텐데 일찍부터 와줘서 고맙네. 미래가 많이 좋아했겠어.”
“좋아했으면 더 안쓰럽지. 10분씩 얼굴 보고 나오는데 그게 아픈 애한테 할 짓인가. 가족이 아니라서 안 된다니, 융통성 참 없네.”
진혁의 말에 뒤에서 승수가 끼어들어 다시 일침을 날렸다. 희나도 입술을 비죽거리며 동조했다.
“그러게요. 가족 아니라고 얼굴도 못 보게 하구. 미래가 가지 말라고 하는데 떼어놓느라 진짜 울 뻔했단 말이에요.”
“울 뻔한 게 아니라 울었…….”
“시끄러워, 주희원!”
희원에게 쏘아붙이고 희나는 진혁을 따라 일어났다. 얼굴 가득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희나를 진혁이 웃으며 안심시켰다.
애틋한 커플의 러브러브한 분위기를 보며 승수는 눈꼴시다는 듯 이마를 찌푸리다가 곧 히죽히죽 웃더니 능글맞게 말했다.
“유난은……. 그렇게 걱정되면 아예 이참에 가족 되지 그래?”
그 말에 진혁과 희나의 얼굴이 동시에 붉어졌다.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욧!”
희나는 한 발 앞으로 훌쩍 나서서 발끈하다가 하마터면 과일 쟁반을 엎을 뻔했다.
계속 웃으면서 낄낄거리는 승수를 뒤로하고 둘은 일단 병실을 나왔다.
방금 전에 걸어온 길을 되걸어 가며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희나는 좀 전에 들은 승수의 말이 의식되었기 때문이지만, 다시 하얗게 돌아온 진혁의 단정한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괜스레 어색해서 말을 걸지 못하는데 격리 병동 입구 즈음에서 진혁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근데 말이야…….”
“네, 네? 넷?”
괜히 깜짝 놀라서 희나는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 기세에 진혁도 살짝 움찔했다.
“왜 놀라?”
“아뇨. 근데 뭐요?”
“아니, 지금 나 데려다주려고 따라오는 거야?”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요즘 자주 못 보니까…….”
그러자 진혁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같이 좀 걸을까.”
커다란 손이 뻗어 와서 희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중환자실이 있는 병동으로 가는 대신 정원 쪽으로 그녀를 끌었다.
정원 끝 주차장 구석에는 작은 자판기가 있었는데, 희나가 유독 좋아하는 음료수가 들어 있었다. 매점에서는 팔지 않았기 때문에 희나가 혼자 몇 번 나가서 사 먹는 걸 보고 진혁이 종종 사다 주곤 했다.
지금 진혁은 그쪽으로 조금 돌아서 가려는 것이었다.
기껏 방학인데 데이트다운 데이트도 못 했다. 그래도 이렇게 잠깐잠깐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희나는 너무 좋았다.
아주 더워서 손을 잡고 걷는 걸 추천할 수 없는 날씨였지만 희나는 헤헤헤 웃으면서 진혁의 손을 꼬옥 마주 쥐었다.
자판기 앞에 도착하자 진혁은 시원한 음료를 뽑아 희나의 손에 쥐여주었다.
기뻤지만 이대로 진혁이 훌쩍 손 흔들고 가버릴까 봐 희나는 안타까워졌다. 가봐야 하는 건 알지만 최소한 음료를 마실 때까지만이라도 옆에 있어주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보채고 싶지 않았으므로 희나는 뭔가 말을 꺼내서 그가 좀 더 머물도록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기요, 선생님!”
“응?”
“학교 개학하면…… 자주, 못 만나겠지요?”
“그러게. 속상하네.”
거기까지 말하다 문득 희나는 최근 진혁에게 말해야겠다고 줄곧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아, 맞다. 나, 저기…… 다음 주까지 기숙사 신청해야 되거든요.”
“어? 아, 벌써 그럴 때인가?”
그렇게 말한 진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희나는 잠시 그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리다가, 진혁이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음을 눈치채고 확인하듯 은근히 물었다.
“신청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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