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최선에 대하여 (3)
희나가 짐을 싸서 과수원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밤이 깊어 있었다.
진혁의 작업실 문을 노크하자 열려 있다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 희나는 심장이 욱신거렸다.
희나가 문을 열자 진혁은 책상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들어온 사람이 아무 기척이 없자 의아했는지 고개를 들다가 희나를 발견했다.
“생각 바꾼 거야?”
희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단정한 얼굴 가득히 미소가 떠올랐다.
“잘 생각했어.”
환한 얼굴을 보니 희나는 며칠간 무거웠던 마음이 그대로 삭 사라져버리는 것 같았다.
진혁이 이리 오라는 듯 살짝 팔을 벌리자 희나는 날듯이 달려가 품에 폭 안겼다.
“보고 싶었어요.”
“나도.”
부드럽게 속삭인다.
희나가 사랑하는 남자의 향기를 가득 마시는 사이 진혁이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렇게 가면 선생님은 또 연락 끊고 모르는 척 태연하게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같이 있어주겠다고 한 다음에 그런 적 있어?”
할 말이 없어서 희나가 입을 다물자 진혁이 쿡쿡 웃으면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속 좀 썩이지 마, 진짜.”
핀잔에 희나의 입술이 주욱 나왔다.
옳다고 생각해서, 나도 선생님을 위해서 그런 건데, 내 말 안 들어 주니까 밉다.
근데 더 서글픈 건 지나고 보면 항상 선생님이 옳다는 거다. 그래서 더 속상하다.
그치만 자기가 맞아도, ‘거 봐, 내 말이 맞지?’ 같은 말 안 하는 점만은 너무나 좋다. 뻔뻔스럽게 없었던 일처럼 굴 수 있으니까.
“선생님이야말로 나 생각해준다고 고집 부리지 마요.”
“누가 그런대?”
“맨날 그러잖아요. 걱정 좀 그만해요, 바보 아저씨.”
진혁은 픽 웃었다.
그래그래, 하고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이 너무 좋아서 희나는 다시 와락 목덜미에 매달렸다.
그러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을 건드려서 바닥에 몇 장 떨어지고 말았다.
“아, 미안해요.”
“괜찮아. 신경 쓰지 마.”
희나의 시선이 떨어진 종이와 책상 위를 훑었다. 한창 작업하던 중이었던 것 같다.
“많이 바빴어요?”
“뭐, 그냥 그랬지.”
“아직 할 일 남았어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희나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럼 일해요.”
“이러고 일하라고?”
“네.”
진혁은 껌처럼 붙어 있는 희나를 보고 못 당하겠다는 듯 웃고는 정말로 그대로 책을 보기 시작했다.
희나는 진혁이 보던 책을 잠시 같이 내려 보다가 하얀 건 종이, 검은 건 글씨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자 곧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진혁의 무릎에 앉은 채 흰 뺨에 몇 번 뽀뽀를 했다.
진혁은 쑥스러운 듯 살짝 얼굴을 붉혔지만 기쁜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진혁을 지분거리고 있다가 나른해져서 하품을 하자 그걸 본 진혁이 희나를 안아 들고 침대로 갔다.
“많이 피곤하지? 자고 일단 내일 얘기하자.”
“나 잘 때까지 선생님도 같이 누워 있어요.”
진혁은 한숨을 쉬며 “이 바보가.” 하고 중얼거렸지만 결국 침대에 누워주었다.
“헤헤, 말 잘 듣는다.”
“쪼그만 게.”
“이 상황에서 눕기 싫은 남자가 어디 있냐고 했었나요?”
희나의 말에 예전 기억이 돌아온 진혁이 얼굴을 붉히며 민망해했다.
그게 재미있어서 희나는 진혁의 커다란 손을 잡고 앙, 깨물었다.
그리고 희고 긴 손가락을 잡아당기며 장난을 쳤다.
아주 큰 손.
그때나 지금이나 선생님은 어른이다. 나보다 훨씬.
지금도 그렇지만, 아마 내가 선생님과 같은 나이가 되어도 선생님 같은 어른은 못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희나는 헤헤 웃다가 진혁을 올려다보고 살짝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진혁의 해사한 뺨을 살짝 잡아당겼다.
진짜, 옛날 그대로다.
이대로 안 늙어서, 나중에 내가 더 연상으로 보이게 되면 어쩌지?
쓸데없는 걱정을 하던 희나는 어리둥절해하는 진혁의 표정을 보자 재미있어서 웃음을 터뜨렸다.
“헤헤헤헤헤.”
“뭐하는 거야? 웃지 마, 바보야.”
진혁은 혼자서 웃다가 깨물다가 좋아하다가 삐졌다가 갑자기 실없이 웃는 희나를 의아하게 쳐다보다가 핀잔을 주었다.
그리고 계속 웃는 희나를 품속으로 꼭 끌어안았다.
끌어안고 뺨을 살짝 깨문 뒤 말했다.
“어서 자, 바보야.”
“뽀뽀 안 해줘요?”
“……나중에.”
“왜 지금은 안 해주고?”
“지금 하면 아마…… 음, 어쨌든 나중에.”
별말 안 했는데 괜히 무슨 뜻인지 알 거 같고 부끄러워서 희나는 고개를 폭 숙였다.
자겠다는 걸로 받아들였는지 커다란 손이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기 시작한다.
그대로 기분 좋게 잠을 청하려던 희나는 문득 뭔가가 떠올라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
“저기, 혹시 있잖아요.”
“응?”
“내가 진혜 언니랑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아니……?”
진혁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는 듯 희나의 뺨을 꼬집었다.
“넌 너지, 무슨 소리야.”
그 말에 희나는 곧 수긍하고 다시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닮지 않은 여자에게서도 그녀의 얼굴을 본다.
그냥 승수가 진혜를 아주 많이 좋아했던 것일 뿐이라고, 희나는 자신의 결론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희나가 진혁의 품에 다시 푹 파고들자 든든한 팔이 마주 안아주었다.
안경 너머의 눈은 너무나도 따스한 빛을 띤 채,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 희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혁이 희나의 몸을 흡수하기라도 할 것처럼 강하게 꼭 끌어안고는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네가 그렇게 됐으면 나도 같이 죽어.”
“……바보.”
진짜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난 건지, 왜 이리 자주 시큰거리는지 모르겠다고 희나는 생각했다.
창피해서 얼굴을 그의 품에 깊이 묻고 비볐다.
나도 당신이 없으면 그 자리에서 죽어버릴 거다, 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계속 여기서 이대로 함께 있고 싶다.
내가 당신의 것이 되고 당신이 내 것이 되면 좋겠다.
가족, 그리고 그 모든 것들도, 계속 변하지 않고 이대로만 있으면 좋겠다.
당신에게 반발한 것도, 화가 났던 것도 모두 함께 있고 싶어서, 계속 이대로 변치 말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서 그랬던 거다.
희나는 5년 전 한 번의 잘못된 결정으로 진혁을 잃을 뻔했다.
그리고 진혜는 몇 번의 잘못된 결정 때문에 바로 앞에 계속 존재했을 행복과 안정을 거머쥐지 못한 채 떠나 버렸다.
나는 절대 그러지 않을 거야.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야.
앞으로 절대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꼭 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그걸 떠올린 희나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너무 이르지 않나 싶지만 조금도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희나는 속으로 마음을 다지며 진혁의 손을 꼭 쥐었다.
잠든 줄 알았던 진혁도 손을 마주 쥐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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