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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118화 (118/140)

118화. 최선에 대하여 (2)

“미안하지만 나한테는 선생님밖에…….”

“김칫국 마시지 마라.”

승수가 급 건조해진 목소리로 희나의 거절을 딱 잘랐다. 그리고 그녀의 하얀 이마를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물론 요 예쁜 얼굴에 좀 혹했던 건 사실이지만 뭐, 진짜 인생 걸고 좋아했던 건 아냐. 그냥 좀 꼬셔보자, 했던 거지. 지금은 그런 기분 전혀 없어.”

“……진짜예요?”

“그래. 난 도도하면서도 마음은 따뜻한 여자가 취향이야. 스토커 꽃뱀은 사양이라구.”

“누가 스토커 꽃뱀이에요!”

희나가 발끈해서 입을 주욱 내밀자 승수가 낄낄 웃었다.

“그럼 뭐 또 다른 어린 여자애 생긴……. 어? 혹시?”

“눈치챘냐?”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는 승수를 보며 희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미래한테 눈독 들이는 거예요?”

“누굴 범죄자 취급하는 거냐! 이 꽃뱀 녀석이!”

승수가 희나의 볼을 꼬집었으나 희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어린 여자 좋아해서 이식해준다면서요!”

“어려도 정도껏 어려야지! 여자가 아니라 애잖아.”

“그럼 누군데요?”

“……그냥 좀 넘어가지 왜 이렇게 캐물어! 어쨌든 너나 혹은 진혁이를 위해서 그러려고 하는 건 아니야.”

“여기까지 말해놓고 뭘 넘어가요. 빨리 말해줘요!”

그래도 승수는 또다시 곤란한 표정으로 음료수만 홀짝거렸다.

답답해진 희나가 팔을 흔들며 재촉했다.

“교환 이식 선생님도 모르게 진행한 거라면서요? 제대로 말 안 하면 어차피 오빠도 선생님이 못 하게 할 걸요. 제일 친한 친구니까. 선생님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라고 해도 선생님은 들으려고도 안 해요.”

“나한텐 그렇게 못 할 거야. 애초에 그 녀석이랑 진행한 것도 아니었고.”

“그럼 대체 누구랑 진행한 건데요.”

“누구긴 누구겠어? 진혜지.”

희나의 입이 헤- 벌어졌다.

“진혜 언니…… 요? 둘이 왜?”

“안 그래도 눈도 큰데 너 눈알 굴러 나올 거 같다.”

“말 돌리지 말고 설명해요!”

“남녀 관계를 뭘 꼭 말로 설명해야 알아?”

승수의 말에 희나는 하마터면 음료수를 떨어트릴 뻔했다.

“으엑? 둘이 무슨 관계였어요?”

“뭐, 그냥저냥…….”

“엑! 진혜 언니랑 오빠랑 여섯 살 차이 아니에요? 고등학교 때부터 서울에서 살았던데! 중딩을 노린 거? 이 로리콘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다 크고 나서 좀 괜찮다고 생각한 거야.”

그래도 희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않았다. 승수는 좀 버티다가 “이잇!” 하고 실토해 버렸다.

“뭐 어릴 때도 귀엽다고는 생각했지. 그래도 뭐 엉큼하게 본 적은 없다, 진짜!”

“진짜예요? 진혜 언니랑?”

“그래. 걔가 애 데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마을 전체가 다 수군거리고 했는데, 난 이상하게 좋더라고.”

진혜와 승수라니. 희나는 예전에 봤던 진혜를 떠올리곤 아연해졌다.

엉덩이만 겨우 가린 짧은 치마와 가슴골이 훤히 보이는 야한 셔츠. 얼굴을 알아보기 힘든 수준의 짙은 화장.

눈앞의 순진한 시골 총각 느낌 팍팍 나는 승수와 도무지 매치가 안 된다.

승수는 음료수 캔을 만지작거리면서 중얼중얼 말을 이었다.

“여기 애들에 비해서 좀 대처 냄새 나는 것도 좋고. 너 진혜 본 적 있냐?”

“있긴 있어요, 한 번.”

“예쁘지 않아?”

희나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평범한 것보다 괜찮을 거 같긴 한데 지나치게 화려한 모습 때문에 예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승수의 표정은 진짜 예쁘다고 생각하는 얼굴이었으므로 그녀는 대답 대신 말을 슬쩍 돌렸다.

“그보다 선생님도 그거 알아요?”

“진혁이 놈은 아마 모를 거야. 그 녀석은 서울에 있었으니까. 비밀로 하기도 했고.”

“왜 비밀로 했는데요?”

“진혜가 그러자고 했어. 한 6개월 끈질기게 쫓아다니다가 간신히 OK 받았는데 오빠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라 하더라고. 뭐, 이젠 싫어도 알게 되겠지만.”

진혜의 의중은 알 수 없었지만 희나는 어쩐지 수긍했다.

처음 알게 된 뜻밖의 사실에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아서 묻고 싶은 건 많은데 정리가 잘 안 됐다.

괜히 땅바닥을 발로 툭툭 차다가 희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진혜 언니는 왜…… 어쩌다 그렇게 된 거예요.”

“…….”

잠시 침묵을 지키던 승수가 들고 있던 캔을 손가락으로 두들기듯 만지며 씁쓸하게 말했다.

“뭐, 이런저런 게 겹쳤던 거지. 그냥 뭐…… 애기도 아프고, 막상 따라다녀 놓고 나도 지지부진하게 굴기도 했고…….”

“지지부진하게요?”

“둘이 만나는 거 알고 집에서 반대를 많이 했거든. 애가 있는 데다가 워낙 동네에 진혜 소문이 좋지 않기도 했고. 그래서 뭐, 에이 이런 얘기 해서 뭐하냐.”

얘기하다가 승수는 진절머리가 나는 듯 고개를 휙 젓더니 캔을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었다.

“뭐, 내가 진혜 속을 어떻게 알겠어. 뭐든 말해주는 법이 없었는데. 어쨌든 그냥 그렇게 됐어. 얘기할 필요도 없어. 우린 무슨 너네처럼 서로 없으면 못 사는 것까진 아니었어.”

다소 감정이 고조됐는지 승수의 말투가 조금 사나워졌다.

그러나 희나는 그의 말을 그냥 수긍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왠지 승수가 그녀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게 둘 수가 없었다.

“……그러면 미래 수술은 지금 와서 왜 해주는 건데요?”

희나의 질문에 승수는 다소 거친 손놀림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래도…….”

“…….”

“그래도, 그렇게 가지만 않았어도, 미래는 내 딸이 됐었을지도 모르지.”

“…….”

“그러니까, 이 정도는 해줄 수도 있는 거잖아.”

희나는 그렇다고도, 그럴 필요 없다고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정하기까지 승수가 얼마나 깊은 고뇌와 갈등과 괴로움을 겪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희나는 승수가 걱정스러웠다. 뭐라도 말해야 될 거 같아서, 간신히 이렇게만 말했다.

“오빠가 그거 해도 가족들은 괜찮대요?”

“가족 반대 같은 건 이제 아무래도 좋아. 이미 결정했고, 절대 아무도 못 말려.”

“…….”

“내가 좀만 더 제대로 행동했으면, 좀만 더 확신을 줬으면…….”

말하다가 승수는 눈이 부신 듯 고개를 들고 눈을 깜빡였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등을 돌린 채 말했다.

“으아, 그만하자. 계속 생각하고 있으면 나도 어떻게 되어버릴 거 같아. 그냥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네는 가만히 있어.”

“…….”

“미래한테 이거까지만 하면 뭐, 이제는 너희가 잘 키워주겠지. 난 거기서 할 수 있는 건 다 한 거고, 그럼 이제 홀가분하게 잘 살 수 있을 거 같아.”

희나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이었다.

승수는 혼자 말을 늘어놓다가 잠잠히 있는 희나를 흘깃 돌아보고 말했다.

“이제 됐지? 그만하고 가자.”

희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서서 승수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름 잘 알고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몰랐던 것이 참 많았다는 생각이 들자 희나는 그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고백해왔을 때 전혀 의외였어서 충격이었지만, 이젠 왠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여기저기 진지하지 않게 들이대다가 차였다는 것도 괴로운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랬을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 가벼운 타입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가까운 거리에 있는 보혜의 집 앞에 도착했다. 승수는 문 앞에서 멈춰 선 채 딴청을 피우며 말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빨리 집에 돌아가. 어머니도 너 걱정 많이 하신다. 괜히 말 꺼내서 딸 하나 더 잃는 거 아니냐고.”

딸이란 말에 희나는 잠시 가슴이 욱신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승수를 쳐다보는데, 그는 갈 기색 없이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그는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희나를 잠시 더 바라보았다. 어딘지 눈길에 아련한 느낌이 있었다. 어색해서 희나는 승수를 슬쩍 찌르며 다시 물었다.

“왜 그래요?”

“너, 말이야.”

“나 뭐요?”

“너…… 진혜랑 왠지 비슷한 거 아냐?”

뜬금없는 말이었다. 내 외모가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진혜 언니와 닮은 것 같지는 않은데.

희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내가요? 어디가요?”

“그냥, 외모 같은 게 아니라…… 뭐랄까…… 보고 있으면 걔 생각이 많이 나.”

“생각난다고요? 왜요?”

희나는 궁금해져서 캐물었다. 5년 전 진혁이 잘해주기 시작한 것도 동생 같아서, 남 일 같지 않아서일 이유가 컸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어디가 진혜 언니를 연상시킨다는 걸까?

“글쎄, 굳이 말하자면…….”

승수는 잠시 생각해 보는 듯하더니 말했다.

“성격 괄괄한 점? 입 더러운 점? 꽃뱀 같은 점?”

“……시끄러워욧!”

주먹을 휘두르는 희나를 잡으며 승수는 밝게 웃었다. 그리고 희나의 머리를 살짝 흐트러뜨렸다.

“어쨌든 이제 고집 그만 부리고 집에 가라.”

“고집 부리는 거 아니거든요?”

“좋아하는 사람 속 썩이면 후회해.”

“……말 안 해도 갈 거였어요.”

뾰로통하게 대답하는 희나를 승수는 “그래, 착하다.” 하고 좀 더 쓰다듬었다. 그리고 곧 돌아서서 가려는 그를 희나가 다시 불러 세웠다.

“오빠.”

“엉?”

“고마워요.”

승수는 그래그래 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흔들며 걸어가 버렸다. 희나는 그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리자마자 보혜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달려들듯 물었다.

“언니,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기로 했어요?”

어차피 미래가 수술을 받게 되면 알게 될 것 같고, 또 보혜한테 신세도 많이 졌으므로 희나는 솔직히 털어놓기로 했다.

한참 동안 흥미진진하게 듣던 보혜는 이야기가 끝나자 양손을 열렬하게 맞잡았다.

“우와, 승수 오빠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 멋있네요!”

“그런가…….”

“그래요! 순애적인 점도 그렇고, 그리고 어…….”

보혜는 눈을 가늘게 뜨고 희나의 어깨를 자기의 어깨로 은근히 밀었다.

“그 오빠, 진혜인가 하는 분 때문도 물론 있겠지만 언니 때문에 해 주려는 거 아니에요?”

“어?”

“그 오빠가 안 하면 언니가 할 거였잖아요.”

“그런 거 아닐 거야.”

보혜의 뒤에 있는 거울을 보며 희나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보혜는 자기가 생각해 낸 사실에 도취됐는지 들을 기미도 없이 혼자 베개를 안고 뒹굴었다.

“꺄아, 몰라, 몰라. 언니, 인기 많아서 좋겠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대체.”

희나는 픽 웃고는 자리를 털고 얼어났다.

그리고 짐을 정리하기 시작하는 그녀에게 보혜가 물었다.

“돌아갈 거예요?”

희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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