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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117화 (117/140)

117화. 최선에 대하여 (1)

사랑하는 사람의 힘들어하는 목소리. 뭐든 들어주고 싶어져버린다.

희나의 표정이 흔들리자 진혁이 그녀의 손을 잡고 소파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희나를 끌어안았다.

희나는 마음이 약해지는 것이 싫어서 계속 밀어냈지만 그럴수록 단단한 팔이 몸을 더 휘감아들었다.

넓은 품에 폭 파묻힌 채 숨을 들이쉬다가 희나는 하마터면 그러겠다고 말할 뻔했다.

“선생님이 반대해도 나 할 거예요.”

“내가 뭐라고 해도 마음을 안 바꿀 거란 거야?”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희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호소하듯 중얼거렸다.

“못 참겠단 말이에요. 이렇게 미래 아픈 거 못 보겠어요.”

“그럼 보지 마.”

“네?”

“마음 바꿀 때까지 미래 근처에 가지 마.”

누그러졌던 희나는 순간 울컥했다.

그녀는 잡고 있던 진혁의 몸을 밀어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그게!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말한 대로야. 옆에서 지켜보기 힘들면 가지 말고 있어.”

“그럼 미래는 누가 봐요! 희원이한테 다 맡기려고요? 걔도 어차피 나랑 비슷한 생각 해요!”

“걱정할 거 없어. 내가 혼자 볼게.”

그의 말에 희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말이 돼요? 하루가 멀다 하고 학교에 불려가면서.”

“학교는 관두면 돼. 너한테 그런 거 시킬 바에는 공부 같은 거 안 하는 게 나아.”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진짜!”

희나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관둔다는 말 하는 거 듣기 싫어. 해 주고 싶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데, 수술도 다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이런 말을 꺼내다니 너무 심하잖아.

“내가 선생님 생각해서, 얼마나, 얼마나…….”

울컥한 데다가 감정이 격해지니까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솟아 올라왔다. 그러나 희나는 커다란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눈물을 참았다. 울어서 뜻을 관철하는 건 비겁하다.

희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그만둔다고 말해요?”

“너야말로 쉽게 말하고 있잖아.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저번에 분명히 말했을 텐데.”

희나의 머릿속에 목이라도 매달고 싶다고 쓸쓸하게 말하던 진혁의 얼굴이 되살아났다.

“네가 내 말 안 듣겠다면, 나도 네 말 안 들어줄 거야.”

선생님이 이렇게 벽처럼 구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아니, 원래 자기가 결정한 것에 대해서는 그랬나? 모르겠다.

화가 날 대로 난 희나는 벌떡 일어나서 베개를 들어 진혁에게 던졌다.

“사람 말 들으려고도 안 하고! 이제 나도 몰라요!”

“희나야, 어디 가?”

침대에서 내려서서 나가 버리려는 희나를 진혁이 황급히 붙잡아 세웠다.

“놔요. 학교로 갈 거예요.”

“이런 시간에 혼자 어딜 간다고 그래?”

“걱정 필요 없다고요! 따라오지 말아요!”

희나는 주먹을 붕붕 휘두르면서 작업실을 나왔다. 그리고 계속 따라오는 진혁을 뿌리친 채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문을 쾅, 걸어 잠그고는 창밖의 진혁에게 팽 말했다.

“마음 돌릴 때까지는 보러 안 올 거야! 나도 내 맘대로 할 거예요!”

차를 출발시키는데 백미러에 비친 진혁의 얼굴이 보였다. 마음이 욱신거려서 희나는 급히 시선을 돌려야 했다.

***

“언니, 진혁 오빠 또 기숙사에 왔다 갔대요.”

편의점 봉투를 들고 현관으로 들어서는 희나에게 보혜가 말했다. 희나는 잠시 움찔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을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대체 뭐 때문에 싸운 거예요?”

“싸운 거 아니래두.”

“그런데 왜 집에 안 들어가요?”

희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진혁의 집에 가지 않은 지 벌써 일주일째.

처음에는 기숙사 방에 틀어박혀 있었으나 진혁이 자꾸 찾아와서 버티기가 힘들었다.

진혁이 부르는데 자꾸 마음이 약해져서 행방을 알리지 않은 채 도망치듯 보혜의 자취방으로 와서 얹혀 지내고 있었다.

“나 있는 거 불편하지?”

“에이, 그런 게 아니라 걱정돼서 그러죠. 있고 싶은 만큼 있어도 돼요.”

희나가 대답 대신 조심스레 묻자 보혜가 별소리를 다 한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좋아 죽더니 이렇게 떨어져 있어도 괜찮나 해서.”

별것도 아닌 보혜의 말에 희나는 눈가가 뜨끈뜨끈해졌다.

안 그래도 진혁이 보고 싶어서 죽을 지경이었다. 미래도 너무 걱정되고 보고 싶다.

뭐 때문에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희나가 울상을 짓자 보혜가 그녀를 가만히 끌어당겨 자신의 무릎에 뉘였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가서 오빠랑 일단 얘기라도 해보지 그래요.”

“내 얘기 전혀 들으려고도 안 하는걸, 뭐.”

“진혁 오빠가요?”

“응. 하, 다 답답하고 진짜 싫다.”

속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희나의 흩어진 머리카락을 보혜가 달래듯 쓸어주었다. 부드러운 손놀림에 줄곧 심란하던 마음도 조금 누그러져서 희나는 가볍게 하품을 했다.

“언니, 어젯밤에도 한숨도 안 잤죠? 일단 좀 자요. 쉬고 나서 다시 생각해요.”

“응. 미안, 고마워.”

보혜도 희나가 잠 못 들고 밤새 뒤척이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벌써 3일째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희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바닥의 개지 않은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막상 눕자 금세 잠이 오진 않았다. 얼굴 마주치지 않는다고 마음이 편해지는 건 아니었다.

‘자기 멋대로 굴다니. 고집불통 바보 아저씨 같으니.’

속으로 일부러 원망스레 중얼거렸지만 희나의 결심은 이미 상당히 무뎌지고 있었다.

처음에 그녀를 잔뜩 화나게 했던 진혁의 말도 생각할수록 그렇게까지 심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도리어 시간 지날수록 목매달아 버리고 싶다고 말했던 진혁의 우울한 표정이 진하게 떠올랐다. 멋대로 뛰어나온 것도 점점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마치 관계를 걸고 그를 협박하는 거 같다. 생각도 하기 싫다. 그런 게 아닌데.

‘선생님은 지금 뭐 하고 있으려나.’

진혁을 떠올리자 희나는 더욱 침울해졌다. 지금쯤 미래의 옆에 앉아 있을 진혁이 너무나 걱정되었다. 분명히 괴로워하고 있을 텐데.

아파서 주사바늘을 여기저기 꽂고 있는 비쩍 마른 아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 텐데.

그 아이를 살려주려는 사람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말리고 있는 것은 그 자신.

어떤 심정으로 앉아 있을지 희나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런 걸 바란 게 아닌데.’

희나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똑 흘렀다.

눈물이 베개를 적시는 그때였다.

원룸의 초인종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책상에 앉아 있던 보혜가 일어나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누구지?”

혹시 진혁인가 하는 마음에 희나의 동작이 딱 굳었다. 눈도 깜박이지 못한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데 커다란 목소리가 울렸다.

“빨리 문 열어!”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은 승수의 목소리였다.

당황한 희나는 이불에서 일어나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했다.

“나,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희원이 놈한테 들었다.”

“희원이한테도 말 안 했는데?”

희원도 이 일에 관해서는 희나의 편이었지만 진혁에게 워낙 약한 면이 있어서 털어놓을지도 모르는 일. 만약을 대비해서 그냥 동아리방에서 잔다고만 말해 두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희나의 뒤에서 모기만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미안해요.”

돌아보니 보혜가 얼굴 앞에 두 손을 모은 채 눈치를 보며 서 있었다.

“밥 사준다고 그러길래…….”

“너 진짜. 밥 한 끼에 나를 팔아먹을 수 있는 거야!”

“그냥 밥 한 끼가 아니잖아요! 희원이랑 먹는 건데.”

“아직도 그 녀석 좋아해? 그런 놈 대체 어디가 좋다고.”

“잘생겼잖아요!”

둘이서 투닥거리고만 있자 승수가 존재를 알리듯 다시 한 번 문을 쾅쾅 두들겼다.

다른 방법이 없었으므로 희나는 할 수 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이 멍청이가 진짜!”

문이 열리자마자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듯한 승수의 고함이 울렸다.

“하지 말라니까 기어이 말을 안 듣네.”

“으으, 조용히 좀 말해요. 귀청 떨어지겠어요!”

“보혜 그만 괴롭히고 빨랑 나와. 속 썩이지 말고 가서 진혁이한테 미안하다고 해.”

“난 미안한 거도 잘못한 거도 하나도 없어요!”

일방적으로 혼이 나자 발끈한 희나도 잔뜩 부아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 좋아서 그런 줄 알아요? 나도 생각해서 한 건데 애 취급하지 말아요!”

따지고 들자 승수가 한숨을 푹 내쉬며 희나를 보다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제야 울어서 빨개진 희나의 눈을 알아챈 것이다.

순진한 시골 총각인 승수는 고함치던 기세가 금세 누그러지고 쩔쩔매기 시작했다.

“그러지 말고, 어, 그러니까, 희나 너, 그럴 거 없어.”

“무슨 말 하는 거예요?”

“싸울 필요 없다고. 미래 곧 이식받을 거니까.”

“이식이요? 누구한테서요?”

“누구긴.”

승수는 뭔가 쑥스러운 듯 짧은 머리카락을 긁적거리며 작게 말했다.

“나지. 내가 수술해 줄 거야.”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오빠는 못 하잖아요.”

잠시 멍해졌던 희나는 곧 승수의 불일치 검사 결과를 떠올려내고 말했으나 그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내가 교환 이식 신청했어.”

“교환 이식이요? 그게 뭔데요?”

“이식이 필요한데 기증자랑 불일치하는 환자들끼리 서로 바꿔서 이식하는 거야. 꽤 오래 기다렸는데 드디어 맞는 사람을 찾았나 봐.”

교환 이식이라니. 그런 건 생각도 못 했다.

희나가 다시 멍하니 서 있자 승수가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있지 말고 가자, 빨리.”

기세에 떠밀려 무의식적으로 따라나서려던 희나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팔을 뿌리쳤다.

“뭐야, 갑자기! 그런 거 나 못 들었어요!”

“그렇겠지. 아직 진혁이도 모르니까.”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말 좀 해줘요. 그러기 전엔 안 가.”

희나가 버티자 승수는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보혜를 보았다. 보혜가 눈치를 보고 슬금슬금 일어나려 하자 그가 만류했다.

“아냐, 집주인을 쫓아낼 순 없지. 일단 잠깐 나와 봐.”

그리고 그는 먼저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희나는 보혜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한 뒤 대충 운동화를 구겨 신고 그의 뒤를 따랐다.

보혜의 원룸 모퉁이에 있는 슈퍼까지 나온 뒤 승수는 음료수를 두 개 사서 햇볕에 뜨거워진 플라스틱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가 비워둔 그늘진 의자에 희나가 앉자 그가 음료수를 내밀었다.

희나가 받아서 마시기 시작하자 승수가 대충 넘어가려는 듯한 투로 말을 꺼냈다.

“그냥, 뭐 길게 설명할 것도 없어. 예전에 교환 이식 신청해놨었는데, 그게 맞는 사람 찾아서 연락 온 거야. 그게 다야.”

“그걸 선생님 모르게 진행시켰다고요?”

“그래.”

“어떻게요? 아니, 오빠가 왜 그렇게까지 해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기미가 전혀 없는 희나의 모습에 승수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말을 꺼내려다 말고, 또다시 꺼내려다 주춤하고를 반복하더니 얼굴을 좀 붉히며 작게 내뱉었다.

“내가 원래 어린 여자 좋아하는 거 알지?”

의미심장한 승수의 말에 희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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