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선택 (8)
다소 느슨하게 앉아 있던 희나는 저도 모르게 자세를 고쳤다. 매일같이 겪는 진혁의 귀가인데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직 안 가고 있었어?”
거실로 들어서다 희나를 발견한 진혁이 말했다. 놀란 표정은 금방 잔잔한 미소로 바뀌었다.
피로한 얼굴에 웃음이 피어나는 걸 보니 희나는 마음이 따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저려왔다. 그가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전할 말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녀왔습니다.”
“밥은 먹고 오니?”
“네, 먹었어요. 옷 갈아입고 올게요.”
진혁이 방으로 들어가자 남은 세 사람은 눈빛을 교환했다. 자리를 피하기 위해 소파에 늘어져 있던 희원이 일어서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아, 갑자기 참외가 엄청 먹고 싶네.”
너무나 국어책을 읽는 톤이어서 식겁한 희나가 희원을 째려보았다. 그러나 어쨌든 말을 맞춰줄 수밖에 없었기에 그녀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도 그러네. 그럼 같이 나가서 따 오자.”
들으라는 듯 그렇게 말하고 남매는 황급히 거실을 벗어났다. 뒤에서 진혁이 의아한 목소리로 뭐라 말하는 것이 들렸으나, 두 사람은 마당의 광주리를 집어 든 채 어두운 과수원으로 후다닥 달렸다.
“야, 주희원! 연기가 그게 뭐야? 초딩도 그거보단 잘하겠다.”
“너는 뭐 잘한 줄 알아?”
“핑계도 좀 그럴듯한 걸 대든가. 하필 야밤에 참외 따러 가자고 하고 난리야.”
“그냥 시간 좀 때우다 들어가면 되지, 진짜 딸 필요 있나?”
“바보야, 이미 참외 따러 간다고 했는데 빈손으로 들어가면 뭐라고 생각하겠냐?”
“이미 수상한 마당에 그런 거 걱정해서 뭐해. 그리고 불만이면 네가 생각해내든가.”
둘이 티격태격하면서 달린 끝에 참외밭에 도착했다.
쓸데없이 체력을 낭비한 덕에 둘은 헥헥거리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 밭에 내려가서 묵묵히 참외를 따기 시작했다.
“이식받고 나면…….”
5분쯤 묵묵히 있던 희원이 입을 열었다.
“꼬맹이도 이제 다른 애들처럼 되는 건가? 뛰어다니고?”
“음, 아마 그럴걸.”
희나는 진혜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이식을 받았지만 진혜는 완전히 건강한 것처럼 보였었다.
희나의 대답을 들은 희원의 얼굴이 기쁜 것처럼 변했다.
꼬맹이 귀찮다고 매일 툴툴대는 주제에 역시 예뻐하긴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희나는 히죽히죽 웃었다.
희나의 표정을 본 희원이 미소를 지웠다.
“난 걱정 안 되냐?”
“무슨 걱정?”
“나도 수술하잖아.”
“내가 니 걱정을 왜 하냐? 그냥 냅둬도 맨날 나보다 훨 잘 먹고 잘 살더만.”
놀리듯 떠보던 희나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물론 요즘은 부작용이 거의 없다 하고 희원의 걱정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지만 왠지 얄밉다.
희나가 동생의 엉덩이를 걷어차려는데 희원이 툭 말을 던졌다.
“어차피 나중에 문제가 돼도 내가 주면 되는 거 아닌가?”
치켜들었던 희나의 다리가 스르륵 내려갔다. 희원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희나는 단순하다 싶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기뻤다. 하지만 그런 기분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쌀쌀맞게 말했다.
“바보네, 완전. 무슨 신장이 돌려 막기 하는 건 줄 알아?”
“준대도 난리야. 성질머리하고는.”
“……니가 그런 기특한 말을 할 줄 몰랐는데 완전 의외네.”
“너 땜에 주는 줄 아냐? 진혁이 형이 안돼서 주는 거지.”
머쓱한지 희원이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툴툴거린다. 희나도 괜히 민망해서 고개를 돌렸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희원이 어색함을 감추듯 심술 맞게 덧붙였다.
“형도 참 취향 이상하지. 너 같은 게 대체 뭐가 좋다고.”
얼굴 마주칠 때마다 맨날 저 소리. 질리지도 않나, 하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희나도 늘 하던 대로 대답했다.
“왜 부럽냐?”
이 다음은 “부럽긴 개뿔.”이 나올 차례. 그러나 희원은 그 말을 하는 대신 한쪽 눈썹을 찌푸리더니 곰곰이 생각하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뚱딴지같은 말을 던졌다.
“나도 여기서 여자나 만날까?”
“엥?”
뜬금이 없어 희나는 입을 턱 벌렸다. 서울에 정말 안 올라갈 셈인가?
아니 그보다 남매인 데다 지훈의 집에서 한동안 같이 살았는데도 희나는 희원의 여자친구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인기깨나 있다 들었고, 여자들이랑 돌아다니는 걸 몇 번 보긴 했어도 연애에 대한 대화를 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너 여친 사귀어본 적은 있냐?”
“너보단 많을 걸.”
“진짜? 언제? 누구랑?”
“수영이랑…… 지나랑…… 그리고.”
“뭐!?”
경악하는 희나에 아랑곳없이 희원은 명단을 계속 늘어놓았다. 한 손가락이 모두 접히고 다시 펴진 뒤 또다시 접힐 기미가 보이자 희나의 손바닥이 희원의 뒤통수에 작렬했다.
“여친도 내 주변에서만 찾았냐? 아, 진짜 이 기생충 같은 자식이!”
“아, 왜 때려! 뭘 니 주변에서만 찾아? 니가 모르는 애가 더 많거든?”
“자랑이다. 이제 스물두 살 주제에, 얼마나 사방에 껄떡거리고 다닌 거냐?”
“껄떡대긴 누가 껄떡대. 다 그쪽에서 좋다고 덤벼든 거고만.”
희나는 희원의 살짝 올라간 얄상한 눈이나 그을린 피부, 작은 얼굴, 반듯한 콧날 등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정말 남자 놈이 밥맛 떨어지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희나가 그 생각을 고대로 내비친 얼굴로 쳐다보자 희원도 비슷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뭘 봐? 못생긴 얼굴 치워.”
“…….”
얼굴도 별로인 녀석이 말도 정 떨어지게 하네. 얼굴을 확 찌푸린 희나는 자동반사적으로 말했다.
“너 같은 놈이 대체 뭐가 좋다고?!”
“그거 내 대사거든?”
“다들 완전 눈깔이 삐었네.”
“너 좋다는 남자들보단 훨씬 정상이지!”
두 사람은 으르렁거리다가 고개를 팽 돌렸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희나가 소리를 낮춰서 물었다.
“진짜 여친 여기서 만날 거냐?”
“안 될 거 있나.”
계속 여기 있을 예정인가 보다고 생각하던 희나는 그게 별로 싫지 않은 자신에게 놀랐다. 겨우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제일 짜증 나는 일이었는데.
눈알을 굴리던 희나가 다시 침묵을 깼다.
“보혜가 너 좋아하던데.”
“보혜가 누군데?”
희나는 보혜에 대해서 몇 마디 설명했지만 희원은 잘 생각이 안 나는 눈치였다. 희나가 모르면 말라고 포기할 무렵 희원이 깨달은 듯 이마를 살짝 쳤다.
“아, 혹시 걘가. 맨날 메시지 보내는 애.”
“맨날 보낸다고?”
희원은 대답 대신 주머니를 뒤적거려 휴대폰을 꺼낸 뒤 희나에게 한 메시지 창을 보여주었다.
생각보다 훨씬 길었다. 희원은 대체적으로 단답형에 답장도 늦었지만 보혜는 끈질기게도 보내고 있었다.
“하, 진짜 마음이 있었나 보네. 잘해보지 그래? 보혜 착하고 귀엽잖아.”
“잘해보긴 뭘.”
“왜, 너 같은 놈 이렇게 좋아해줄 여자가 흔한 줄 알아?”
“많거든? 그리고 얜 내 취향 아냐.”
희원은 휴대폰을 빼앗더니 주머니에 쑥 집어넣었다.
“뭐야, 따지기는. 그럼 네 취향은 어떤 여잔데?”
“글쎄. 진혁이 형 같은 여자?”
“……게이냐?”
“시끄러워. 그보다 이거 언제 다 먹어?”
희원의 지적을 듣고서야 광주리를 본 희나는 깜짝 놀랐다.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서 따다 보니 참외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서 파티를 해도 될 만큼 넘쳐났다.
둘은 서로 네 탓이라며 한동안 디스를 날리다 씩씩거리며 일어섰다.
집이 보이기 시작하자 희나는 문득 희원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건 난생처음 있는 일이란 것을 깨달았다. 이런 건 절대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일이라 기분이 묘했다.
희나가 희원을 슬쩍 올려보니 그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들어가기 전에 한마디 하자.”
“뭐?”
“고마워, 누나.”
희원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하고는 희나를 스쳐서 휙 걸어가 버렸다.
너무 놀란 희나가 굳은 채 귀를 의심하고 있는데 갑자기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요, 어머니. 절대로.”
단호하게 말하며 거실에서 진혁이 나오고 있었다. 그는 마루로 내려서다가 희나들을 발견하고는 곧장 다가오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르게 쿵쿵, 하고 소리가 날 듯 거친 발걸음이었다.
심상치 않은 진혁의 기색에 희나는 찔끔했다.
“진혁아, 얘기 중에 그렇게 가면 어떻게 해. 다시 와서 앉아.”
진혁의 어머니가 몸을 내밀고 뒤에서 불렀지만 진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평소 어머니한테 이런 태도를 보인 적이 없는데, 정말 화가 난 듯했다.
그는 순식간에 희나의 앞으로 오더니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선생님, 잠깐만요.”
“잠깐 따라와.”
희나의 가는 팔을 억세게 쥔 채 진혁은 막무가내로 작업실을 향해 걸었다.
엉거주춤 서 있던 희원이 눈치를 보며 문 앞까지 따라갔다.
“형, 저기 일단 진정 좀 하고 얘기해요…….”
“미안. 둘이 먼저 할 얘기가 있어. 나중에 얘기하자.”
그리고 진혁은 문 안으로 들어섰다. 문틈으로 희원의 불만스러운 표정이 보였으나 닫힌 문을 두드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곧바로 말을 쏟아낼 것 같던 진혁은 한동안 가만히 선 채로 희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깨가 여전히 들썩이는 것이 감정을 가라앉히는 모습이었다.
얼마 후 진정이 됐는지 그가 심호흡을 하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절대 안 돼.”
“뭐가 절대 안 돼요?”
“무슨 말 하는지 알잖아.”
“나 수술 받을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딱 자른 뒤 진혁은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몸을 돌리려 했으나 희나가 지지 않고 그를 저지했다.
“말리지 마세요, 선생님. 정말 깊이 생각하고 결정한 거예요.”
“어떻게 결정했든 절대 안 되니까 다시는 이런 얘기 꺼내지도 마.”
“이렇게는 정말 못 참겠단 말이에요!”
희나가 신경질적으로 언성을 높이자 진혁이 이마를 가볍게 짚었다.
“그렇게 기분에 따라 결정할 문제가 아냐.”
“나한테 수술 못 하게 하는 건 선생님 기분 때문이잖아요.”
“그럼 어차피 기분 문제 때문이라면 이번엔 내 기분대로 하게 해줘.”
진혁 쪽에서 도리어 기분을 들고 나오자 희나는 입을 다물었다. 억지를 부리는 것이 그답지 않아서 도리어 반발하기가 힘들다.
진혁이 입술을 깨물고 있는 희나를 내려다보면서 조용조용히 말을 이어 갔다.
“후회를 많이 했어. 나도 참을 수 없는 건 참지 않으려고 해.”
“……내 얘기는 듣지도 않고 완전 제멋대로잖아요.”
“너한테만 그래. 좀 들어줘, 희나야.”
함께 밤을 보낸 후 진혁은 무언가를 많이 내려놓은 듯 속내를 내보이는 일이 많아졌다.
진혁이 너한테만 그런다는 말에 괜스레 얼굴을 붉히는 희나의 손을 끌어당겨서 꼭 쥐었다.
“절대 안 돼, 희나야.”
“놔요, 이런다고…….”
“그러지 마. 내게 자꾸 그러지 말라고 말하게 하지 마.”
“…….”
“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힘들어. 그만해, 희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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