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선택 (7)
“희나야, 미래를 살려줘.”
목이 멘 듯 잦아들어 가는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희나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그녀도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승수에게 들은 말도 있고, 이미 진혁과 이야기도 나눈 상태였다.
희나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을 찾고 있는 사이 진혁의 어머니가 다시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랑은 다르잖아. 희나 너는, 우리 가족이 될 거 아니니.”
가족이란 말의 속뜻을 깨달은 희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것이 거절의 뜻으로 보였는지 진혁의 어머니는 더욱 간곡하게 호소했다.
“내가 그러면 안 된다는 건 정말 잘 안다. 말하면 안 된다고 계속 생각했어. 그런데 어떻게 해도 모르는 척하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구나. 진혜가, 내 딸이 바로 저기 있는데.”
“…….”
“너한테 죄를 짓는 거라는 것도 알아. 그건 내가 어떻게든 씻으마. 어떻게든…….”
희나는 살짝 눈을 들어 진혁의 어머니를 보았다. 주름진 얼굴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슬픔보다는 죄책감이 흘러나온 것으로 보였다.
다정하기 때문에 희나는 간혹 잊어버리곤 했지만 진혁의 어머니는 진혜가 가출을 하게 된 원인이다. 엇나간 데에도, 진혜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데에도 모두 그녀의 책임이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지만 희나는 곧 털어냈다. 그녀가 이렇게 변한 것은 후회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결말을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거다.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 노파에게 ‘그러게 잃어버리기 전에 잘 간수했어야지’라고 하는 건 잔인한 짓이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후회하는 사람의 가슴을 더 뜯을 필요는 없다.
희나는 대신 작게 속내를 토로했다.
“저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하지만…….”
“내가 내 아들도 설득 못 하는 주제에 할 말은 아니지만, 네가 한 번 더 이야기해볼 수 없을까?”
“…….”
“미래를 멀리 보내고, 혹시 잘못되기라도 하면 내가 무슨 낯으로 여기서 살겠니.”
애원하는 모습이 애처로워서 희나는 당장이라도 그러마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진심으로 씁쓸해하던 진혁의 얼굴이 확답을 머뭇거리게 했다.
난처한 상황에 목이 타서 희나는 앞에 놓인 주스를 입으로 가져갔다. 이런 와중에도 주스는 아주 달고 맛있었다.
맛을 음미하다 문득, 희나의 눈앞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
딱 한 번 만났던 진혜는 엄마가 만들어 준 주스를 가지러 진혁의 집에 왔었다. 냉장고를 열고 주스를 마치 물처럼 마시던 진혜의 모습이 아련하다.
희나의 시선이 주스로 꽉꽉 들어찬 냉장고로 향했다. 지나친 비약인지 모르지만 다 마시지도 못할 주스를 만드는 것은 어머니 나름의 속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제가 설득해볼게요.”
결국 희나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고야 말았다.
“선생님만을 위한 게 아니니까요.”
“정말, 정말 고맙다, 희나야.”
주름진 진혁 어머니의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고마워하는 얼굴을 보니 가슴이 벅차 희나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제가 고맙지요.”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이미 받은 게 너무 많아요.”
희나는 진심으로 손사래를 치는 진혁의 어머니에게 계속 말했다.
“저는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우리 고생한다고 하는데, 진짜 좋아요. 이렇게 살아본 적 없어요. 희원이 그 천덕꾸러기 받아준 것도 그렇고, 살면서 한 번이라도…….”
“…….”
“가족이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을 거란 생각 못 했어요. 지금을 절대 깨버리고 싶지 않아요.”
희원과는 지훈의 집에 머무를 때도 함께 살았지만 그저 데면데면하고 서로 말 한마디 섞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희원과 같이 살게 된 것, 진혁과 같이 있어도 아무 말 없이 따뜻하게 받아준 것에 대해 희나는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진혁을 세상에 나오게 해 준 것만으로 희나에게 그녀는 은인이었다.
“그렇게 말해주니까 오히려 내가 기쁘구나.”
“어머니야말로 괜찮으신 거예요?”
“뭐가 말이니?”
“우리가 이렇게 폐 끼치는데, 근본도 모르는 애가 들어와서 선생님한테 붙어 있는데, 한 번도 화내신 적도 없고, 귀찮아하신 적도 없으시니까요.”
미래도 돌봐주고 하니까 그냥저냥 받아들인 거라고 생각하곤 있었지만 희나는 진혁의 어머니의 의중이 항상 궁금했다. 특히 그녀가 먼저 마음에 둔 며느릿감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지금은 더욱더.
미래를 잘 돌보고 있다는 점에서 희나도 자신감은 있었다. 그러나 상대방이 미래의 어린이집 선생이라면 자신보다 더 잘하면 잘했지 못하진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희나의 말을 듣고 진혁의 어머니가 눈물을 닦더니 작게 미소 지었다.
“폐라니 말도 안 되지. 니들 밥 많이 먹고, 웃고, 떠들고 하는 거 보는 게 지금 내가 사는 낙이다.”
“정말…… 이세요?”
“그래, 정말이지.”
그러더니 진혁의 어머니가 다시 눈을 마당으로 돌렸다. 미심쩍어하는 희나의 마음속으로 진혁의 어머니의 진심이 흘러들어 왔다.
“그냥 아무 거 없이, 그거면 충분한데. 왜 그렇게 불만이 많고, 기대가 많았었는지.”
“…….”
“그 애한테 내가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회한이 묻어나는 말에 희나는 숙연하게 고개를 숙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희나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선생님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요?”
“둘이 같이 해보자. 우리 마음이 굳었다는 걸 알면 진혁이도 뜻을 굽힐지도 몰라.”
“그러네요.”
진혁의 어머니가 주름진 손을 뻗어 희나의 손을 잡았다.
“이런 부탁 한 걸로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원망 안 해요.”
“나는 이미 가족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되면 정말 피가 이어진 가족이 된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벅차서 희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눈알을 굴리다가 시선이 마당의 나무 그루터기로 향했다.
잠시 황량한 그 그루터기를 바라보던 희나는 그 안에 혹시 깃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넋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당신이 받아야 할 것, 누려야 할 것을 내가 가지고 있어요. 당신의 빈자리에 있는 것이 처음도 아니죠. 당신을 위해 마련되었을 잠자리, 당신의 집, 당신의 가족에게 구원받았어요.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돌려줄게요. 내가 당신의 딸을 살려줄게요.
희나는 그렇게 속으로 다짐했다.
희나는 진혁의 어머니와 함께 진혁을 설득할 방도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밤이 무르익었을 즈음 희원이 거실로 들어섰다.
“미래는 어쩌고 들어와?”
“승수 형이 또 왔더라고.”
놀란 희나의 질문에 희원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승수가 또 왔다는 말에 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렇게 자주 병원에 오다니, 선생님이 몰래 부탁이라도 한 걸까.
희나가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희원이 방에 들어가서 가방을 두고 나왔다. 그리고 곧 다시 마루로 내려가는 희원을 진혁의 어머니가 불렀다.
“어디 가니? 밥은 먹었어?”
“나가서 먹고 올게요.”
“왜, 집에서 안 먹고?”
“얘기 아직 안 끝난 거 아니에요?”
희나와 진혁의 어머니는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냥 집에서 밥 먹어. 이제 거의 마무리됐으니까.”
희나가 얼버무리자 진혁의 어머니가 기다란 치맛자락을 쥐고 일어섰다.
“그래, 배고프지. 금방 차려줄 테니 거실에서 좀 쉬고 있거라.”
희나는 그녀를 따라 일어서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진혁의 어머니와 짧게 이야기를 나눈 뒤 거실로 나와 희원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희원까지 편으로 포섭해놓는 것이 좋을 듯싶어서였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희원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세운 채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도 선생님 설득하는 거 좀 도와봐. 그런 얼굴 하지 말고.”
“내 얼굴이 어때서.”
“똥 씹은 얼굴이고만. 너도 선생님 편이야?”
입을 비죽거리는 희원에게 희나가 쏘아붙였다.
희원은 머리를 감싸 쥔 채 골치 아픈 표정을 짓더니 작게 내뱉었다.
“나야 원래 너보단 진혁이 형 편이긴 한데…….”
“한데, 뭐.”
“그 꼬맹이 아슬아슬한 거 뻔히 보면서 반대는 못 하겠다.”
동조하는 듯한 희원의 말에 희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밝아진 희나의 얼굴을 쳐다보며 희원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근데 너 말이야.”
“나 뭐?”
“뭐 니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만…….”
희원은 선뜻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우물거렸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희원을 바라보던 희나는 그가 머쓱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입 모양이 아무래도 괜찮냐고 묻고 싶은데 낯간지러워서 못 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두 사람은 서로 걱정 같은 건 접어 두고 살아온 남매인 것이다.
“내 몸은 내가 알아서 간수하니까 너는 참견 마.”
“말 한번 이쁘게 한다.”
그러고 괜히 근질근질해서 둘은 서로를 모르는 척한 채 잠잠히 앉아 있었다.
10분쯤 지난 뒤 진혁의 어머니가 밥상을 들고 거실로 들어왔다.
새하얀 쌀밥을 우적우적 먹으면서도 희원은 어딘지 생각에 골몰해 있는 것 같았다.
진혁의 어머니와 희나가 새로 무친 나물에 대한 잡담을 나누고 있는데 희원이 불쑥 말했다.
“근데 내 보기엔 형이 말도 못 꺼내게 할 거 같은데.”
“다 같이 설득하면 결국 뜻을 굽히지 않으려나?”
희나의 말에 희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형 한번 결정한 건 누가 뭐래도 바꿀 거 같지 않은데. 아마 엄청 혼만 날걸.”
“그래도 우리가 애도 아니고, 어머니도 같이 얘기하는데 혼이야 나겠어? 나도 내가 결정한 건 안 바꿔.”
“헹, 니가 형 이길 거 같냐?”
자신 없게 말하는 희나를 희원이 비웃었다. 그를 째려본 뒤 희나는 숟가락으로 밥을 쑤셔대면서 진혁의 어머니에게 침울하게 물었다.
“선생님이 반대하면 절대 수술 못 하는 건가요?”
“아니, 사실은…… 그런 건 아니야.”
진혁의 어머니는 살포시 고개를 저으며 나직이 대답했다.
“미래가 진혁이를 아빠라고 부르지만, 미래 친권은 나한테 있어. 그러니까 아마 반대해도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하지만…….”
진혁의 어머니가 말을 맺진 않았지만 희나는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결벽한 성격에, 몰래 하면 다시는 안 보려고 할지도 모른다.
밥을 먹으며 셋이 머리를 모은 끝에 일단 어머니가 먼저 일대일로 말을 꺼내 보기로 했다. 어느 정도 운을 띄운 뒤 희나가 끈질기게 설득하기로 한 것이다.
희나는 자신이 먼저 나서서 그러기로 한 걸로 하자고 제안했다. 진혁의 어머니는 몸 둘 바를 몰라 하면서도 희나의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식사 도중 진혁에게서 자정이 다 되어야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기숙사에 돌아가서 편히 있으라고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희나는 거절했다. 어떻게 해서든 오늘 밤 안에 결론을 보고 싶었다. 돌아가도 쉬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마침내 바깥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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