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선택 (6)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자 미래는 짜증을 내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서럽게 우는 얼굴은 보기만해도 안쓰러웠지만 희나는 말을 취소하지 않았다. 대신 발버둥 치는 미래를 꼭 끌어안고 토닥토닥 달랬다.
한참을 운 미래는 떼를 써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히끅거리면서 희나의 옷을 만지작거리다가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는 아빠만 좋아하는 거지. 미래는 싫어?”
“언니는 미래를 좋아해.”
“정말?”
눈물에 젖은 눈으로 간절히 쳐다보는 미래를 똑바로 마주하고 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언니는 미래 정말 좋아해.”
희나의 품속에서 눈을 깜빡이던 미래는 고개를 숙이더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할 말은 있는데 어휘력이 부족해서 꺼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 미래를 잠시 바라보던 희나가 먼저 말을 꺼냈다.
“미래는 언니가 엄마가 아니면 싫은 거야?”
곰곰이 생각하다가 미래는 고개를 저었다. 내내 처져 있던 희나의 입매가 조금 올라갔다.
“그럼 계속 지금대로 괜찮지?”
“응.”
미래는 완전히 납득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화는 풀린 것 같았다.
희나의 가슴에 얼굴을 폭 묻고 미래는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물었다.
“이제 미래는 아빠한테 아빠라고 하면 안 돼?”
“아니, 미래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어떻게 해도 괜찮아.”
“진짜?”
“그럼.”
“그럼 미래한테 왜 아빠가 아빠 아니라고 했어?”
“어떻게 부르는지는 중요한 게 아냐.”
희나는 갸름한 얼굴을 좌우로 흔들며 미소 지었다.
“그냥 미래에게 다른 아빠가 있다는 거, 그리고 아빠가 사실은 외삼촌이지만 앞으로 계속 미래를 아빠보다 더 좋아할 거라는 거만 생각하면 돼.”
미래는 완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영리하다 해도 어린아이가 이해하기에는 쉽지 않은 얘기였다.
“그럼, 그럼 미래는 이제 어떻게 해야 돼?”
“미래는 그냥 지금처럼 언니랑, 아빠랑, 오빠랑 재미있고 건강하게 있으면 되는 거야.”
눈물에 잔뜩 젖은 미래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희나는 밝아진 미래의 얼굴을 보면서 조금 안심했다. 미래가 더 늦기 전에 진혁이 생부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고, 가능한 한 충격 없이 받아들여주길 바랐을 뿐, 호칭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미래가 계속 진혁을 아빠라고 부른들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단 한 번 만났을 뿐이지만, 진혜의 딸에게 엄마로 불리는 것이 너무나 꺼림칙했다. 엄마 같은 건 되고 싶지 않았기에, 지금 이대로도 좋다고 미래가 말해준 것이 기뻤다.
“미래도 오늘 이것저것 안 김에, 가족들 이름 외울까?”
“응, 나도 이름 알고 싶어.”
“일단은, 아빠 이름은 유진혁이야. 할머니가 진혁아, 하고 부르시잖아.”
미래는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물었다.
“그럼 언니는 희나야?”
“응, 그게 언니 이름.”
“그래서 할머니가 희나라고 하는구나.”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는지 미래는 이마를 탁 쳤다.
“우와 신기하다. 희나야, 희나.”
“응, 희나야.”
“희나야. 헤헤. 나는 미래야.”
“……희나인 건 맞는데 미래가 희나라고 부르면 안 되지.”
“이름 있는데 왜 언니라고 불러야 돼?”
“나이 많은 사람한테는…….”
희나는 설명하려고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곧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런 개념을 알려주는 건 희나에게는 무리였다.
희나가 한참 동안 미래의 질문 공세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어? 희원 오빠!”
신나게 외치는 미래의 말에 뒤를 돌아본 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해도 지지 않았는데 정말로 희원이 병실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너 왜 벌써 왔어?”
“아줌마가 일찍 가봐 달라고 하던데.”
“어머니가? 왜?”
“글쎄. 나도 몰라.”
희원의 무성의한 대답에 핀잔을 주려는데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액정에는 ‘어머니’라고 떠 있었다.
개인적으로 전화를 걸어 온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희나는 당황했다.
“여보세요?”
[희나야, 희원이 만났니?]
“아, 네. 지금 막 왔어요. 집에 무슨 일 있나요?”
[내가 희나에게 할 얘기가 있어서 희원이한테 좀 일찍 가달라고 했어.]
“할 얘기요?”
희나는 긴장해서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왠지 꺼림칙했지만 어쨌든 어른이 말하는데 대화를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네. 그러면 바로 돌아갈게요. 조금 이따가 봬요.”
[그래, 그럼 집에서 기다리마.]
그걸로 통화가 끝났다. 전화를 끊고 멍하니 액정을 바라보던 희나는 진혁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를 발견했다. 통화중에 걸려 온 모양이었다.
희나는 곧장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희나야.]
“선생님, 지금 집이에요?”
[학교에서 아침에 와달라고 전화가 와서 나왔어. 아무래도 오늘은 많이 늦어질 거 같아서 전화했어.]
진혁이 자리를 비웠단 말에 희나는 내심 놀랐다.
희나는 진혁을 떠보았다.
“선생님 집에서 언제 나왔어요?”
[방금.]
그렇다면 진혁의 어머니는 진혁이 나가자마자 전화한 셈이다.
그에게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희나는 그냥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머니가 희나와 둘이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다면 진혁은 사전에 스스로 나서서 양해를 구했을 것이다. 모르는 척 한 발 빼고 있을 성격이 아니니 그쪽에서 먼저 별말이 없다면 정말 모르는 게 맞을 거라고 희나는 생각했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시려는 걸까.’
하지만 진혁 모르게 할 얘기가 무엇일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희나는 잔뜩 몰려오는 불안한 생각들을 무시하려 애쓰며 미래를 희원에게 부탁하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
희나가 마루로 올라가니 문이 열린 거실에 앉아 있는 진혁의 어머니가 보였다.
“왔니?”
“네, 늦어서 죄송해요.”
“아니, 늦기는 무슨. 덥지?”
“괜찮아요.”
날씨는 무척이나 더웠지만 희나는 고개를 저었다. 진혁의 어머니는 선풍기를 내오며 희나를 손짓했다.
“일단 여기 시원한 데에 좀 앉거라. 주스 마실래?”
“아, 네. 주세요.”
주스 같은 건 전혀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희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말이 끊기거나 어색할 때 만지작거릴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눈길로 주방으로 들어간 진혁의 어머니의 기색을 살폈다.
그녀는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찬장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주스 외에도 가벼운 다과를 준비하는 듯했다.
분위기를 보니 화가 난 것처럼은 보이지 않아서 다소 안심이 되었다.
예쁘게 깎은 과일을 쟁반에 올린 진혁의 어머니가 주스 잔을 들고 보조 냉장고 문을 열었다. 커다란 문 안으로 한가득 들어 있는 주스가 보였다.
희나와 희원이 군식구처럼 붙어 있긴 하지만 그래 봤자 다섯 명인데, 진혁의 어머니는 항상 넘치도록 주스를 만들었다.
커다란 잔 가득 주스를 따라서 그녀가 거실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저녁은 먹었니?”
“아직 배 안 고파서 괜찮아요.”
“그래…….”
잠시 침묵이 흘렀다. 희원을 미리 보내서 빨리 오기를 종용했으니 할 말이 있을 텐데, 진혁의 어머니는 말을 꺼내지 못한 채 망설이고 있었다.
한동안 기다리다가 결국 희나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저기, 무슨 일이세요?”
“…….”
“무슨 일이든 편하게 말씀하세요. 제가 뭔가 잘못한 게 있나요?”
“그런 게 아니야. 사실은…….”
진혁의 어머니는 황급히 팔을 내저으며 희나의 말을 부정했다. 그리고 뒤쪽을 부스럭거리더니 무언가를 내밀었다.
뭔가 하고 그쪽을 본 희나의 눈이 둥글게 뜨였다.
“이걸 왜 어머니가 가지고 계세요?”
그녀가 내민 것은 병원의 봉투였다. 내용물을 보지 않아도 희나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희나와 희원이 받았던 신장 이식 적합성 검사 결과지였다.
“일부러 보려고 했던 건 아니다. 가방에서 서류를 찾다가 우연히…….”
희나는 저도 모르게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얼마 전에 미래의 보험금 청구 서류를 접수하도록 진혁의 어머니에게 병원 서류가 든 가방을 주었던 것이다. 이런저런 서류들을 그냥 가방에 쑤셔 넣어 두었었는데 그중에 섞여 있었던 모양이다.
“진혁이한테 검사 결과에 대해서 말했니?”
“네…….”
희나가 조심스럽게 대답하자 진혁의 어머니가 살짝 입술을 깨물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진혁이가 이식하지 말라고 했나 보구나.”
“어떻게 아셨어요?”
“사실은 전에도 이식해준단 사람들이 있었어.”
승수를 비롯한 몇몇에 대해 들은 바는 있었지만 혹시 다른 누군가가 있을까 싶어 희나는 슬쩍 떠보았다.
“누가요?”
“영선이가.”
순순히 대답하던 진혁의 어머니는 희나가 영선이란 사람에 대해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는 덧붙였다.
“어린이집 여선생인데, 미래네 반 담임이야.”
의외의 인물이었다.
희나는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감추려 애쓰며 물었다.
“그분이 왜 신장 이식을 해준다고 하셨어요?”
“그냥 뭐, 진혁이가 계속 그 댁 아버지 약 구해다 주고 그랬거든. 난치병으로 오래 고생했는데, 그 약이 국내에서는 구하기 힘든 거였다나 봐. 그게 꽤나 고마웠던 모양이지.”
희나는 그녀를 처음 봤을 때 그녀가 진혁이 뭔가를 구해다 준 것에 대해 고마워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게 그런 의미였던 모양이다.
있을 법한 일이긴 했지만 뭔가 석연찮았다.
아무리 아버지의 약을 구해줬기로서니 젊은 여자가 신장 이식을 자처할까. 절대 쉬운 결심이 아니다.
미심쩍은 표정을 짓고 있는 희나의 기색을 살피던 진혁의 어머니가 털어놓았다.
“사실은 내가 진혁이랑 그 아가씨랑 맞선을 주선했었다.”
희나는 살짝 쇼크를 먹었다. 그 도둑고양이 처자를 진혁의 어머니가 내심 며느리로 마음에 두고 있었다니.
어쩌면 미래가 선생님이랑 아빠가 결혼할 거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것도 할머니의 영향이 있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격을 받은 것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진혁의 어머니가 변명하듯 말을 이어 갔다.
“집안도 자꾸만 어수선하고, 진혁이가 계속 마음을 못 잡는 것처럼 보여서……. 그때는 진혁이 아버지도 있을 때고, 그쪽도 아버지가 와병중이니까…… 둘이 결혼하면 어떻게든 해 나가지 않겠나 싶어서 밀어붙였어. 그쪽에서도 반기는 눈치였고. 미래 아픈 거 선생으로서 보기 괴롭다고 먼저 검사도 자청하고 나서면서 적극적이었지.”
“그런데 왜…….”
희나는 잘 안 됐냐고 물으려 했지만 말을 맺지 못했다.
“진혁이가 결혼 생각 없다고 딱 자르더구나. 그래서 마음에 둔 여자라도 있냐고 물으면 입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서울에 누가 있나 보다 짐작은 했는데.”
진혁의 어머니는 말을 맺는 대신 희나를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희나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수줍게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진혁의 어머니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진혁이는 누구든 수술대에 오르겠다는 사람은 다 막을 모양이야. 진혁이 친구나 마을에서도 넌지시 뜻을 내비쳐 온 사람이 꽤 많았어. 실제로 검사도 받았고.”
희나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거북이와 경부를 통해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친구들끼리 진혁 몰래 어머니에게 연락을 해서 검사를 받았다고 했다. 거북이와 경부는 부적합이었지만 수진은 적합이었다.
이미 진혁에게 차인 이후였는데도 그녀는 흔쾌히 수술대에 오르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진혁이 완강히 수술을 막았다고 했다.
“선생님은 왜 그렇게 반대하는 걸까요…….”
“그러게나 말이다. 천성 때문인지 저 좋다는 여자한테 그런 짓은 시킬 수 없는 모양이야.”
한숨을 내쉬며 진혁의 어머니는 근심 섞인 시선을 마루 밖으로 두었다. 한여름 밤인데도 시골이라 그런지 바람이 불어와 마당가의 나무들을 흔들고 있었다.
무성한 가지들이 흔들리는 모습이 나름 운치가 있었지만 진혁의 어머니의 눈동자는 중간에 이 빠진 것처럼 베어진 나무 그루터기를 향하고 있었다.
그곳을 눈이 부신 듯 바라보다가 곧 눈가를 짚었다.
“희나야, 미래를 살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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