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선택 (5)
귀가 확 트이는 것 같은 이야기였다. 희나는 잔뜩 흥분해서 양손을 붕붕 흔들며 말했다.
“그런 방법이 있는데 왜 말을 안 했어요?”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가볍게 말할 만한 일이 아닌 것 같아서.”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속 끓였던 걸 생각하면 얄미웠다.
희나는 진혁에게 눈을 곱게 흘겼지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역시 생각 없이 미래를 앓게 만들 사람이 아니었다.
기뻐하는 희나를 보고 진혁이 다른 것도 털어놓았다.
“일단 투약 하나에만 기대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출국하면 교수님이 인맥을 동원해서 미국에서 신장 이식을 받을 수 있는 방법도 알아봐 주신다고 하셨어.”
“외국인인데, 이식을 받을 수 있어요?”
“미국에 친척이 있어.”
거기까지 말하고 진혁은 잠시 텀을 둔 뒤 말을 이었다.
“미래는 어쨌든 고아니까, 입양시키면 방법이 없는 건 아냐.”
잔뜩 치켜 올라가 있던 희나의 입매가 조금 둔해졌다.
희나는 잠깐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고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선생님, 그럼 미래는 미국에 계속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마 그렇게 되겠지.”
“미래가 옆에 없어도 괜찮아요?”
묻고 나서 희나는 씁쓸해 보이는 진혁의 얼굴을 보고 스스로 답을 깨달았다.
그녀는 진혁의 커다란 손을 깍지 낀 채 만지작거리며 말의 방향을 조금 돌렸다.
“미국으로 보낸다고 하면 미래가 충격을 받지 않을까요. 선생님을…….”
아빠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꺼내려다 희나는 낮에 있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그것에 대해 말을 할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방금 진혁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았으니 말해버리기로 했다.
“선생님, 나 오늘 미래랑 얘기한 게 있는데요.”
“무슨 얘기?”
“나보고 선생님이랑 나랑 혹시…….”
말은 시원스레 꺼냈는데 뜻밖의 부분에서 막혀버렸다.
희나가 머뭇거리자 진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뭐?”
“그니까요. 있잖아요.”
“뭐가 있어?”
“겨, 결혼하면…….”
희나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쿡쿡 웃고 있던 진혁도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뭐?”
“내가 자기 엄마가 되는 거냐고 물어봤어요.”
진혁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빨리 사실을 밝히는 게 좋겠지?”
“그렇겠죠. 그런데 미래는 엄마가 선생님 여동생인 걸 모르는 걸까요?”
“글쎄.”
“내가 엄마가 되는 거냐고 물어보는 걸 보면 아빠의 부인이 엄마라는 건 아는 거 같은데. 그렇다면 엄마가 선생님 부인이 아니었단 건 알 텐데요.”
진혁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잘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용히 말했다.
“금방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너무 쉽게 생각했나 봐.”
“미래한테 말할 거예요?”
“응, 그래야겠지.”
쓸쓸해 보이는 진혁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희나가 불쑥 말했다.
“내가 말할게요.”
“응?”
“선생님이 말하는 거보다 내가 말하는 게 나을 거 같아요.”
“그럴 거 없어. 별로 좋은 역할도 아닌데.”
“내가 할게요. 선생님한테 듣는 거보단 그게 나을 거예요.”
아빠라고 믿었던 사람에게 딸이 아니란 말을 듣는 건 싫을 거다.
결심한 듯한 희나의 눈동자를 보면서 진혁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너한테 내가 너무하는 거 같아. 고생만 시키고.”
“고생은 무슨. 나 지금 너무 좋아요.”
“좋다고?”
“응. 같이 앞으로의 얘기 같은 거 하니까 막 어른 된 거 같고. 선생님이 이런저런 고민 얘기하는 것도 너무 좋아요.”
“버릇돼서 매일 한탄만 하면 어쩌지?”
즐거워 보이는 희나의 얼굴을 보며 진혁이 농담을 했다.
희나가 진혁의 품으로 파고들자 그가 꼭 감싸 안고 입을 맞췄다. 둘은 깊은 키스를 나눈 뒤 함께 침대로 들어가서 나란히 누웠다.
“어떻게든 잘해 나갈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러면 좋겠다.”
진혁을 올려다보다가 희나는 시선을 돌렸다.
미래가 쓰러진 후 함께 잠들어도 두 사람 다 의식적으로 관계를 피하고 있었다.
희나는 진혁의 품에 파묻힌 채 눈을 감았다.
***
“희나 씨, 정말 고마웠어. 다음에 꼭 문병 올게.”
영은은 몇 번이나 고개를 조아린 뒤 아쉬워하는 미나의 손을 끌다시피 하며 병실을 나갔다.
두 사람의 모습이 문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희나는 얼른 미래의 침대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간 줄곧 미래에게 말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만 마땅한 기회가 없었다. 제법 친해졌다고 해도 영은 모녀 앞에서 이야기하긴 껄끄러웠던 것이다.
마음에 감춘 이야기가 있다 보니 희나도 미래의 순진한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민망해서 약간 사이가 어색해졌다.
미래 역시 겉보기에 큰 변화는 없었지만 희나가 평소와 같지 않다는 건 감지한 듯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런 미래가 가엾고 미안해서 마음이 불편한 상태로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영은 모녀가 퇴원한 것이다.
희나는 빨리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조바심이 나 있었다.
“미래야, 언니랑 잠깐 얘기 좀 할까?”
“응. 무슨 얘긴데?”
자신이 미래에게 말하겠다고 진혁 앞에서 장담도 했고 말까지 꺼낸 희나였지만 막상 미래를 마주하니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말할지 시뮬레이션도 몇 번이나 해보았지만 미래의 천진한 눈동자를 마주하니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았다.
희나가 어물어물거리고 있는데 미래가 불쑥 말을 꺼냈다.
“언니 전에 했던 얘기 때문에 그래?”
“전에 했던 얘기?”
“엄마 얘기.”
미래의 말에 희나는 흠칫 놀랐다. 어떻게 안 거지? 영리한 아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눈치가 참 비상하다.
희나는 머뭇거리다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엄마 얘기. 미래는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어?”
미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언니가 미래 엄마 할 거야?”
“언니는 미래 엄마가 될 수도 없고 되지도 않아.”
희나는 가감 없이 생각하고 있던 대로 말해 버렸다.
미래는 입술을 살짝 실룩이더니 중얼거렸다.
“아빠가 미래 엄마가 되는 사람이랑 결혼하면 좋겠다.”
말하자마자 똑똑한 아이는 자신이 한 말이 어떻게 들릴지 금방 깨닫는다.
곧장 찔끔한 표정을 지은 미래가 희나의 눈치를 보았다.
“언니, 화났어?”
“아니.”
화난 건 아니었지만 침울한 목소리가 나왔다.
미래의 자그마한 손이 희나의 옷자락을 슬며시 당겼다.
“저기 언니, 미래는 언니가 제일 좋아. 언니가 아빠랑 결혼해도 돼.”
물론 진혁을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정식으로 사귄 지는 겨우 두 달 정도인데 이런 말을 듣는 건 머쓱하다.
희나는 침대 위로 올라앉아서 미래를 마주 본 자세로 무릎에 앉혔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미래는 엄마 기억나?”
미래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희나는 다른 질문을 했다.
“미래는 그러면 엄마 이름 알아?”
이번에는 미래가 고개를 저었다.
진혜를 생각하며 잠시 짠한 마음이 든 희나는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미래, 혹시 언니 이름은 알아?”
다시 도리도리. 희나는 살짝 충격을 먹었다. 물론 자기소개 같은 거 한 적 없긴 하지만 이름을 모른다니 충격이었다. 희나는 다시 질문했다.
“아빠 이름은?”
“몰라.”
“미래 어린이집 선생님 이름도 몰라?”
“응. 우리 선생님은 은하반 선생님.”
이름이 아니라 호칭으로 부르는 사람은 이름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려다 희나는 미심쩍은 목소리로 미래를 떠보았다.
“그럼 혹시…… 언니 동생 이름은 알아?”
“희원 오빠!”
미래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냉큼 대답했다. 이 녀석 진짜.
희나는 미래의 뺨을 꼬집었다. 표정이 꼬집어주고 싶을 만큼 귀엽기도 했지만 살짝 감정도 섞여 있는 괴롭힘이었다. 그리고 희원에 대해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하려는 미래를 멈추게 한 뒤 진지하게 말했다.
“미래도 엄마, 아빠 이름 정도는 알아야지.”
“이름?”
“미래 엄마 이름은 유진혜야.”
“유진혜? 그게 엄마 이름이야?”
“그래. 미래 엄마는 유진혜고, 지금 네 옆에 없어도 그 사실은 계속 변하지 않아. 계속 미래 엄마인 거야.”
미래는 작은 입으로 ‘유진혜’란 이름을 몇 번 되뇌더니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미래네 엄마는 죽었잖아. 그래도 계속 미래 엄마는 유진혜야?”
“그래, 옆에 없어도 계속 미래 엄마야.”
“그럼 난 안 죽은 엄마는 앞으로도 없는 거야?”
“그래.”
“힝…….”
미래가 서글픈 표정으로 조르듯이 쳐다본다. 사실은 엄마가 있다고 말해주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지만 희나는 잠자코 있었다. 미래의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다.
“나도 없어.”
미래의 눈물이 떨어지기 직전 희나가 조용히 말했다.
미래가 눈을 깜빡거리며 희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엄마 없어. 그래도 언니는 안 울잖아.”
“언니는 어른이고 난 애기잖아.”
“미래도 애기 아니야. 이제 어린이지. 그러니까 미래도 울지 마.”
말장난 같은 말인데 통했는지 미래는 울음을 터트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신 잔뜩 침울해진 얼굴로 희나에게 물었다.
“그럼 아빠는?”
“응?”
“아빠는 이름이 뭐야?”
희나는 잠시 어떻게 말을 할까 고민했다. 망설여졌지만 지금이 말할 타이밍이란 것을 깨닫고 뜸을 들이다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미래 아빠 이름 몰라.”
“응? 언니, 아빠 이름 몰라?”
희나가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했는지 미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천진한 얼굴에 마음 한구석이 아렸지만 희나는 마음을 단단히 굳히고 조용히 말했다.
“미래가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은 미래 아빠가 아니야.”
“어?”
“아빠는 엄마 남편이잖아. 미래 아빠는 엄마의 오빠인 거 알아?”
입을 쩍 벌린 채 혼란에 빠진 얼굴이었지만 미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들은 건진 의문이었지만 희나는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사실 아빠는 외삼촌이라고 불러야 돼.”
“외삼촌?”
“그래. 사실 외삼촌이고 아빠가 아니야.”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미래는 얼굴을 확 구기더니 험악하게 말했다.
“아빠는 아빠야!”
“아빠 아니야.”
희나가 큰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단호하게 말하자 미래가 침대로 벌렁 넘어지더니 소리를 질렀다.
“언니 싫어. 바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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