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선택 (4)
“어, 그거 저한테 주세요!”
희나는 양손에 짐을 바리바리 든 채 걸어오고 있는 진혁의 어머니를 발견하곤 황급히 차에서 내렸다.
진혁의 어머니는 뛰어 내려온 희나에게 고마워하며 짐의 반을 넘겼다. 입원 생활 중 나온 빨랫감이나 위문품이 잔뜩 들어 있는 봉투를 함께 차 트렁크에 실은 뒤 둘은 차에 올라탔다.
“승수 덕분에 간만에 집에 들어가네. 고맙기도 하지.”
“그러게요. 고생 많으셨어요. 많이 피곤하시죠?”
“내가 피곤은 무슨, 네가 안쓰럽지.”
희나를 다독거리던 진혁의 어머니는 안전벨트를 매려다 말고 자신의 이마를 쳤다.
“에그머니, 내 정신 좀 봐.”
“왜 그러세요?”
“영수증 받아야 하는데 원무과에 들르는 걸 깜빡했네.”
미래에게는 신생아 때 들어둔 보험이 있었다. 의외로 진혜가 꼼꼼하게 들어둔 덕택에 치료비에 큰 도움을 받고 있었다.
매달 제출해야 하는 서류 준비를 위해 바로 병원으로 돌아가려는 진혁의 어머니를 희나가 황급히 붙잡았다.
“괜찮아요. 제가 그저께 준비했어요.”
희나는 증명이라도 하듯 서류가 든 가방을 내보이다가 얼굴을 붉혔다. 근래 전혀 정리하지 않아서 이런저런 서류들이 마구잡이로 쑤셔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진혁의 어머니는 짐짓 못 본 척하며 희나를 칭찬했다.
“애 옆에 있느라 정신도 없었을 텐데 언제 그렇게 준비를 했어?”
“말씀하시자마자 했어요. 저도 잊어버릴 거 같아서.”
운전을 하고 있는 희나의 팔을 토닥인 후 진혁의 어머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잘됐네. 내일 보험 처리도 하러 가야 할 거고 바쁘겠네.”
“제가 오전부터 나와 있을 테니 걱정 말고 일 보세요.”
“여러 가지로 참 고맙네.”
두 사람은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면서 차를 달려 과수원으로 돌아왔다.
승수가 기껏 생각해줬지만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희나가 마당 한쪽에 차를 대는데 문 안쪽에서 옷을 차려입은 진혁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희나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벌써 와?”
“선생님이야말로 어디 가요?”
“희원이가 피곤한지 잠들어버려서.”
진혁은 거실 쪽을 힐끗 쳐다보며 대답하고는 다시 물었다.
“금방 가려고 했는데. 어떻게 온 거야?”
“승수 오빠가 봐준다고 했어요.”
“승수가?”
진혁이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희나는 어렴풋이 하고 있던 의혹을 지워냈다. 혹시 진혁이 이식을 단념하게 하려고 승수를 보낸 건 아닌가 의문을 품었던 것이다.
하긴 이미 며칠 전에 끝난 이야기를 다시 꺼낼 이유도 없을 뿐더러, 진혁은 뒤에서 그런 공작을 꾸밀 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희나는 순순히 납득하고 대강 사정을 설명했다. 진혁은 난감한 미소를 짓더니 곧 희나를 잡아끌었다.
“나중에 고맙다고 해야겠네. 어쨌든 들어가서 좀 쉬어.”
진혁이 차에서 짐을 내리는 사이 희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진혁의 어머니는 잊어버릴까 봐 그런 건지 굳이 희나의 서류 뭉치가 든 가방을 진혁에게서 받아 들고서야 발을 뗐다.
그렇게 두 사람이 거실에 들어서자 소파 위에 길게 늘어져 있는 희원의 모습이 보였다.
“에구, 이런 데서 잠들어버리고.”
진혁의 어머니는 얼른 방으로 들어가더니 이불을 내와서 희원의 배를 덮어주었다.
거실로 돌아온 진혁이 희나를 보며 다정하게 물었다.
“저녁 먹고 왔어?”
“집에서 먹으려고 그냥 왔지. 희원이는 밥 챙겨 먹이고 재운 거야?”
진혁의 질문에 어머니가 대신 대답했다.
그가 어머니의 물음에 대답하기도 전에 정신없이 자고 있던 희원이 눈을 흐릿하게 뜨더니 잠꼬대처럼 말했다.
“밥, 밥 나도, 나도 먹을래요.”
그 와중에도 밥이란 단어가 들린 모양이다.
정신도 제대로 못 차리면서 팔을 휘저으며 밥, 밥 하는 희원을 보고 진혁의 어머니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금방 차려줄 테니까 잠깐 일어나서 얼른 먹고 자렴.”
그렇게 말하며 진혁의 어머니가 희원을 내려다보는 눈빛과 말투의 살가움은 희나를 대할 때와는 다른 데가 있었다.
마치 아들을 보는 것 같은 그 눈을 보다가 문득 희나는 그녀가 본래 진혁을 심하게 편애했었다는 것을 되새겼다.
물론 순간적으로 그런 ‘사실’만을 깨달았을 뿐 서운한 감정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누군가가 희원을 저렇게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준다는 사실이 왠지 뭉클했다.
“뭐해? 멍하니 서서.”
희나의 어깨에 커다란 손이 얹혔다. 희나가 뭔가 말하려는데 희원이 부스스 일어났다. 그리고 주변을 멍청히 두리번거리더니 놀란 어조로 말했다.
“어? 다들 여기 있어요? 애기는?”
희원은 미래를 꼬맹이라거나 애기라고 부르곤 했다. 애 취급하면서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희나가 보기에는 미래가 도리어 그 호칭을 좋아해서 별로 효과는 없는 듯했다.
“승수 오빠가 대신 병원에 있어. 오늘 밤 내내 있을 거라고 너도 집에서 자래.”
“형님이? 무슨 일이지?”
질문이었지만 딱히 대답을 구하는 것은 아니었는지 희원은 관심 없는 듯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배를 벅벅 긁었다.
“잠 깼으면 가서 샤워나 하고 와. 땟국물이 줄줄 흐른다.”
희나의 타박에 희원은 귀찮은 기색이었지만 순순히 일어나서 욕실로 걸어갔다. 그러나 고양이 세수를 했는지 겨우 10분도 지나기 전에 돌아왔다.
곧 푸짐한 저녁상이 차려지고 네 사람은 상 옆에 둘러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둘 다 많이 피곤하지? 밥 먹고 느긋하게 쉬어.”
“괜찮아요.”
“안 히혼해여.”
희나는 멀쩡하게 대답했지만 희원은 하품을 하는 바람에 해괴한 말을 내뱉었다.
희원은 끊임없이 하품을 하면서도 순식간에 밥그릇을 비워 내고는 중얼거렸다.
“흐아암, 맥주나 한잔 마셨으면 좋겠다.”
“맥주? 에그, 막걸리는 있는데.”
“어머니, 작업실에 맥주 있어요. 제가 가져올게요.”
그렇게 말하고 진혁이 선뜻 일어서자 희원이 냉큼 따라 일어섰다. 술 생각에 피로도 가신 듯 그는 나가려는 진혁을 만류하고는 후다닥 작업실로 달려가 맥주를 잔뜩 들고 왔다.
그 사이 진혁의 어머니가 냉장고에 있던 소시지를 부치고 수박도 한 덩어리 썰어 내왔다. 아직 철이 아니라 수박은 크기도 작고 색깔도 옅었지만 충분히 달고 맛있었다.
그렇게 네 사람은 밥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다시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소리를 낮춘 TV를 켜 두고 술잔을 돌리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이가 없는 밤이 오랜만이라 느긋한 분위기였다. 벌레들이 우는 소리가 청명하게 들려오고 문지방에 걸린 풍경이 부드럽게 울렸다.
밤이 깊었을 무렵, 맥주를 많이 마셔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오던 희나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파르스름한 방충망 건너로 소담한 가족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소파에 기댄 채 긴 다리를 뻗고 느긋이 부채질을 하고 있는 진혁. 그리고 그의 무릎을 벤 채로 누워서 수박을 끊임없이 먹고 있는 희원. 건너편에서 과일을 깎고 잔을 채우며 웃고 있는 진혁의 어머니.
입가 가득 미소를 띤 채 그 광경을 바라보던 희나의 표정이 빈자리를 느끼고 어두워졌다.
희나가 어렸을 때부터 그려왔던 완벽한 그림. 그 그림의 한가운데에 있어야 할 미래가 빠져 있었다.
그녀는 이 균형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해보고 싶었다.
분명히 다시 이야기를 꺼내면 진혁은 화를 낼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승수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라 마음이 무거웠지만 시도조차 해보지 않을 순 없었다. 진혁만 마음을 돌린다면 전부 해결되는 것이다.
그녀는 그를 설득해 보기로 마음먹고 입술을 깨물었다.
샤워를 마친 희나는 작업실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작은 응답이 들려오자 곧장 문을 열고 들어섰다.
스탠드 불만을 켠 채 책상에 앉아 있던 진혁이 고개를 돌려 눈짓을 했다.
“바빠요?”
“아니, 괜찮아. 왜?”
“그냥요, 같이 앉아 있고 싶어서.”
희나의 말에 진혁은 픽 웃더니 소파로 따라와서 옆에 앉았다. 바쁘지 않다고 했지만 할 일이 남은 듯 책을 손에 쥔 채였다.
그는 희나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얼굴을 쓸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좀 안 좋은데.”
다정한 물음에 희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진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잠시 희나의 머리를 쓸어주던 진혁은 그녀가 그대로 줄곧 잠잠히 있자 술에 취해 잠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옆에 놓아두었던 책을 집어 들었다.
한동안 책장을 넘기는 섬세한 손가락의 움직임을 쳐다보던 희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선생님.”
“응? 안 잤어?”
“정말 후회 안 할 수 있어요?”
“후회?”
진혁은 반문하자마자 주어도 없는 희나의 말의 의미를 깨달은 것 같았다. 섬세한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그가 어둡게 말했다.
“또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나, 후회할 거 같아요.”
“…….”
“미래가 만약에 가버리면, 나는 못 살 거 같아요.”
전처럼 화를 내거나 격한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혁은 잠잠했다.
꽤 오랫동안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그 무반응이 불안해서 희나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단정한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어쩌면 마음이 조금 바뀐 건지도 모른다고 희나가 생각할 때쯤 진혁이 입을 열었다.
“네가 그런 말 할 때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해.”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귀를 기울여 듣던 희나는 이어진 말에 하얗게 질려 버렸다.
“나도 목이나 매달아버릴까.”
“선생님!”
놀란 희나가 느슨하게 기대고 있던 고개를 바짝 치켜들었다. 진혁은 그런 희나 쪽을 보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진혜랑 다르게 건강하니까 아마 이식이 되겠지, 그런 생각.”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아주 무표정해서 진심처럼 보였다.
희나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뜯어말리기 위해 진혁의 팔을 안타깝게 잡아당겼다.
진혁은 절박해 보이는 희나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무심히 말했다.
“이런 얘기 듣기 싫지?”
“당연하죠!”
“네가 하는 말도 나한테는 비슷하게 들려.”
희나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번엔 반대로 진혁이 희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토로했다.
“그러지 마. 그러지 않아도 너무 힘들어.”
“…….”
“나는 네가 그러게 둘 수가 없어. 너를 옆에 두고, 미래랑 만나게 한 걸 평생 후회하게 될 거야.”
진지한 말에 희나는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럼, 미래는, 미래는, 어떻게 해요.”
“…….”
“그냥 내버려 둘 건 아니죠?”
“그런 건 아니야.”
진혁이 희나의 말을 부정했다. 뭔가 생각이 있는 듯한 진혁의 얼굴을 보고 희나가 눈을 크게 떴다.
“뭔가 방법이 있어요?”
“여러 가지로 생각은 하고 있어.”
“무슨 방법이 있는데요?”
진혁은 난처한 듯 볼을 살짝 긁적이더니 체념한 태도로 말했다.
“사실은…… 미국에 있는 제약 회사에서 개발 중인 신약 중에 만성 신부전증에 효과가 있는 약이 있다고 해.”
“정말이요?”
“아직 실험 단계지만, 경과는 좋다고 해. 교수님이 도와주셔서 미래가 투약 대상으로 지정될 수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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