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선택 (3)
희나는 한 손에 캔 커피를 든 채 매점을 빠져나왔다. 그대로 병실로 올라가는 대신 바깥으로 나와 정원을 거닐었다. 한동안 걷다가 조금 마음이 가라앉자 문 앞의 벤치에 걸터앉았다.
“내가 미래의 엄마라니, 말도 안 돼.”
너무 생각에 몰입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희나는 진혁과 함께하기로 했을 때 이미 평생 미래를 돌볼 각오를 했다. 이제는 그와 상관없이, 미래와 함께 있는 것이 좋았으니까. 미래를 혹시라도 잃게 되면 말도 못 하게 슬플 거였다.
그러나 아무리 미래가 귀엽고 소중해도 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혹여라도 제가 미래의 엄마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 없었다. 어쨌든 미래가 그의 친딸은 아니기 때문이다.
희나에게 가까운 친척으로서 미래를 부양하는 것과 엄마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이건 여섯 살 어린애의 엄마가 되기에 제가 너무 어리다든가 하는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엄마란 게 꼭 있어야 하는 걸까…….”
희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순수한 의문이었다.
그녀도 엄마가 없이 자랐다. 엄마에 대한 건 기억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별다른 애정도, 그리움도 없다. 모녀 관계니 뭐니 그런 거 잘 알지 못했다.
“하아, 들어가 봐야 되는데.”
그렇게 말해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미래에게 죄책감이 들어서 얼굴을 마주 보기가 불편하다.
희나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벤치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누군가 그녀의 등을 툭툭 치며 말을 걸었다.
“여기서 뭐하냐?”
돌아보니 승수가 서 있었다. 희나의 커다란 눈이 둥글게 뜨였다.
“오빠가 왜 아직도 여기 있어요? 볼일은 다 본 거예요?”
“난 병원에 있으면 안 되냐?”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입원했어요?”
“아는 사람은 무슨.”
희나는 순간 승수가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혹시 이식 적합 검사라도 받으러 온 건가 생각하다가 이미 승수도 검사를 받았었단 사실을 상기했다. 진혁에게서 미래가 신부전이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승수가 검사를 받았었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결과는 이식 부적합이었다.
“그럼 왜 여기 있는데요?”
“그냥 볼일 다 본 김에 미래나 잠깐 보러 온 거지, 뭐.”
“거짓말. 집까지 태워 달라고 온 거죠?”
“뭐, 겸사겸사.”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승수는 희나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희나가 기껏 산 뒤 손도 대지 않은 캔 커피를 받아 뚜껑을 땄다.
“넌 왜 여기 나와 있는 건데?”
“그냥 잠깐 바람 쐬러 나온 거예요.”
그렇게 대답하고 희나는 병원 정원에 심어진 커다란 나무를 보았다. 희나의 기운 없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수가 툭 내뱉었다.
“무슨 일 있었어?”
“딱히요.”
“표정이 안 좋은데 무슨. 커피는 왜 들고만 있고? 거짓말하지 말고 말해 봐.”
“애가 아파서 병원에 있는데 표정 안 좋은 게 당연하죠.”
희나는 생각나는 대로 둘러댔다. 승수가 희나의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물었다.
“미래 많이 안 좋아?”
“뭐, 그대로죠.”
“간병하는 거 많이 힘들지?”
“아픈 거 보기 힘든 거 빼면 괜찮아요.”
병원에 있는 것이 고생스럽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 진심으로, 미래가 아픈 걸 봐야 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일 뿐.
투석을 오래 받을수록 좋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아픈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수록 어떻게든 해 주고 싶어진다. 그래서 선생님이 미래에게 정을 붙이지 못하게 하려고 그렇게 딱딱하게 굴었던 거다.
나온 지 시간이 좀 지나서인지, 미래를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승수가 와서인지 어쨌든 아까의 혼란스러움은 꽤나 가셔 있었다.
희나는 벤치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올라가요.”
“어?”
“미래 보러 왔다면서요. 안 올라가요?”
희나의 재촉에도 승수는 따라 일어서지 않은 채 눈만 깜빡거렸다.
희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승수를 살피듯 내려다보았다.
“오빠 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
승수는 대답 대신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희나는 다시 옆에 앉으면서 물었다.
“뭔데 말을 못 해요?”
“너 검사 받았다며?”
승수의 말에 희나는 입술을 깨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희원과 희나는 진혁의 단호한 만류에도 몰래 이식 적합성 검사를 받았었다. 검사 결과는 희나는 적합, 희원은 부적합이었다.
승수는 뾰로통하게 있는 희나의 뺨을 꼬집으며 나무랐다.
“그렇게 진혁이 속을 모르냐?”
“……나도 나름 생각이 있어서 한 거예요.”
“생각은 무슨. 어차피 진혁이가 동의도 안 할 테니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여태까지 진혁을 오래 알았지만 그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이었다. 희나는 자신의 변명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화를 내는 그에게 서운해할 수조차 없었다. 화를 내면서 아주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는 절대 그런 생각 같은 거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희나는 다시 미래를 보러 올 수 있었다.
진혁 앞에서는 이제 더 이상 말을 꺼낼 수조차 없다. 희나는 그것이 불만스러웠다.
“대체 뭐가 이상한 생각이라는 거야…….”
“남자보다 여자한테 훨씬 위험해. 앞으로 아이도…… 낳게 될 텐데.”
부작용에 대해서 모르는 건 아니다. 희나도 나름대로 많이 알아보았다. 인터넷도 뒤지고, 거의 가 본 적 없는 도서관에도 갔다.
더 웃긴 것은 거기서 희나보다도 도서관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희원과 마주쳤던 거였다.
부적합 판정을 받았을 때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듯한 희원을 보고 희나는 내심 놀랐다.
그냥 갈 곳이 없어서 미래를 돌봐주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나 진심으로 미래를 아끼고 있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니,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면이 있는 녀석인 줄 몰랐다.
그날 희나는 모르던 동생의 일면을 본 기분이었다. 사실 남의 애를 위해 수술을 각오한 자신에게도 놀랐지만 말이다.
희나는 무릎을 세워 끌어 모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나빠질 가능성이 높진 않다던데.”
“아직 진혁이한테 덜 혼났어?”
어린애 취급하는 듯한 승수의 말에 희나는 마땅히 대꾸는 하지 못했지만 못마땅했다.
입이 주욱 나온 희나를 보면서 승수가 조용히 말했다.
“너한테 그 수술은 너무 위험해.”
“나도 안다니까요.”
희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비혈연 간 신장 이식 성공률 80%.
큰 수술인 만큼 위험하고, 흉터도 남을 것이다. 혹시나 모를 실패 확률과 일반적인 부작용 말고도 많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적합이라고 해도 항체가 없을 뿐, 혈액형도 다르고 적합도가 무척 낮다.
게다가 희나의 신장부터가 기능 저하를 보이고 있었다. 반쪽을 떼어내고 70%대를 유지해야 하는데,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낮은 신장 기능으로 인한 여러 가지 합병증은 물론이고 임신 시 임신 중독에 빠질 가능성도 높아진다.
하지만 희나는 임신이고 뭐고 그런 거 아무래도 좋았다. 미래가 잘못된다면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한 점 거리낌 없이 그 아이를 볼 수 있을까?
“나는 오히려 선생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커다란 속눈썹으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씁쓸하게 말하는 희나에게 승수가 물었다.
“뭘 모르는데?”
“내가 이식 안 해주면 미래 위험하잖아요.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차마 내뱉지 못하고 삼켰지만 승수도 알아들은 얼굴이었다.
진혁은 미래를 살릴 수도 있는 방법을 막은 자신을 두고두고 원망할지도 모른다. 희나는 그가 그러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승수의 입에서는 희나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나왔다.
“너 그거 하면 진혁이랑 지금까지처럼 지낼 수가 없어.”
“왜 못 지내요?”
“너한테 그런 거 시키고 걔가 너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 거 같아?”
“…….”
“괜히 다시 만나서 너한테 못 할 짓 시켰다고 생각할 거야. 죄책감 느끼면서 후회하는 거 보고 싶어?”
희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승수의 말대로다. 진혁의 성격을 볼 때 희나가 계속 고집을 부리면 어쩌면 떠나버릴지도 모른다. 떠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평생 눈빛에 미안함과 자책이 섞여 있을 것 같다.
힘들게 마음이 통했는데 그 사이에 한 점의 그늘이라도 끼게 되는 건 희나도 싫었다. 진혁의 마음에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미래가 이 이상 고통 받는 건 싫고, 행여나 떠나게 된다는 생각만 스쳐도 몸서리가 쳐졌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어떻게든 해결돼서 모두 행복해질 수는 없는 걸까.
침울해진 희나의 어깨를 승수가 가볍게 감싸고 토닥거렸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하던 대로 미래만 잘 돌봐주는 걸로 충분해. 괜히 진혁이 설득하려고 하면서 마음의 골 만들지 마.”
“방법이 있는데도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라는 건가요……?”
“곧 어떻게든 해결될 거야.”
“어떻게요?”
희나의 물음에 승수가 시선을 피했다.
“너 혼자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다들 생각이 있을 거야.”
희나가 무슨 생각이 있냐고 물으려는데 승수가 말을 막듯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쨌든 이 얘기는 여기서 끝이야. 안으로 들어가자.”
캐어묻고 싶었지만 승수의 태도는 더 이상 뭔가 말할 것 같지가 않았다.
할 수 없이 따라 일어서는 희나에게 승수가 말했다.
“내가 밤까지 있을 테니까 어머니 모시고 가서 좀 쉬어.”
“그럴 거 없어요.”
“좀 쉬어, 멍청아. 고생하다가 너까지 축나면 챙겨주기 힘들어.”
“고생도 시켜줘야 하지. 시켜주지도 않는데, 뭐.”
“그만하고 가기나 해.”
그러면서 승수는 희나를 떠밀어 병실로 올라갔다.
미래는 희나가 나가기 전과 비슷한 모습으로 얌전히 미나와 놀고 있었다. 희나가 화장실 간다며 도망치듯 병실을 나왔던 일은 까맣게 잊은 것처럼 보였다.
“미래야, 오빠 왔다. 아픈 데는 없지?”
“아픈 데 없어요.”
“안녕하세요!”
짐짓 꾸며 낸 것처럼 쾌활하게 말을 거는 승수에게 미래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밝게 인사하는 미나를 안아 무릎에 앉힌 승수가 침대 옆에 붙은 보호자 침대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희원이 여기서 자는 거냐?”
희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승수가 질색하듯 말했다.
“야, 오늘은 내가 여기서 잘 테니까 집에서 자라고 해라. 그 녀석 그렇게 긴데 여기서 다리나 펴겠냐고.”
희원이 안쓰럽긴 했지만 다리를 펴지 못하는 건 승수도 마찬가지다. 희나가 손을 내저었다.
“됐어요. 그냥 내가 있을게요.”
“얼른 가기나 해. 언제까지 병원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기회 있을 때마다 체력 관리 좀 해야지.”
승수의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아 희나도 더 사양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자 미래가 이쪽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희나는 저도 모르게 미래의 시선을 피했다.
“언니, 집에 가?”
“어? 어…….”
희나는 당황한 어조로 말을 얼버무리며 다시 미래를 쳐다보았다. 커다랗고 맑은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이상하게 불편하다.
승수를 어려워하는 미래가 금방이라도 보채며 안겨 올 것 같다.
그때 승수가 선수 치듯 팔을 뻗어서 미래를 달래기 시작했다.
“미래, 착하지? 언니 쉬게 해주고 아저씨랑 놀자.”
울고 떼쓸 거라고 생각했는데, 미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희나가 놀라서 멍하니 서 있자 승수가 어서 가라는 듯 그녀를 떠밀었다.
희나는 나오면서 미래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 미래는 희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시선을 돌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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