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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110화 (110/140)

110화. 선택 (2)

미래가 2주 전 쓰러졌다.

연락을 받고 창백하게 질려서 달려가는 진혁을 따라간 희나는 쓰러진 미래의 모습을 보았다.

그 장면은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빈혈로 인해 축 늘어진 미래의 창백한 모습을 봤을 때는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무섭게 아프다고 했던 진혁의 말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기절의 원인은 단순 빈혈이었으나 미래는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정기적으로 투석을 받고 있고, 최근에는 호전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는데 다시 심혈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이 의사들도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결국 정밀 검사를 위해 옆 도시에 있는 큰 대학 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40분 정도 달려 희나는 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희원과 희나가 번갈아서 미래를 간병하고 있었는데, 차가 한 대뿐이라 교대할 때는 자리를 비워둬야 했다. 그래서 둘은 미래가 정기 검진 시간이라 의사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교대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수면 검사를 해서 희원이 빨리 집에 온 것이다.

“그렇게 서두를 거 있어? 할머니도 같이 계시잖아.”

“그래도 신경 쓰여요. 오빠, 여기서 내려도 상관없죠?”

승수가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희나는 대충 인사를 하고 병원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미래는 원래부터 특정 몇몇을 빼고는 낯을 가리는 편이지만, 유독 할머니를 따르지 않았다. 단순히 예쁜 사람을 좋아해서라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할머니와 둘만 있으면 불안해하고 눈치를 본다.

희나는 건강할 때라면 몰라도 아픈 아이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미래가 깨어나기 전에 옆에 가서 있어주고 싶었다.

병실에 도착한 희나는 문을 활짝 열었다. 미래는 벌써 일어나 있었고 진혁의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희나가 온 것을 발견한 미래가 커다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언니!”

목소리는 기쁜 듯했지만 힘이 하나도 없었다.

희나는 억지로 웃으며 미래에게로 다가갔다. 바싹 마른 미래의 몸은 노랗게 떴고, 요독으로 퉁퉁 부어 있었다. 그럼에도 커다란 병상에 비해 너무나 작아 보였다.

“미래, 일어나 있었네? 혼자 있었던 거야?”

“아니, 미나랑 놀고 있었어.”

미래의 말에 희나의 눈길이 반대 병상에 앉은 아이에게로 향했다.

하얀 얼굴에 뺨이 토실토실한 여자아이가 이쪽을 보면서 웃고 있었다.

4일 전에 미래와 같은 병실에 입원한 미나라는 아이로 소아 당뇨병 환자였다. 미래보다 두 살이 어렸지만 체구가 서로 비슷한 데다, 이름이 비슷하다고 좋아하더니 이내 친해졌다.

“미나, 안녕?”

희나가 말을 걸자 아이는 뺨을 복숭아처럼 물들이며 수줍어하더니 작게 인사했다. 그와 동시에 뒤쪽에서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나 씨 왔어?”

“아,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병실로 들어선 것은 미나의 어머니인 영은이었다.

영은은 세탁물을 들고 들어오면서 푸념하듯 말했다.

“가게 잠깐 옆집에 맡겨두고 뛰어왔다니깐.”

“무슨 일 있었어요?”

“오전에 검사하는데 미나가 눈물을 안 그친다고 간호사들이 하소연을 하더라고. 미래는 얌전하니까 편하지. 우리 애는 얼마나 응석이 많은지.”

툴툴거리면서도 영은은 사랑스러운 듯 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미래는 그쪽을 가만히 보더니 이내 희나의 손을 꼬옥 쥐었다.

“언니, 미래 얌전히 있었어.”

“응. 미래 진짜 착해.”

희나는 그 작은 손을 마주 쥐어주면서 천장을 쳐다보았다. 힘이 하나도 없는 앙상한 손을 잡으니 눈물이 쏟아져버릴 것 같다.

입원한 첫날에 받은 검사 결과에 따르면 미래의 신기능은 다시 10%대로 떨어졌다. 근래 들어서 잘 뛰어 놀고 잘 먹는 덕에 그럭저럭 건강을 회복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유 없이 쓰러져버린 거다.

식단도 잘 지키고 약도 잘 먹고 병원에도 꼬박꼬박 갔는데 악화된 것이 희나의 마음을 두렵게 했다.

“엄마, 오늘은 언제까지 있다가 가?”

“조금 있다가 가봐야 돼. 엄마가 돈 벌어야 우리 미나 맛있는 거 사 주지.”

“나 맛있는 거 안 먹어도 되는데. 엄마 안 가는 게 더 좋은데.”

“미나, 착하지? 엄마 가게 닫으면 금방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이제 미나 친구도 있잖아.”

영은은 칭얼거리는 미나를 능숙하게 다독거렸다.

미나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래를 보았다. 미래는 미나 쪽을 커다란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미나가 뭐라고 말을 꺼내려 하는데 병실 문이 열리더니 간호사가 들어왔다.

“미나, 주사 맞을 시간이에요.”

곧장 가느다란 아이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주사라면 이미 익숙해졌을 텐데도 무서운 모양이다.

칭얼거리며 엄마의 품으로 안겨드는 아이를 잡고 간호사가 팔에 주사를 놓았다.

“아파! 우아아아아앙! 엄마! 헝.”

주사 놓는 것은 금방 끝났지만 발버둥을 치면서 운다. 영은이 눈물을 멈추지 않는 딸을 꼭 안고 진정시키려 했지만 좀처럼 그치지 않는다.

아파서 우는 아이의 안쓰러운 모습을 보기 뭐해서 희나는 시선을 돌렸다.

미래를 보니 대체 뭐가 그리 신기한 건지 입까지 헤- 벌린 채 그쪽을 보고 있었다.

한참 울며 보채는 아이를 안은 채 영은은 계속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고 있었다. 가봐야 해서 난감한 모양새였기에 희나가 나서서 물었다.

“가게 일 바쁘신 거 아니에요?”

“어? 어, 금방 다녀온다고 하고 나왔거든…….”

영은은 남편을 사고로 잃고 혼자 철물점을 하면서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했다.

희나는 미나에게 다가가서 함께 달래 주었다.

“미나야, 엄마 조금 있으면 다시 오실 테니까 그만 울어. 미나가 계속 울면 엄마가 힘드시잖아.”

“그래도, 엄마, 가면, 싫은데…….”

“언니가 엄마 올 때까지 놀아줄게. 미래랑 같이 놀면서 엄마 기다리자. 응?”

히끅거리면서 잠시 고집을 부렸지만 곧 미나는 희나의 품으로 왔다.

“다녀오세요. 제가 미나도 보고 있을게요.”

“번번이 고마워, 진짜.”

영은은 몇 번이고 인사하며 병실을 떠났다. 엄마가 가버리자 미나는 상심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미래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미래는 좋겠다. 와주는 사람이 많아서.”

“응. 언니랑 오빠랑 아저씨랑 아빠랑 할머니랑 계속계속 오니까 좋아.”

미래는 미나의 상심을 읽지 못한 듯 웃는 얼굴로 자랑스레 말했다.

부러운 표정으로 그런 미래를 보던 미나는 뭔가 생각이 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나는 맨날 엄마만 오는데. 미래는 엄마만 안 오네?”

희나는 순간 찔끔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진 미래의 태연한 대답에 더욱 찔끔했다.

“엄마는 못 와. 미래 엄마는 죽었어.”

“엄마가? 먼저?”

미래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나는 엄마보다 일찍 죽을 거 같은데.”

아주 천진한 말투가 도리어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아이들이 뭘 모르고 할 수도 있을 법한 말이지만, 이 아이들이 하는 건 전혀 느낌이 다르다.

“너네 그런 소리 하면 못써.”

희나가 엄한 목소리로 말하자 둘은 움찔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잠시 잠잠해지나 싶더니 미나가 곧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래는 엄마 기억나?”

미나의 질문에 미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뒤적거리더니 목걸이를 끄집어냈다.

“이거 엄마가 줬어.”

미래가 내민 건 항상 걸고 있는 목걸이였다.

미나가 호기심이 생겼는지 침대에서 내려오는 바람에 희나는 황급히 다가가서 링거를 걸이에 걸어주었다.

미나와 함께 미래의 옆으로 다가온 희나는 목걸이를 쳐다보았다. 자세히 본 적이 없어 몰랐는데, 아이가 할 만한 디자인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우와, 엄마들 거 같애. 예쁘다.”

금으로 된 체인에 작은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는 누가 봐도 성인용이었지만 미나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소녀들 특유의 어른 액세서리를 동경하는 모양새였다.

“엄마가 미래 사준 거야?”

“아니, 아빠가 엄마가 준 거라고 줬어.”

희나는 이런 목걸이를 진혜가 딸에게 줬을 것 같지는 않고, 아무래도 진혜의 유품을 진혁이 전해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희나가 미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예쁘네. 미래 이거 좋아해?”

“아니.”

미래가 의외로 고개를 저어서 희나는 내심 놀랐다.

“근데 아빠가 가지고 다니라고 해서 가지고 다녀.”

“왜 안 좋아해?”

“미래는 프티프티 멜로디에 나오는 목걸이가 좋아. 이건 너무 쪼그매.”

<프티프티 멜로디>는 최근에 TV에서 방영중인 아동용 애니메이션이다.

“나, 이거 좋은데. 그럼 이거 나 줘.”

미나의 말에 미래는 줄까 말까 고민하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선뜻 줘 버리기라도 할까 봐 희나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미래, 이거 다른 사람 주는 거 아냐. 둘 다 말 잘 들으면 언니가 다음에 올 때 프티프티 멜로디 목걸이 사 줄게.”

“진짜? 우와아아아아.”

둘 다 프티프티 목걸이에 대한 기대로 미래의 목걸이는 안중에서 사라진 것 같았다.

빨강이 좋네, 핑크가 좋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들으며 희나가 간신히 화제가 돌아갔다고 안심하는데 미나가 다시 엄마 이야기를 꺼냈다.

“미래네 엄마는 되게 예쁠 거 같아.”

“응? 왜?”

“미래네 아빠 엄청 멋있잖아. 예쁘지?”

“잘 모르겠어. 미래는 엄마 얼굴이 가물가물해.”

희나는 미래의 말에 씁쓸해졌다. 아이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 어린 엄마를 정작 아이는 기억도 잘하지 못한다. 아마도 점점 더 기억하지 못하게 될 거다.

‘미래에게 엄마는 어떤 느낌인 걸까?’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희나는 미래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을 찡그린 채 엄마 얼굴을 떠올려 보려고 노력하는 듯했던 미래는 금방 집중력을 잃어버리고 희나에게 파고들며 어리광을 부렸다.

“우응, 아빠 보고 싶다.”

“나도 미래 아빠 보고 싶다. 미래 아빠 같은 아빠 있으면 좋겠어.”

“헤헤. 미래도 미나네 엄마 좋아.”

미래는 아빠의 칭찬을 듣고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선뜻 말했다.

희나는 내심 놀랐다. 이런 생각을 한다면 실례겠지만, 영은은 누가 봐도 미인이라고 하기 어려운 외모다.

미래가 그런 외모의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희나로선 처음이었다.

호기심이 생긴 희나는 넌지시 미래를 끌어당기면서 물어보았다.

“미래, 미나네 엄마 좋아해? 왜 좋아해?”

“응. 미나한테 잘해주고, 막 귀여워해 주고, 막, 막, 엄마같이 대하니까.”

“엄마 같아서?”

“응, 엄마 같아서 좋아.”

미래와 희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미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미래도 엄마 있었으면 좋겠어?”

“어, 미래도 엄마 있었으면 좋겠어.”

순간 희나는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 미래네 아빠랑 우리 엄마랑 합치면 좋겠다-.”

“응? 그거는 안 되는데?”

“왜?”

“아빠는 희나 언니랑 결혼할 거야.”

그 말에 희나의 얼굴이 확 빨개졌다. 미나가 입을 헤-벌리며 놀라더니 박수를 치며 말했다.

“우와, 그럼 희나 언니가 미래 엄마가 되는 거야?”

붉어진 희나의 얼굴이 금방 핏기를 잃었다. 충격을 받은 것이다.

너무 앞서 나간 생각인 것은 맞다. 하지만 이미 진혁과 몸도 마음도 깊이 이어져 헤어진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사이가 됐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인 거다.

미래는 진혁을 아빠라고 부르는데, 그럼 나는 이 아이의 뭐지?

굳어진 희나의 품 안에서 미래가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물었다.

“응? 그런 거야, 언니?”

대답을 하지 못하고 희나는 멍하니 굳어버렸다. 속으로 이 ‘언니’라는 호칭이 ‘엄마’로 바뀌는 걸 상상해버리고 말았다.

‘내가 미래의 엄마가……?’

희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품에 안겨 있던 미래를 밀어냈다.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미래가 희나를 돌아보았다.

“언니, 왜 그래?”

“…….”

희나는 말없이 미래를 쳐다보았다. 의미 불명의 소름이 돋았다. 불편하고, 이상하고 혼란스럽다.

그녀는 떨리는 시선으로 애처로운 작고 약한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생각했다.

‘엄마라니, 그런 거, 절대 무리야’ 하고.

“이따가 아빠랑 오빠랑 같이 오지?”

“…….”

“응? 언니?”

미래가 계속 보채며 물었지만 생각에 깊이 잠긴 희나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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