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선택 (1)
“하아, 진짜 덥다. 내가 뭐 할 거 있어요?”
손부채를 부치며 희나는 나무 아래로 들어섰다. 사다리 위에 앉아 있던 진혁이 햇볕에 익어서 빨개진 희나의 팔을 보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오지 말고 안에 있으라니까.”
“혼자 어떻게 안에 있어요, 다들 일하고 있는데.”
“너도 일하는 중이잖아.”
“이 시간에는 사람 거의 안 오잖아요. 그냥 돕게 해줘요.”
진혁은 희나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과 희나를 뙤약볕 아래에 두고 싶지 않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본 승수가 나무 반대편에서 희나의 말에 힘을 보탰다.
“그냥 냅 둬! 곰팡내 나는 약국에 혼자 앉아 있기 답답한가 부지!”
진혁은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밭 입구에 있는 여분의 사다리를 손수 들고 그나마 시원한 그늘 쪽에 놓아주었다.
“벌써부터 무리하지 마.”
“무리 아닌데요, 뭐. 너무 걱정 마요.”
희나는 진혁을 안심시킨 뒤 봉투를 받아 들고 사다리에 올라가 작업을 시작했다.
7월을 넘어 여름이 한창인 과수원은 아주 바빴다. 블루베리 수확이 끝나고 배송 작업을 채 완료하기도 전에 체리 수확을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여름 수확 작물들의 준비가 한창이었다. 항상 도우러 오던 마을 사람들도 직접 짓는 농사일이 늘어나는 시기였기에 수가 줄었다.
다행히 그 빈자리는 방학을 맞은 희나의 친구들이 채워주었다. 희나도 최근에는 매일같이 약국에 일하러 나와 있었다.
불볕더위에 마을 노인들의 건강에도 비상이 걸린 듯 한가하던 약국도 제법 바빴다.
하지만 이 시간대에는 사람이 많지 않다. 다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하는 걸 알면서 할 일 없이 텅 빈 약국에 있는 건 싫었다. 나와 있으면 물론 고되기는 하지만 일하고 있는 진혁을 바라보는 낙이라도 있다.
희나는 통통한 복숭아에 봉투를 입히는 작업을 하면서 틈틈이 저만치 떨어져 있는 진혁을 쳐다보았다. 매일 밭에 나와 일하는데도 흰 피부는 다소 붉어졌을 뿐 변함이 없다.
그녀는 최근 진혁의 집에서 반쯤 대놓고 살고 있었다. 고로 거의 하루 종일 얼굴을 마주하는 셈인데, 아무리 봐도 설렘이 가시질 않았다.
과수원에서는 매일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어느 날에는 배달을 가고, 문서를 정리하고, 잡초를 뽑고, 물을 뿌리고, 농기구를 수리하고, 이렇게 봉투도 씌우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한다. 단순 작업의 반복이지만 머리 쓰는 걸 싫어하는 희나로서는 이쪽이 훨씬 적성에 맞았다.
따뜻한 햇살 아래에서 먹음직스럽게 익기 시작한 복숭아에 노란 봉투를 씌우는 작업은 고되기는커녕 즐겁기만 했다. 머릿속을 잔뜩 채우고 있는 무거운 생각도 조금은 날아가 버리는 것 같다.
30분쯤 지나자 사다리에서 손이 닿는 범위의 모든 복숭아들이 예쁘게 노란 옷을 입게 되었다.
희나가 다음 나무로 옮겨 가기 위해 사다리를 내려가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손을 내밀었다. 진혁이 마침 뒤를 지나가다가 부축해주려고 한 것이다. 희나는 속으로 빙긋 웃으며 손을 잡았다.
“좀 쉴래?”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요.”
“내가 좀 쉬고 싶어서.”
진혁이 다른 사람들 일하고 있는데 혼자 쉴 성격이 아닌지라 생각해주는 마음이 기분 좋아서 희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이 손목을 잡고 한편으로 끌어서 희나는 순간 심장이 뛰었으나 곧이어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뒤따르고 있는 승수가 보였다.
‘둘이 가는 건 아닌 모양이군.’
희나가 입을 비죽이고 있으려니 그녀의 기색을 눈치챈 승수가 뺨을 잡아당겼다. 희나는 진혁에게 안 보이는 위치에서 승수를 향해 혀를 베- 내밀어 보이고는 천천히 밭을 빠져나왔다.
세 사람은 트럭에서 먹을 것을 꺼내 들고 커다란 벚나무 아래에 있는 벤치로 갔다.
천성이 부지런한 진혁은 여유가 나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창고 방의 인테리어를 바꾼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앉아서 쉴 수 있는 벤치를 조성했다. 주변에 꽃도 심고 울타리도 둘러놓아서 제법 그럴 듯했다.
“아, 물병을 안 가져왔네.”
벤치에 앉으려는 차에 진혁이 생각난 듯 말했다. 곧바로 돌아서려는 진혁을 승수가 만류했다.
“야, 됐어. 내가 갔다 올게.”
“그럴래?”
“그래. 희나가 쭉 찢어진 눈으로 나 째려보잖냐.”
승수의 말에 희나는 살짝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곧 승수가 창고 쪽으로 사라지고 희나와 진혁은 벤치에 앉았다. 주먹밥 하나를 집어 들고 우물거리면서 희나가 말을 꺼냈다.
“뭐 준비해야 되는 건 없어요?”
“무슨 준비?”
“대학원 입학 준비 말이에요.”
진혁은 후기 대학원 모집에 지원해서 입학 허가를 받아냈다. 벌써부터 밤마다 몇 시간씩 불을 밝히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낮 동안 내내 일하고 밤에만 공부하는 것이 보기 안쓰러웠다. 과수원 일이 바쁘긴 하지만 희나로서는 진혁이 그쪽에 더 집중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진혁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아무래도 좀 나중으로 미루는 게 좋을 거 같다고 생각 중이야.”
“네? 왜요?”
“알잖아.”
진혁이 작게 웃으며 말했지만 희나는 웃지 않고 표정을 굳혔다.
“그러지 말고 말 나온 김에 해요. 일단 시작하면 어떻게든 해나갈 수 있어요. 나도 있고 희원이도 있는데.”
“너희한테 계속 이럴 수는 없어. 너희들이야말로 아직 어리고 공부해야 할 나이인데 상관없는 일에…….”
“왜 상관이 없어요? 그렇게 말하면 서운해할 거예요, 나랑 희원이 둘 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때를 맞춘 듯 저만치 희원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희나는 일어나서 큰 소리로 희원을 향해 소리쳤다.
“주희원? 뭐야, 그냥 왔어? 미래는 어쩌고?”
“오전에 무슨 검사한다고 재워놨는데 몇 시간 더 잠들어 있을 거래. 가도 괜찮을 거 같대서 일단 들어왔어.”
그렇다고 애를 두고 그냥 왔냐고 핀잔을 주려던 희나는 피곤해 보이는 희원의 안색과 잔뜩 눌린 뒷머리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진혁이 옆에서 미안한 말투로 말했다.
“고생 많았어. 가서 샤워하고 좀 쉬어.”
“안 쉬어도 돼요. 샤워만 하고 나올게요. 일 많잖아요.”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하고 희원은 휘적휘적 걸어가 버렸다.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보는 진혁에게 희나가 말했다.
“나 병원 가볼게요. 미래 빨리 일어날지도 모르니까요.”
“괜찮겠어?”
“네. 약국 부탁해요.”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따라 일어섰다. 차까지 함께 걸어가려는 것이다.
기분 좋게 손을 잡고 집 쪽으로 걷던 두 사람은 물병을 들고 오던 승수와 마주쳤다.
“엥? 너네 어디 가?”
“희원이가 빨리 와서 병원에 좀 일찍 가보려고요.”
“배미, 그럼 너 지금 시내로 나가는 거야?”
“네.”
“그럼 나 좀 태워 가.”
그러면서 승수는 손에 들고 있던 물병을 진혁에게 넘겼다. 희나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들며 물었다.
“또 어딜 가는 거예요? 진짜 여자 친구라도 생겼어요?”
“왜, 질투 나?”
“질투 대신 안타까움이 몰려와요.”
승수는 히죽히죽 웃었지만 희나는 섭섭했다. 아직 한낮인데 바쁜 걸 알면서도 가겠다는 승수가 야속했다. 요즘 들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착한 남자는 서운한 기색도 없이 “잘 다녀와.” 하고 말할 뿐이다.
승수가 없으면 혼자 일꾼들을 관리하느라 진혁이 엄청나게 고생할 것을 알기에 희나는 마음이 안 좋았다. 하지만 대가를 지불하긴 해도 고용 관계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니 뭐라 말할 수는 없어 잠잠히 있었다.
집에 도착해서 옷을 갈아입은 뒤 희나는 진혁의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부드럽게 바라보고 있는 진혁을 보면서 인사했다.
“다녀올게요.”
“응. 이따 데리러 갈게.”
“그럴 필요 없다니깐 그러네.”
희나의 말에 진혁은 빙긋 웃기만 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데리러 올 게 뻔하다. 희나는 입을 비죽거리면서도 기분 좋게 차에 시동을 걸었다.
“오, 이젠 좀 익숙해졌나 보네?”
“이 정도야 기본이죠.”
희나는 조금 능숙해진 솜씨로 차를 출발시켰다. 그간 희나는 학원을 다녀서 속성으로 면허를 땄다. 별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던 면허를 딴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진혁과 미래를 위해서였다.
“아, 덥다. 에어컨 좀 틀까?”
“난 창문 여는 게 더 좋은데.”
승수는 뭐 그런 걸 좋아하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희나는 헤헤 웃으며 창문을 열었다. 간간이 퀴퀴한 냄새가 나기도 하지만 흙냄새와 나무 냄새가 뒤섞인 전원의 향기를 맡으며 달리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기분 좋았다.
“너 머리 다 흐트러지겠는데.”
“묶으면 되니까 괜찮아요.”
차를 잠시 멈추고 희나는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거울도 보지 않은 채 뒤로 묶었다.
승수는 그런 희나를 쳐다보더니 픽 웃고는 말했다.
“너도 이제 여기 아가씨 다 됐네.”
“그런가? 나 원래 이래요.”
곱게 네일 아트를 했던 손톱은 원래의 색으로 돌아온 지 오래다. 기다란 머리카락은 하나로 모아 높이 올려 묶었다. 얼굴에는 선크림만 발랐을 뿐 화장기 하나 없다.
그렇게 해도 타고난 외모 덕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만 이제 진혁을 등쳐먹으러 온 도시 꽃뱀으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화려함을 잃었다는 아쉬움 같은 건 희나의 안중에 없었다. 그런 것 따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과수원 생활은 너무 즐거웠다.
다시 차를 출발시키려는 찰나, 창밖으로 멀리서 호스로 노지 나무들에 물을 뿌리고 있는 희원의 모습이 보였다. 승수도 그것을 봤는지 볼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너희 남매는 진짜 얼굴값 못 한다. 잘나가는 모델 일 버리고 여기 와서 뭐하는 거래.”
“여기 일이 뭐가 어때서요? 훨씬 좋은데.”
희나는 태연스레 대답했다.
구박하던 희원도 일을 곧잘 했다. 과수원 수익이 생각보다 상당하고, 돈이 있어도 믿을 만한 인력을 구하기 힘들다는 것을 안 이후 희나도 희원이 있는 것을 반대하지 않게 되었다.
불도 들어오지 않는 컴컴한 집에서 서로를 무시한 채 스쳐 지나가거나,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돈을 요구받던 것이 희원과의 교류의 전부였다.
희원을 쳐다보다 희나는 문득 고등학교 시절 사회과 지도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했던 생각을 떠올렸다. 운동장에서 뛰어 노는 소년들을 보며, 희원이 그 안에 속해 있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던 생각.
지금 희원은 축구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다지 나이에 맞는 상큼한 모습도 아니다. 편안한 바지에 목이 늘어진 셔츠를 입고 수건을 목에 둘둘 만 채 햇볕에 그을려 있다.
하지만 햇볕을 받고 서서 미소를 띠고 있는 희원의 모습이 희나는 기뻤다. 바싹 말랐던 체형도 탄탄해지고 혈색도 좋아 보인다. 희원도 희나도 진심으로 지금의 생활을 좋아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행복한 빛을 띠고 있다. 그 위에 너무나도 크게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긴 하지만.
“그렇다기엔 고생 많이 하는 거 같은데. 미래는 통원은 안 될 것 같대?”
승수의 물음에 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2주나 됐는데. 큰일이네. 빨리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승수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두 사람의 얼굴에 미소는 더 이상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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