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And morning comes……. (1)
희나가 눈을 떴을 때 방 안은 어둑어둑했다. 벌써 해가 져버린 건가 싶어 아차 했으나 몸 전체가 나른하고 노곤노곤해서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눈만 커다랗게 뜬 채로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잘 잤어?”
나지막한 목소리가 옆에서 말을 걸었다. 희나가 살짝 고개를 돌려 돌아보니 진혁이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채광이 흐렸지만 이목구비를 구분할 정도는 돼서 안경을 쓰지 않은 진혁의 섬세한 얼굴이 가까이에 보였다.
“지금 몇 시예요?”
“아직 6시도 안 됐어. 좀 더 자도 괜찮아.”
그 말에 조금 안심이 된 희나는 몸에 들어가 있던 힘을 빼고 다시 침대에 폭 몸을 묻었다.
당황했던 건 가셨으나 몸을 움직인 덕에 아직 알몸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잠기가 가시면서 점점 어젯밤의 기억들이 되살아나자 창피함이 몰려왔다.
맨날 그 생각만 한다고 했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평소 이미지 때문에 깜빡 속았어. 선비 같은 얼굴로 태연스럽게 밝히다니.
함께 절정을 맞은 뒤 끌어안고 자다가, 몇 시간 뒤 진혁이 다시 희나를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잠투정을 부리는 희나를 기어이 달아오르게 만든 뒤 한 번 더 그녀를 안았다.
처음 안았을 때도 빼는 기색이야 없었지만 두 번째는 더욱 노골적이었다. 희나가 부끄러워서 저항해도 진혁은 막무가내로 놓아주지 않았다. 온몸 어디에도 진혁의 입술과 손길이 지나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고개를 숙였다가 이불 위로 살짝 드러난 앙가슴이 온통 울긋불긋하게 물든 것을 보았다.
얼굴이 빨개진 희나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몸을 가리고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물었다.
“언제 일어났어요?”
“아까 전에.”
“뭐 하고 있었어요?”
“그냥 자는 거 보고 있었어.”
진혁의 대답에 희나의 얼굴이 한층 뜨거워졌다. 진혁의 자는 얼굴 보기가 그녀의 취미 생활이었는데. 막상 관찰 대상이 되니 민망하고 머쓱하다.
부끄러워하는 희나를 보고 진혁은 빙그레 웃더니 다정하게 말했다.
“피곤하지? 좀 더 잘래?”
“아뇨, 다 깼어요.”
그렇게 말했지만 몸은 일으키지 않았다. 잠은 다 깼어도 몸이 굉장히 노곤하고 나른하다. 기분 나쁜 감각이 아니라 만족감에 가까웠지만.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지은 채 가만히 있는 희나의 머리카락을 진혁이 부드럽게 쓸었다.
“몸은 괜찮아?”
걱정해주는 말인 건 알지만 아파도 말할까 보냐. 희나는 입술을 꼭 깨물며 고집스레 고개를 저었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감각은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미소 짓고 있는 진혁이 괜스레 얄밉게만 보였다.
“바보 아저씨. 변태.”
심술궂게 중얼거렸지만 진혁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가실 줄 모른다. 그는 희나의 희고 말랑말랑한 뺨을 죽 잡아당기며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이런 말 들을 거면 빨리 저지를 걸 그랬지?”
“누가 저지르게 해준대요?”
“매번 같이 자자고 졸라댄 게 누군데?”
“이런 의미로 자자고 한 거 아니란 말이에요!”
희나는 진혁의 몸을 꾹 밀어내며 항변했다. 어제 문 앞에서 진혁을 도발할 때까지만 해도 정말 이런 걸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희나의 입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어제랑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다. 마을 사람들이랑 어울려 놀았던 것이 굉장히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그런 기분이 드니까 침대 밖으로 나가기가 두려워졌다.
이런 야한 짓을 해놓고 다른 사람들 얼굴을 보기가 너무 창피하다. 진혁의 집에서 자고 갈 때마다 다들 음흉한 농담을 잔뜩 해댔지만 이런 의미인 줄은 몰라서 크게 부끄럽거나 하지 않았었는데. 그나저나 정말 다른 사람들도 이런 걸 하는 걸까?
“후회해?”
진혁의 물음에 상념에서 깨어난 희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예상하지 못했다 뿐이지 후회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아주 기쁘다. 부끄러웠을 뿐 어제도 정말이지 기분 좋았다.
“후회 같은 거 할 리가 없잖아요. 바보네.”
노파심에 희나가 덧붙여서 말하자 진혁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는 괴고 있던 팔을 풀고 다시 베개에 머리를 묻으며 몸을 가까이 가져왔다. 단단한 팔이 벗은 몸에 휘감겨 오자 희나는 기겁해서 침대 끝까지 굴러갔다.
한동안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희나는 이불째로 진혁의 품에 파묻히고 말았다.
자기 뜻대로 돼서 만족스러워 보이는 진혁을 흘겨보던 희나의 시선이 그의 붉은 입술에서 멈췄다.
어제 저 입술이 했던 행위가 또다시 머릿속에 오버랩 된다.
희나가 급히 고개를 돌리면서 생각을 지워버리려 애쓰는데 귓가에 진혁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뭐하는 거야?”
“내가 뭘요……?”
“왜 아까부터 이쪽을 안 봐.”
“꼭 봐야 되는 이유라도 있어요?”
새침하게 말하고 희나는 아예 진혁을 등지고 누워버렸다. 그러면 또 막 끌어당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진혁은 잠잠했다.
그는 다시 실랑이를 벌이는 대신 등 뒤에서 희나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잠시 두 사람은 말없이 그렇게 있었다.
침묵 속에서 희나의 심장은 가라앉는 대신 도리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등 뒤의 온기를 느낄수록 현재가 행복해서 가슴이 벅차오른다. 사랑하는 사람과 처음으로 함께 밤을 보낸 뒤 그 품에 안겨 있는 것이다.
괜스레 눈시울이 시큰해져서 희나는 커다란 눈알을 도록도록 굴렸다. 어슴푸레하던 방이 제법 밝아져서 안이 선명하게 보인다. 어제도 느꼈지만 방의 구조가 많이 변했다.
새삼스럽게 침대가 전에 자고 갔을 때보다 훨씬 푹신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희나가 새 이불을 만지자 특유의 바스락거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갑자기 인테리어는 왜 바꾼 거예요?”
“마음에 안 들어?”
진혁이 질문을 질문으로 받자 희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뇨. 훨씬 좋아졌네요. 그치만 전에도 괜찮았던 거 같은데 왜 굳이 바꿨나 해서.”
“너 재우려고 바꾼 거야.”
조금 원래 색을 찾아가던 희나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감이 왔었지만 직접 들으니 쑥스럽고 기분이 간질간질했다.
희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누르며 물었다.
“바보, 그러다 내가 오늘 안 자고 간다고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그럼 내일 또 물어봤겠지?”
“그냥 자고 갈래? 이렇게요? 될 때까지?”
“그걸로 안 먹히면 라면이라도 끓여보려고 했는데.”
진혁이 ‘라면 먹고 갈래?’ 하고 물어보는 걸 상상한 희나는 웃음이 터져버렸다. 바보 아저씨가 의외로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희나는 입을 비죽거리며 진혁을 곱게 흘겨보았다.
“계속 거절해볼 걸 그랬네, 어디까지 가나.”
“뭐라고 말을 꺼낼까 꽤 고민했어. 형광등 좀 갈아줄래, 라든가.”
“……평생 수절할 뻔했네요.”
“너 기다리는 거야 이제 익숙하니 괜찮아.”
진혁의 말에 희나는 5년 전 기억을 떠올렸다. 참기 힘든 표정으로 넌 나중에 나에게 미안할 거라고 했었던 진혁의 말을.
최근엔 진혁이 초연해 보여서 생각이 없나 보다 했을 뿐, 희나도 스킨십을 할 때마다 아쉽기 짝이 없었다. 더 닿고, 더 만져지고 싶어서 안타까웠다.
그에게 안기길 원했고 그의 것이 되고 싶었다. 행위의 농밀함에는 당황했지만 그 낯선 달콤함에 벌써부터 중독되어 버릴 것 같다.
희나의 갈색 눈동자가 슬그머니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안경을 벗은 단정한 얼굴은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었다. 다정한 미소였지만 깊은 눈매가 어딘지 뜨겁고 노골적이어서 희나는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껴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몽롱하고, 노곤하던 몸이 더 녹아버릴 것 같다.
멍한 눈으로 침대 옆 협탁을 보던 희나는 뭔가를 발견하고 무심코 손을 뻗었다.
“그건 왜 집는 거야.”
희나가 집어 든 것을 보고 진혁이 픽 웃으며 말했다. 비타민 봉지같이 생겨서 무슨 약인 줄 알았는데, 뭔가 다르다.
“이게 뭐예요?”
“몰라?”
모른다고 대답하려다가 희나는 얼굴을 붉히며 들고 있던 것을 확 내팽개쳤다. 콘돔이란 걸 깨달은 것이다.
“뭐야, 이거. 준비해놓고 있었어요?”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지.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르잖아.”
“음흉하게!”
희나가 몸을 돌려서 팡팡 때리자 진혁이 소리 내어 웃었다.
마구 휘두르는 희나의 팔목을 잡아서 제지한 그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준비 안 하고 있는 것보단 낫잖아.”
“언제부터 준비한 거예요.”
“글쎄. 처음 건 유통 기한이 지나서 버렸지?”
능글능글한 진혁의 말에 다시 희나의 얼굴이 확 빨개졌다.
희나는 팔목을 잡은 진혁의 손을 깨물고는 앙칼지게 말했다.
“유통 기한이 지나다니, 언제부터 준비한 거예요! 이 로리콘!”
“농담이야, 바보야.”
진혁은 쿡쿡 웃으며 희나가 물었던 손으로 그녀의 코를 잡아 흔들었다.
자신이 고등학생이었을 때부터 진혁이 이런 걸 준비하진 않았을 거란 건 누구보다도 잘 아는 희나였지만 볼을 부풀리며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알고 보니 속이 완전 시커멓잖아. 선생님, 성격 사실 엄청 나쁜 거 아니에요?”
“화났어?”
“몰라요. 이제 다시는 안 자고 갈 거예요.”
“안 돼. 안 돼.”
투정 부리듯 안 된다고 반복하는 말투가 귀엽다.
진혁은 장난스럽게 고개를 저으면서 바동거리는 희나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뺨을 한번 깨무는가 싶더니 곧 그곳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붉은 입술이 이마, 코, 눈꺼풀, 뺨 이곳저곳을 꼼꼼히 지나가더니 곧 희나의 입술에 맞닿았다.
그대로 농염하게 입술을 가르고 들어와 희나의 혀를 깊이 머금고 떨어졌다. 내리감은 진혁의 긴 속눈썹이 코앞에서 가볍게 떨리는 것이 너무 에로틱해서 마주 볼 수가 없었다. 향긋한 숨이 입술에 와 닿자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다.
순간적으로 사랑스러운 기분이 솟구쳐 올라서 희나는 입술을 떨었다.
여태까지도 좋아했는데 지금은 더 좋다. 너무 좋아서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다. 안 그래도 떨어져 사는 건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데, 이제는 없어지면 정말 그대로 고꾸라져서 죽어버릴 것 같다.
마음이 너무 크니까 무섭다.
희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까는 어찌어찌 가라앉혔는데 이번엔 그럴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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