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The night (1)
달칵-.
작은 소리와 함께 캄캄한 작업실 내부 전등에 불이 들어왔다. 안이 밝아지자 보이는 광경에 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언제 또 이렇게 바꿨어요?”
작업실은 원래도 깨끗했지만 훨씬 아늑해져 있었다. 백열등도 레일 조명으로 바뀌었고, 못 보던 러그에 가구 배치도 바뀌어서 다른 장소 같았다. 만들고 있던 목공품들도 한쪽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너희 둘 덕분에 많이 편해져서 시간이 많거든.”
따라 들어온 진혁이 웃으면서 속삭였다.
희나는 팔목을 잡아끄는 그를 따라 올라가서 같이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그러고 나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왠지 어색해서 똑바로 볼 수가 없고 심장이 쿵쿵 뛴다. 이제 함께 있는 것에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아직도 둘만 남으면 희나는 두근거리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은 특별히 더 두근거리는 기분이다.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달콤한 기류만이 아니라 다른 긴장감이 섞여 흐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 앞에서 자신이 했던 대담한 발언을 상기하자 희나는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저질러놓고 막상 들어오고 나니 어쩔 줄을 모르겠다. 이런 분위기에 희나는 너무나도 면역이 없었다.
긴장해서 뻣뻣하게 앉아 있는 희나를 바라보는 진혁의 단정한 입가에 미소가 슬쩍 떠올랐다.
무릎 위에 올려져 있는 희나의 흰 손 위로 커다란 손이 덮였다.
진혁을 마주 보지 못하고 있던 희나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보았다. 미소를 짓고 있는 진혁의 얼굴을 보자 또 괜히 낯이 뜨거워서 오래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어버렸다.
“왜 그래? 왜 눈을 피해?”
“피하긴 누가 피해요. 그냥 딴 데 보는 거지.”
부드러운 목소리에 희나가 새침하게 대답하자 진혁이 낮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잔뜩 긴장했던 기분이 살짝이나마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다.
진혁은 천천히 몸을 뒤로 기울여서 폭신한 소파 쿠션에 몸을 묻었다. 그 나른한 동작을 보니 민망한 상황으로 바로 돌입하지는 않을 거 같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를 쳐다보지 못하고 희나는 괜스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척 봐도 많이 변했지만 자세히 보니 방의 배치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진혁의 방에 있던 커다란 책상도 여기로 옮겨 와 있었다. 책상 위에는 어려워 보이는 책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저런 책도 읽어요?”
“아, 응. 어수선하지.”
희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수선하긴커녕 정갈하게 쌓여 있는 책들은 인테리어의 일부로 보일 정도였다.
영어가 잔뜩 적힌 중후한 책들을 다른 사람이 읽었다고 하면 희나는 허세 부리는 거 아니냐며 코웃음 쳤을 텐데, 진혁이 그렇게 말하니 정말 읽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큐멘터리만 보는 걸로 모자라요? 저런 책들까지 읽게.”
“평소엔 안 읽어. 교수님이 좀 시키신 게 있어서…….”
교수가 진혁을 자꾸 불러내던 핑계인 학회 준비는 이미 끝이 났었다. 그런데도 계속 이어가려고 하는 것을 보면 교수의 본심은 이미 확고하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선생님, 학교 다시 돌아갈 거예요?”
희나가 무릎을 세워 소파 위로 올려 모으며 물었다. 진혁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웃으며 살짝 저었다.
“잘 모르겠어. 사실 결정하기가 쉽지 않네.”
“공부 더 하고 싶은 거 아니에요?”
“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니지만, 학교에 가면…… 약국은 닫아야 할 거고, 과수원도 문제잖아.”
“약국은 어차피 선생님이 자리 안 지켜도 별로 상관없을 것 같은데요. 하던 대로 운영하면 되잖아요.”
“그래도…….”
진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희나의 동그란 머리 위에 커다란 손을 얹고 살짝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이제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으니까 아무리 월급을 받는다고 해도 학생 신분으로 돌아가는 건 곤란하지 않나 생각해.”
책임져야 할 것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고 내려왔으니 그렇게 말하는 것도 당연했다. 몸이 아픈 아이가 있으니 책임감 강한 진혁은 공부를 지속하는 것에 부담을 느낄 것이다.
“미래 때문에 그러는 거죠?”
“미래도 있지.”
미래도? 뭐 다른 것도 있나? 어머니?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굴리던 희나는 진혁과 눈이 마주쳤다. 살짝 쑥스러운 듯 보고 있는 그의 시선에서 의미를 깨달은 희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바보 아저씨 주제에. 내 앞가림은 내가 알아서 하거든요?”
“그래. 알아, 알아.”
희나가 작은 주먹으로 어깨를 팡팡 두들기자 진혁이 웃으며 손목을 잡았다. 희나는 커다란 눈으로 그의 단정한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딱 부러지는 말투로 말했다.
“학교에 가요.”
그리고 뭐라 말하려는 진혁을 저지하며 빠른 속도로 자신의 의견을 늘어놓았다.
“미래랑 약국은 내가 최선을 다해서 봐줄게요. 식충이 같은 희원이도 부려먹어도 되고요. 그리고 과수원 일은 솔직히 승수 오빠한테 맡겨도 되잖아요.”
“하지만 너희한테 그렇게 폐를 끼칠 수는…….”
“폐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고 싶어요. 선생님 아니었으면 지금의 나는 아마 없었을 거예요.”
정말로 진혁이 아니었으면 그녀는 5년 전에 육교에서 뛰어내려 버렸을 것이다.
줄곧 부드러운 눈동자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하던 희나는 점점 부끄러워져 시선을 떨구면서도, 작게 말을 이어 나갔다.
“나를 의지해주세요. 이제 나도 돌봐줘야 되는 어린애가 아니라고 생각해주면 좋겠어요.”
희나의 나직한 말에 진혁의 표정이 조금씩 변했다. 웃는 것도 아니고 찡그린 것도 아닌 기묘한 표정이었지만, 그가 기뻐하고 감동받고 있다는 것은 진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다정한 얼굴에 애교를 부리고 싶어져서 희나는 몸을 툭 던져 그의 어깨에 매달리며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교수가 되면 선생님 혼자 좋은 거 아니잖아요. 나도 나중에…….”
당당하게 교수 사모님 같은 걸 언급하고 싶었지만 그 정도 드립까지 칠 정도로 능글맞진 못했다.
희나가 말을 다 맺지 못하고 부끄러운 듯 어깨에 고개를 묻자 진혁이 팔을 뻗어 희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감회에 찬 시선으로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진혁의 얼굴은 아주 기뻐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본 희나는 더욱 기뻤다. 뭔가를 해줄 수 있다는 게, 앞으로도 계속 함께 있는 이야기를 아무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슴 저미도록 행복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둘이서 마주 보고 웃다가 희나가 뭔가를 깨달은 듯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의아해하는 진혁의 얼굴을 보며 희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학교에 가면 여학생들도 많아요?”
“랩에는 남자가 더 많지. 학부생들은 반반 정도 될 거고.”
몇 명이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반반이라면 아주 적은 수는 아니겠지. 희나는 예쁜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농촌 총각일 때도 여자들을 줄줄이 달고 다녔는데 여대생이 득시글한 곳으로 가게 되다니, 질투의 불길이 솟는다. 이건 뭐 완전히 어장으로 던져주는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내가 모르는 곳에서 선생님이 예쁜 여대생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걸 생각하면 싫다.
희나는 입을 삐죽 내밀면서 진혁의 어깨에 푹 기대며 투정을 부렸다.
“이잉.”
“왜 앙탈 부리는 거야.”
진혁이 쿡쿡 웃으면서 희나의 보드라운 뺨을 주욱 잡아 늘렸다.
“어린애들이랑 바람나면 안 돼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조그만 게.”
핀잔을 주면서 진혁이 다른 손까지 써서 이번엔 양 뺨을 늘렸다.
입이 벌어지게 된 희나는 인상을 쓰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 진혁의 손을 떼어내고는 복수하듯 커다란 손을 콱 깨물었다. “아파, 아파.” 하고 장난스럽게 엄살을 부리며 웃는 진혁의 다른 손도 깨물어 버리고, 고개를 팽 돌리며 새침하게 말했다.
“바보 아저씨라 교사가 됐으면 언젠가 문제 일으켰을 거예요.”
“무슨 문제?”
“고백하는 애들마다 다 사귀어서?”
아직도 고교 시절의 염문을 마음에 두고 있는 희나의 말을 듣고 진혁은 픽 웃어버렸다.
아무렇지 않게 웃어버리는 것이 못마땅하면서도 희나는 그 웃는 얼굴이 너무 멋지고 좋아서 속이 막 저렸다.
희나는 진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칭얼거리듯 말했다.
“선생님, 내가 고백 안 했으면 나 안 좋아했을 거죠?”
그러자 진혁이 팔에 힘을 주더니 희나를 들어 올렸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깜짝 놀란 희나는 “꺅!” 하고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는 진혁의 무릎에 앉혀졌다. 진혁은 희나를 마주 보고 꼭 끌어안으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보다 훨씬 먼저 좋아했을 텐데.”
삐져 있던 희나의 입이 삭- 벌어졌다. 이런 낯간지러운 대화라니.
막 어딘가 뛰어가서 나 행복하다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다. ……아마도 듣는 사람마다 닥치라고 하겠지만.
너무 좋아서 희나는 향긋한 체향이 풍기는 품에 얼굴을 꼭 묻고 비볐다. 그리고 양팔로 커다란 몸을 꼭 두르고 밀착한 채로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아주 가까운 곳에서 얼굴이 마주쳤다.
폭 안겨서 헤실헤실 웃는 희나를 보기만 해도 좋은 듯 진혁도 함께 웃었다. 그리고 곧바로 가까이 있던 입술들이 서로 겹쳐지면서 호흡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많이 익숙해진 키스에 희나는 얼굴이 붉어지도록 열중했다. 촉촉한 입술이 닿아오는 것도, 눈앞에 내리뜬 기다란 속눈썹과 흰 피부가 나른하게 존재하는 것도, 느끼는 부분을 하나하나 핥아 자극하는 붉은 혀의 야한 움직임도, 너무 좋다.
희나는 흰 목덜미를 감은 팔에 힘을 주고 강하게 매달렸다.
키스가 길어질수록 허리가 움찔움찔 튕기고 허벅지 사이가 간질간질했다. 해소할 수 없는 어떤 열기가 몸 안에 가득해서, 희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더 닿고 싶었다. 몸을 단단히 받치고 있는 커다란 손이 허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기분 좋으면서도 참을 수 없이 안타까웠다.
“으음…….”
희나의 보드라운 입술을 빨아올리며 진혁의 섬세한 손끝이 등을 슬며시 스치자 희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경련하듯 떨면서 콧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리고 곧장 자신이 낸 소리에 창피해져서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잠시 떨어진 입술이 다시 곧장 겹쳐 올 줄 알았는데, 진혁은 그대로 멈춘 채 희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가 희나의 달아오른 얼굴과 촉촉이 젖은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희나는 문득 진혁의 눈빛이 평소와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운 듯 입술을 오므리며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자, 진혁이 깊이 숨을 들이쉬더니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몸을 뒤의 쿠션으로 푹- 묻었다.
“미치겠네.”
진혁이 커다란 양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중얼거렸다. 여전히 무릎에 앉아 있는 희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런 진혁을 내려 보았다.
얼굴을 가린 양손 아래로 살짝 보이는 코, 그녀의 타액으로 촉촉해진 붉은 입술, 섬세한 선의 턱과 그 아래로 이어져 있는 길고 탄탄한 흰 목덜미. 그리고 살짝 불거진 목울대가 움직이는 모양이 말할 수 없이 색정적이다.
닿고 싶은 기분을 참지 못한 희나는 몸을 기울여서 진혁의 몸 위로 푹 쓰러져버렸다. 반쯤 기울어진 진혁의 몸 위로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몸이 겹쳐지는 것과 동시에 희나는 팔을 쭉 뻗어서 한참 큰 진혁의 목을 감고 매달렸다. 그러자 진혁이 팔을 내리더니 다시 심호흡을 하고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바보가, 진짜.”
작게 말하면서 진혁은 손가락으로 희나의 예쁜 코를 잡아 흔들었다. 희나는 다시 그의 손을 깨물어서 떼어내고는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왜 미쳐요?”
“너 때문에 그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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