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소곡리의 황태자 (3)
“어이, 서울 처자. 사과 하나 못 깎어?”
“못 하겠어요. 해본 적 없단 말이에요.”
“아이구, 생긴 대로 노는구만. 이리 내봐.”
왠지 이미지를 깎아 먹는 것 같아 희나는 의기소침해졌다. 그러나 곧 옆에 앉아 있던 조금 젊은 아주머니가 사과를 쥔 희나의 손을 보면서 물었다.
“손톱은 어데서 그렇게 이쁘게 했대?”
“내가 한 건데요. 할머니도 하실래요?”
“나는 손이 미워가지고 그런 거 해도 안 어울린다.”
“안 그래요. 제가 다음에 가져와서 해드릴게요.”
“그랴, 아주 곱네, 그냥.”
그런 이야기가 나오자 아주머니들이 희나의 머리나 화장품에 대해서 한마디씩 던졌다. 대체적으로 어른들과 친하지가 않은 희나로선 이렇게 살갑게 대해 오는 건 처음이었다. 나이트 크림에 대한 수다의 늪에 빠져 있는데 승수가 막걸리가 담긴 주전자를 들고 상 앞으로 돌아왔다.
그 덕에 주위가 환기되자 희나는 갑자기 뒤통수가 따끔따끔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황급히 돌려 보았으나 뒤에는 여자들이 몇 명 서 있을 뿐 별일 없었다.
“왜 그래?”
“아뇨. 그냥, 시선이 느껴져서요.”
“웬 시선?”
그때 승수가 수육 접시를 든 채로 바쁘게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여자를 발견하고 갑자기 히죽히죽 웃더니 큰 소리로 불렀다.
“야, 경주야. 나도 좀 갖다 줘!”
경주라고 불린 여자는 금방 이쪽으로 다가왔다. 30대로 보였는데 민망할 정도로 희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녀가 수육 접시를 건네주고 물러나자 승수가 히죽히죽 웃으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쟤 진혁이랑 고등학교 때 사귀었었어.”
“으엥?”
희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서 다시 그 여자를 보았다. 살짝 통통한 몸에 트레이닝 복을 입은 그녀는 어떻게 봐도 진혁보다 훨씬 연상으로 보였다.
“저, 저런 아줌마랑……?”
“아줌마라니. 진혁이가 두 살 많아.”
스물여덟 살? 비주얼이 영 나이 들어 보여서 몰랐네. 저런 외모 취향이었나?
희나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얼마나 사귄 거예요?”
“글쎄, 한두 달?”
“한두 달이면…… 별거 아니었네요.”
속으론 잔뜩 못마땅했지만 신경 쓰는 티를 내기 싫어 희나는 쿨한 척 말했다.
그러나 이어진 승수의 말에 다시 희나의 이마에 내 천 자가 그려졌다.
“아, 쟤랑도 사귀었었지.”
희나가 승수의 손가락을 따라가자 거기에도 경주랑 비슷한 정도의 외모를 가진 여자가 서 있었다.
거기에 대해 뭐라 언급하기도 전에 승수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여 다른 여자를 가리키며 “저 여자도.”라고 말한다. 기가 막힌 희나는 입을 떡 벌린 채 물었다.
“대체 몇 명이나 사귄 거예요?”
“글쎄. 고백하는 여자애들마다 다 고루고루 사귀어서……. 하나같이 진혁이 좋아했으니 아마 동네 여자들 거의 전부가 아닐까.”
충격적 과거다. 완전히 아연해진 희나를 보고 승수는 재미있다는 듯 키들키들 웃었다.
“카사노바였댔잖아. 저놈이 소곡리의 황태자라니까-.”
소곡리의 황태자가 승수 본인 얘기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희나는 잔뜩 삐진 눈초리로 저만치 앉아 있는 진혁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벌어진 고스톱 판에까지 끼워 넣어져 있었다.
“소곡리의 황태자라…….”
“착하고 싹싹하고 잘생기고 어른들한테 잘하고 똑똑하고…… 안 이뻐하는 게 더 이상하지. 우리 어무니도 나보다 쟤를 더 좋아하는 거 같다니까?”
“질투 안 나요?”
“질투는 무슨 질투. 나도 저 녀석 좋아하는데.”
황태자는 전 세대를 아우르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도 진혁의 어깨에 기어오르고 품에 파고들려고 난리였다.
멍하니 진혁을 쳐다보고 있는 희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승수가 물었다.
“그러니 황태자빈이 되려면 고생 좀 할 거다. 오늘 좀 해보니 어때, 힘드냐?”
“아니요, 안 힘들어요.”
희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서 덧붙였다.
“재밌는데요.”
“다행이네.”
“마지막에 들은 말은 빼고요.”
“뭐, 너도 이쁨 받을 거야. 우리 동네 사람들은 다 너무 인물을 밝힌단 말이야-.”
희나가 웃으면서 말하자 승수도 농담하며 따라 웃었다.
“다들 도시로 간다고 하는데 우리 마을은 이 분위기 좋아서 남아 있는 젊은 사람도 많아. 나도 그렇고, 도시 가서 못 살겠더라고.”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희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람들에게 잔뜩 둘러싸여 있는 진혁을 쳐다보았다. 다들 아빠 미소, 엄마 미소를 지은 채 예뻐 죽으려고 했다.
희나는 자신과 재회하기 전까지 진혁이 그렇게 힘든 시간만 보낸 건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소란스러운 분위기에서 시간은 쑥쑥 흘러 해가 완전히 졌는데도 분위기는 여전히 와글와글했다.
희나는 한가운데 만들어진 고스톱 판에 진혁이 호구로 앉혀진 줄 알았는데 잃기는커녕 오히려 타짜였다. 동네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어 마련한 두둑한 천 원짜리 뭉치를 진혁은 아낌없이 슈퍼에 쾌척했고 술판은 더욱 커졌다.
소주병에 숟가락을 꽂아 만든 마이크를 들고 슈퍼 아주머니가 한 곡조 뽑아내자 다 같이 일어나 춤까지 덩실덩실 추기 시작했다.
막걸리 몇 잔 걸친 희나도 웃으면서 흥겹게 박수를 치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팔을 잡아 흔들었다. 돌아보니 진혁이 자세를 낮춘 채 희나에게 소리 내지 말라고 검지를 세워서 입가에 대고 있었다.
“가자, 희나야.”
“네? 인사도 안 하고요?”
“인사하면 못 갈 거야.”
진혁의 말에 수긍한 희나는 슬쩍 눈치를 보며 그를 따라 엉금엉금 걸었다.
조심스럽게 잔치판을 빠져나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빠른 속도로 걸어간 두 사람은 과수원 입구에 접어들어서야 조금 마음을 놓았다.
“미안. 신경도 못 써줬네. 힘들었지.”
그렇게 말하며 진혁의 커다란 손이 희나의 손을 잡았다. 술도 마셨고 해서 차를 두고 온 탓에 둘은 그대로 걷기 시작했다.
“미안. 그런데…… 이런 일이 드문 건 아니라서…… 아르바이트 계속할 수 있겠어?”
“생각한 거랑 완전 다르긴 한데.”
걱정스럽게 묻는 진혁을 보며 희나가 빙긋이 웃었다.
“무지 재미있었어요.”
거짓말이 아니고 정말 재미있었다. 정 많고 시끄러운 어른들한테 둘러싸여서 예쁨 받는 게 생각 외로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희나가 진심이란 걸 깨달은 진혁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그랬다면 다행이네.”
“근데 신경 쓰이는 이야기를 좀 들었는데.”
웃고 있던 희나가 급정색하면서 진혁을 쏘아보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동네 아가씨들이랑 죄다 사귀었다면서요?”
“어?”
희나가 승수에게 들은 이야기를 털어놓고 입을 댓 발 내밀자 진혁이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곧 쿡쿡 웃었다.
“그런 거 아냐. 그냥 그땐 뭘 좀 몰라서. 말만 사귄 거야. 나 때랑 너희 때랑 학생들끼리 사귀는 건 좀 다르기도 하고.”
“아니긴! 순진한 척하더니! 바보 아저씨!”
“그런 거 아니야. 지금이랑 다르다니까. 그리고 순진한 척한 적 없는데?”
“그런 게 뭐가 아니에요? 다르긴 무슨…….”
입이 왕창 나온 희나를 보고 진혁이 웃는가 싶더니 갑자기 팔목을 잡아끌었다.
희나가 강한 힘에 끌려가자 진혁이 허리를 안고 그녀와 함께 옆의 나무 그늘로 들어갔다. 그리고 내밀고 있는 희나의 입술에 키스했다. 잠시 반항하던 희나는 진혁의 손길에 금방 얌전해졌다.
진하게 키스한 뒤 입술을 떼어낸 진혁은 발그레해진 희나를 보고 킥킥 웃으면서 작게 말했다.
“달라. 이런 건 없었다는 말이지.”
그러면서 여전히 부어 있는 희나의 볼과 눈썹과 눈가, 코에 꼼꼼히 입을 맞춘다.
삐져 있던 희나의 얼굴이 느슨해지자 아쉬운 듯 얼굴을 살짝 떼어낸 진혁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이이……. 나도 미리 많이 사귀어놓을걸.”
“안 돼, 바보야.”
“왜 안 돼요. 자기는 왕창 사귀어놓고!”
“그래서 싫어졌어?”
다정하게 묻는 흰 얼굴을 보고 희나는 다시 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픽 돌렸다.
저렇게 쳐다보는 건 반칙이지. 싫기는커녕 좋아 죽겠는걸.
희나는 잡고 있는 큰 손의 기다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따라 걸었다. 마을에서 집까지의 길은 30분은 걸어야 하는 아주 긴 길이었지만 하나도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희나와 진혁이 손을 꼭 맞잡은 채 마당으로 접어들자 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보였다.
눈이 부셔 찌푸리며 바라보니 희원이 차에서 미래를 업고 내리고 있었다. 걸어온 데다 중간중간 멈춰 서서 서로를 지분대느라 오래 걸린 탓에 오히려 늦게 출발한 희원이 먼저 도착한 것이다.
“형, 왔어요?”
“응. 미래 맡겨서 미안하네.”
“뭐가요. 밥도 잘 얻어먹고 왔는데. 안에다 재울까요?”
“응, 부탁할게. 고맙다.”
고마워하는 진혁을 보고 희원은 뿌듯한 표정을 짓더니 미래를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희나의 입이 쭈욱 나오자 진혁이 웃으며 물었다.
“아직도 희원이 여기 있는 거 맘에 안 들어?”
희나는 샐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툴툴거렸다.
“아무리 도움이 된다고 해도요. 나는 따로 사는데 저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눌러앉고.”
희나는 자기는 돌아가야 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침투한 희원이 얄미웠다. 자신의 입지가 좁아진 기분도 들어서 박탈감도 느껴졌다.
말해놓고 ‘갈 데 없는 동생한테 너무 조잔하게 구나?’ 하고 희나가 살짝 민망해하고 있는데 진혁이 나직하게 물었다.
“그럼 희나도 자고 갈래?”
“네?”
뜻밖의 제안에 놀란 희나가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진혁은 묘한 미소를 지은 채 희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 더 말이 없었다. 심장이 박동을 빨리하고 동시에 얼굴도 뜨거워져서 희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고 애쓰며 물었다.
“……어디서요? 희원이가 선생님 방에서 자는 거 아니에요?”
“내 방 말고 저기서 같이…….”
진혁은 살짝 작업실 쪽을 눈짓하면서 말하다가 말을 흐렸다. 술을 마셔 살짝 불그스름하던 그의 볼 부근에 홍조가 더 진하게 번지는 것이 보였다.
드물게 어색해하면서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희나의 심장이 더 심하게 쿵쿵쿵쿵 뛰기 시작했다.
“어, 어, 어머니. 일찍 일어나시니까…… 같이 나오는 거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 아니에요…….”
머리가 뜨거워져서 희나는 허둥거리면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
하지만 말해놓고 아차 했다. 계속계속 같이 있고 싶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 옛날처럼 폭 끌어 안겨 있고 싶다. 그 마음 때문에 갈 것처럼 말해 놓고도 희나는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진혁은 시선을 피한 채로 알았다는 듯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그래, 그럼 데려다줄게.”
다정한 말투는 태연했지만 진한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데려다준다고 말해놓고 움직이지 않은 채 둘은 마당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가고 싶지 않으니까, 네가 먼저 움직이라는 듯.
희나는 작업실 문을 쳐다보았다. 진혁에게 고백하고, 다음 날 아침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니 얼굴이 터질 것처럼 뜨겁다. 희나는 심호흡을 한번 한 뒤 나직하게 말했다.
“자고 갈래요.”
그렇게 말하고 내내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던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침을 꿀꺽 삼킨 듯 진혁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정말 자고 갈 거야?”
“그래요.”
멈춰 서 있던 둘의 다리가 동시에 움직였다. 잔뜩 긴장해 뻣뻣해진 동작으로 작업실 앞까지 갔다.
희나는 문에 열쇠를 꽂고 있는 진혁의 단정한 옆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기쁜 건지 망설이는 건지 애매한 표정. 그 얼굴을 보자 긴장하고 있던 희나의 소악마 기질이 얼굴을 내밀었다.
“선생님, 나 이제 어린애 아니에요.”
진혁의 손놀림이 멈추고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멍해진 그 얼굴을 보고 희나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러니까, 내가 달려들면 어쩔 건데, 바보 아저씨.
살짝 입술을 움찔거리며 희나를 내려다보던 진혁의 단정한 눈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멈췄던 그의 손이 다시 움직여 작업실 문을 열었다.
희나의 어깨를 감싸 안아 안쪽으로 끌어들이며 진혁이 나직하게 귓가에 속삭였다.
“나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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