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소곡리의 황태자 (2)
“진혁아, 약 가져온 겨?”
“아이구, 자주 좀 와라. 많이 바쁜가 벼?”
“안녕하셨어요.”
그래도 어른이라면 어른인 서른인데 아주 살갑게도 이름을 부른다. 꾸벅 허리를 숙이며 다가오는 진혁을 쳐다보는 동네 사람들 얼굴에 예뻐 죽겠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다가온 진혁의 어깨를 팡팡 치고 덥석덥석 안는 가운데 한 노인이 일어나더니 진혁을 끌어당겼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좀 살 게 있는데 진혁이 잠깐 나 좀 따라와 봐라.”
“저 영감, 저거 또 수작 부리려고!”
“아 거 영감탱이 시끄럽네! 수작은 뭔 수작이여! 약 좀 받겠다는 건데!”
그러면서 노인은 진혁의 팔을 질질 끌고 차 쪽으로 걸어왔다. 차에서 내릴까 말까 고민 중이던 희나가 따라 내리니 노인이 수군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혁아, 봤냐?”
“네, 봤어요.”
“어찌해야 살겄어?”
“이미 틀리셨어요. 가망이 없어요.”
이게 무슨 살벌한 이야기람.
희나는 두 사람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당황했다. 이렇게 건강해 보이는데 시한부 환자라는 말인가?
“얼마나 남은 것 같냐?”
“다섯 수 안에 장군 나올 것 같은데요…….”
“크흑. 저놈의 영감쟁이가 갤럭신지 뭔지 사서 허구한 날 히죽거린다 싶더니…… 그걸로 장기 둔다지 뭐여. 아주 그냥 요즘 나하고 이장하고 번갈아 가면서 털리고 있어.”
대화 내용을 듣고 희나는 두고 있던 장기 얘기임을 깨달았다. 바보 아저씨가 훈수까지 두는 모양이다.
진혁의 사형 선고를 들은 노인은 한탄을 늘어놓으며 한숨을 푹푹 쉬다가 희나 쪽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고 움찔한 희나에게 노인은 입을 떡 벌리며 말했다.
“얼레? 이 처자가 그 소문이 자자한 꽃뱀 처자여?”
“꽃뱀 아니에요!”
움츠러들었던 희나가 발끈했지만 노인은 껄껄 웃으며 희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듣던 대로 눈이 쪽 찢어진 게 사내 좀 홀리겠네! 이리 좀 와봐. 와서 뭣 좀 먹고 가!”
“네? 아뇨, 괜찮은데요!”
희나는 사양했으나 노인의 기세가 비범해서 저도 모르게 노인을 졸졸 따라가게 되었다.
끌려가면서 쳐다보니 동네 정경이 묘하게 친근하다. 특히 평상이 놓인 이 두 그루의 나무가 어디서 본 거 같은 기시감이 든다.
“아니, 그 처자는 누구래?”
“꽃뱀 처자여? 소문대로 아주 그냥 곱구먼. 동네에서 한 달만 영업하면 밭 몇 마지기 정도는 챙기겄어.”
“내가 보기엔 땅 부자 되겄는디.”
희나는 순식간에 평상에 앉혀져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약 상자를 들고 따라온 진혁이 서둘러 희나를 감싸고 해명했다.
“희나는 꽃뱀 아니에요. 요 앞에 학교 학생이에요.”
“그려? 그런데 학생이 어쩌다 느그 집에 들어앉은 겨?”
“들어앉은 게 아니고…….”
그러나 해명이 끝나기도 전에 평상 앞 연립 주택의 1층 창문이 벌컥 열리더니 60대 정도의 여자가 얼굴을 쑥 내밀고 소리쳤다.
“진혁이 나왔어? 거 말고 여기로 좀 와 봐라. 얼굴 좀 보자.”
“진혁아, 이놈의 컴퓨터가 왜 이런다냐. 잠깐 들어와서 좀 봐줘봐!”
할머니가 고함을 치자 중년 여성도 달려 나와서 고함을 친다. 그 모습을 보고 진혁은 한숨을 푹 쉬더니 약이 든 봉투를 평상에 내려놓고 희나에게 말했다.
“미안. 잠깐 다녀올 테니까 여기 약 좀 나눠드리고 있을래?”
“네. 내가 알아서 할게요.”
업무의 일환이라는 사명감을 품고 희나는 고개를 붕붕 끄덕였다. 혼자 남으니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순박한 시골 노인들의 시선이 아주 팍팍 꽂히는 거 같다.
“저기 김만복…… 님? 이 어느 분이세요? 여기 약 전해드려야 되는데…….”
“꽃뱀이 아니면 뭐여-? 둘이 정분난 겨?”
“이 아가씨가 그러니까 진혁이 애인이라는 거 아녀?”
그러나 희나의 질문은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진혁이랑 사귀는 겨?”
“그게…… 네, 맞는데요.”
희나가 눈치를 보면서 발그레해진 얼굴로 대답하자 모두의 입이 헤- 하고 벌어진다.
그녀가 무슨 의미인지 몰라 불안해하고 있을 때 주민들이 다 같이 벙긋 웃는 표정으로 변했다. 중년이 훌쩍 넘어선 주민들이 아주 10대처럼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신나게 한마디씩 던졌다.
“아이구, 역시. 요래 맨들맨들해가지고 애인도 어디서 저 같은 거를 데려오네.”
“갸는 대처에서 아가씨 구해 올 줄 알았어! 이 동네에는 진혁이 만날 아가 없지.”
“둘이 장래는 약속한 거여?”
“했겄지! 진혁이 이제 장가갈 때 됐잖여!”
“그래, 어디 출신이여? 집에 땅은 좀 있는가?”
“땅은 무슨, 생긴 걸 보소. 땅 파먹고 살게 생깄나. 서울 그런 데서 온 아 아니겄어?”
“빼짝 말라가 아는 별로 못 낳겄는디.”
희나는 한마디도 안 하는데 자기들끼리 질문하고 자기들끼리 대답을 하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희나가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멍청히 앉아 있는데 뒤쪽에 앉아 있던 아까의 노인이 일어나면서 손뼉을 쳤다.
“진혁이가 애인을 다 데려오고. 이거 잔치해야겠구먼!”
“당장 담 주에 잔치할 건디 뭔 잔치를 또 혀!”
“그래도 이런 날에 막걸리 한잔혀야지!”
“네? 아니요, 아니요! 저 아르바이트 중인데요……. 다음에…….”
웬 막걸리? 희나는 당황해서 팔을 저었지만 어른들은 껄껄껄 웃으며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살 날 얼마 남은 줄 알고 다음으로 미룬다고 그랴!”
“그랴-. 다음에 오면 여기 몇은 가고 없어-! 특히 이 약아 빠진 영감탱이는-!”
“이 노망난 늙은이가 뭐라는 겨!”
“어이, 영훈이네! 여기 술상 좀 봐줘!”
“그럼 여기를 좀 치워야겠구먼!”
진혁에게 장기 훈수를 부탁했던 노인이 그러면서 장기판을 옆으로 밀어버리는 바람에 알들이 마구 흩어졌다. 아무래도 저게 목적이었던 것 같다.
장기를 함께 두고 있던 흰 한복의 할아버지가 역정을 냈다.
“아, 저놈의 영감탱이가! 다 이긴 판을!”
“다 이기긴 뭘 다 이겨! 이 고약한 영감탱이 말하는 거 보소?”
“아이구. 아가씨 앉혀놓고 뭐하시는 거예요. 막걸리나 한잔씩들 자시세요.”
영훈이네라고 불린 슈퍼 여주인이 투닥거리는 노인 둘 사이로 끼어들며 술상을 턱 내려놓았다.
방금 전에 주문한 거 같은데 언제 차렸는지 떡 벌어진 한 상을 보고 희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에, 수육에, 먹음직스러운 김치까지 떡하니 놓여 있다.
‘슈퍼마켓에서 이런 것도 파나?’ 하고 아연해져 있는데 슈퍼 아주머니가 희나의 어깨를 톡톡 두들기며 윙크를 날린다.
“다들 참 주책이지? 그래도 넘 불편해하진 말어. 진혁이가 우리덜 아들이나 마찬가지라 그랴.”
“아, 네. 저 괜찮아요.”
“그래, 그럼 많이 먹어.”
그렇게 붙잡힌 채 희나는 약은 나눠주지도 못하고 양은 막걸리 그릇을 둔 채 질문 공세에 휩싸였다.
그렇게 진땀을 빼고 있을 때 진혁이 돌아왔다. 술판이 벌어진 걸 본 진혁이 흰 이마를 짚고는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결국 이렇게 됐구나…….”
그러면서 희나의 옆에 앉으려 했지만 엉덩이를 붙이기 전에 다시 팔을 붙잡혔다.
“진혁아! 언넝 여 와서 좀 앉아봐라! 6점만 깔고 접바둑 한 번만 두게!”
“아, 그게…….”
“괜찮으니까 다녀오세요.”
망설이며 희나를 쳐다보는 진혁에게 희나는 순순히 말했다. 이 생소한 분위기가 흥미롭고,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의 진혁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진혁은 “괜찮겠어?” 하고 물은 뒤 대답을 듣기도 전에 아저씨들에게 끌려갔다.
“진혁아, 막걸리 한잔 받아라!”
“아니요, 운전해야 돼서.”
“운전은 뭔 운전이여, 바로 코앞인디! 한 잔 정도는 괜찮어!”
“아뇨, 음주 운전은 안 되니까…….”
“승수 불러! 승수 뒀다 어따 쓸라고 그려!”
희나는 평상 위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사람들 틈의 그를 재미있게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이 장소가 낯익은 이유를 깨달았다. 예전에 진혁의 앨범에서 본 장소였다. ‘축 유진혁 서울대 합격’ 같은 문구가 써 있고 어색해하는 진혁과 그를 잔뜩 둘러싸고 자랑스러워하는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여기에 그대로 옮겨져 있었다.
희나는 그것을 떠올려내고 킥킥 웃었다. 만약에 진혁이 제자와 추문을 일으킨 교생 따위로 뉴스라도 탔으면 마을 전체가 엄청난 탄식에 잠길 뻔했겠다.
신이 난 동네 사람들은 점점 떠들썩해졌고, 그 소란에 연립 주택 주민들이 창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희나는 시끄럽다고 누군가 화를 낼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술판이 벌어진 것을 보더니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서 여기저기에 자리를 펴고 놀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는 살다 살다 처음이라 희나가 신기해서 정신없이 보고 있는데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뭐 하느라 안 오나 했더니 역시 둘러싸였고만?”
뒤를 돌아보니 미래의 손을 잡고 나온 희원과 승수가 보였다. 미래는 진혁의 말대로 낯을 가리느라 희원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다가 희나를 발견하고는 후다닥 달려와 품에 안겼다. 승수는 희나의 옆 평상에 걸터앉아 낄낄 웃었다.
“저 녀석 또 붙잡혔네. 내 이럴 줄 알았지. 너 좀 놀랐겠다?”
“이건 무슨 출장 호스트도 아니고…… 출장 효자 서비스라도 하는 거예요?”
희나의 말을 듣고 승수는 더 소리를 높여 웃었다. 그는 희원에게도 손짓해서 옆에 앉힌 뒤 땀을 식히느라 손부채를 펄럭이며 말했다.
“아, 일하고 왔는데 맛있는 냄새 죽이네! 이모! 여기도 막걸리 좀 줘요!”
“바쁘니까 와서 들구 가!”
접시를 들고 나르고 있던 슈퍼 여주인이 승수를 보더니 손사래를 쳤다.
승수가 기분 좋게 웃으며 슈퍼로 들어가자 희나와 희원만 뻘쭘하게 남았다. 그때 평상에 함께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둘에게 말을 걸었다.
“서울 처자, 야는 또 누구여?”
“기생오라비같이 생겼구먼. 야가 그 제비라는 갸여?”
“아니에요. 제비 아니에요! 제 동생이에요!”
희나가 황급히 손을 저으며 부정했다. 희원은 제비라고 불린 것보다 아주머니들 앞에 차려져 있는 떡 벌어진 술상에 더 관심이 있었다. 침이라도 흘릴 듯한 표정으로 수육을 쳐다보고 있자 할머니가 희원에게 물었다.
“좀 먹을 겨?”
“네, 먹을래요.”
낯 두꺼운 희원은 진혁의 집에 처음 왔을 때처럼 넙죽 받아먹는다. 밥 때가 되어서인지 덥석덥석 잘도 받아먹는 희원을 보고 주변 부인네들의 얼굴에 푸짐한 엄마 미소가 떠올랐다. 잘 받아먹자 어색함이 가셨는지 다들 친근하게 등을 두들겨가며 두 남매에게 말을 걸었다.
“둘 다 생긴 게 아주 이쁘장한 것이 딱 텔레비에 나오는 아들 같네. 아부지는 뭐 하시냐?”
“아, 그게 돌아가셨어요.”
“어무니는?”
“두 분 다 안 계세요.”
“그럼 둘만 있는 겨?”
질문을 받고 희나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아라는 건 역시 시골에서 인상이 안 좋겠지 싶어서 살짝 움츠러들었다.
앞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들의 표정이 잠시 놀란 듯싶더니 곧 다시 수다가 쏟아져 나왔다.
“요래 이쁜 거를 두고 어찌 갔대.”
“하하하. 그러게 말이다. 내 손녀 하면 되겠구만.”
“아이고, 말 마소. 전혀 닮지를 않았는디.”
“안 닮기는. 나 스무 살 적이랑 빼다 박았구만!”
“서윤이네보단 나랑 닮았지!”
희나는 사람들이 뭔가 위로를 하거나 어색하게 화제를 옮기거나 할 줄 알았는데 서로 희나가 자신을 더 닮았다며 싸우기 시작했다.
생각지 못한 반응에 아연해진 희나의 등을 팡팡 두들기며 할머니가 옆에 놓여 있는 광주리에서 사과를 꺼내 통째로 내밀었다.
“딱 몇 근만 더 찌면 나랑 똑 닮았지. 아가, 이리 와 봐. 요거 좀 먹어 봐라!”
“네? 저 밥 먹고 왔는데요.”
“요즘 아들은 밥을 그냥 새 모이만큼 먹어서 쓸데가 없어. 이래 가지고 시골에서 일 못 하제.”
“아가야, 거기 사과 좀 깎아 봐라.”
대체 어디서 가져왔는지 할머니가 과도를 꺼냈다. 얼떨결에 희나는 사과를 집어 들고 깎기 시작했지만 생전 해본 적이 없는 일이라 제대로 될 턱이 없었다.
“어이, 서울 처자. 사과 하나 못 깎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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