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소곡리의 황태자 (1)
희나는 눈을 슥슥 비볐다. 지금 자신이 보는 게 현실이 맞는 건가,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몇 번이고 눈을 의심하던 희나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너…… 뭐하는 거야?”
“보면 몰라?”
희원이 귀찮은 표정으로 희나를 힐끔 올려다보면서 대답했다.
“공부하잖아.”
희나의 입이 헤- 벌어졌다.
그렇다. 그의 말대로 희원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약국 카운터 위에 펼쳐진 문제집을 보면서 미간을 잔뜩 모으고 고뇌에 빠져 있는 얼굴은 너무나 희원과 어울리지 않았다.
전교 꼴찌 연속 기록을 갱신하다가 자퇴한 녀석이 공부? 그것도 주말 아침부터?
“니가 웬 공부야? 뭐 잘못 먹었냐?”
“형이랑 그저께 얘기했는데 검정고시 봐서 붙으면 계속 있어도 된대.”
귀찮다는 듯이 대답하는 희원의 말에 희나는 조금 납득했다.
고등학교를 졸업시키려고 들다니, 너무나 진혁다운 행동이다. 그러나 그 말을 순순히 따르는 것은 너무나 희원답지 못한 행동이었다.
“진짜 검정고시 보려고?”
“어. 이제 저녁마다 형이 공부 가르쳐준다.”
희원이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히죽히죽 웃자 희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밉살스러운 자식.
희나는 희원이 진혁과 더 오래 시간을 보내는 게 못마땅했다.
“선생님은 지금 어디 있는데?”
“조금 있다 온대. 이거 풀어야 되니까 말 시키지 마.”
굴러들어 온 돌 주제에 턱 박혀 있는 게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하나뿐인 혈육이 공부를 하겠다는데 방해하는 것도 우스운 일. 희나는 툴툴거리면서도 희원의 무릎에 얌전히 앉아 있는 미래를 안고 옆의 간이 의자에 앉았다.
미래가 하트가 뿅뿅 떠 있는 눈으로 희원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오빠, 공부하는 것도 멋있어-.”
중증이다. 이러다 잘못하면 족보가 심하게 꼬이겠다는 먼 훗날의 김칫국을 마시면서 희나는 허탈한 기분으로 고개를 떨궜다. 미래는 희나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조잘조잘 떠들었다.
“언니, 미래 빨리 클 거야. 미래가 빨리 오빠보다 더 커져서 결혼해야지.”
“아니, 나보다 큰 건 좀 별론데.”
“오빠, 큰 사람 좋아하잖아?”
“키보다는 다른 데가 크게 자라는 게 훨씬 좋…….”
“애한테 헛소리하지 마!”
희나가 문제를 풀면서도 꼬박꼬박 미래의 말에 대꾸하는 희원의 등짝을 후려치려고 할 때 과수원 방향의 문이 열렸다.
진혁일 줄 알고 반색하며 돌아보았지만 안으로 들어온 것은 승수였다.
“형님, 오셨슴까?”
진혁에게보다 훨씬 깍듯한 말투로 희원이 인사를 했다. 하긴 둘이 있으면 삼촌과 조카 같긴 하다.
승수는 공부하고 있는 희원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웃었다.
“진짜 공부까지 하는구나. 그냥 여기 자리 잡아라. 일도 잘하고 제비같이 생겨 가지고 머슴 체질인가 봐.”
“오빠, 또 어디 가요?”
칭찬인지 갈구는 건지 애매한 말을 하고 있는 승수에게 희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승수는 며칠 전처럼 머리 세팅을 하고 옷까지 떡하니 차려입고 있었다.
“그냥 좀 일이 있어서. 이따 저녁에나 올 거야.”
그러면서 도로 쪽 문으로 나가려던 승수가 마침 생각난 듯이 돌아서더니 희나에게 말했다.
“아, 너 할 일 없으면 다음 주에 마을 회관에 놀러 와.”
“마을 회관요? 왜요?”
“계절 바뀔 때마다 마을 회관에서 고사 지내고 잔치하거든. 맛있는 것도 많고 하니까 밥이나 먹으러 오라고.”
“잔치?”
“어르신들 모이는 건데 젊은이들 오면 좋아하셔. 내가 청년회장이거든. 사실 좀 도와달라고.”
“공짜로 부려 먹으려고 오라는 거구나.”
아직 서른 살인데 마을 청년회 같은 활동도 하다니. 완전 딴 세상 이야기였지만 툴툴대면서도 호기심이 들어서 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곡리의 황태자랑 어울리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
“웬 소곡리의 황태자?”
손발이 오글오글한 별명에 희나가 눈썹을 찌푸리며 반문했지만 승수는 히죽히죽 웃더니 “그럼 난 갔다 온다.” 하고 밖으로 휙 나가 버렸다.
그가 나가는 것과 거의 동시에 들어선 진혁이 희나의 중얼거림을 듣고 물었다.
“희나 왔네. 무슨 얘기 하는 거야?”
“승수 오빠가 소곡리의 황태자예요?”
진혁은 뚱딴지같은 말을 들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고는 금시초문인 모양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처음 듣는데. 왜?”
“승수 오빠가 그러던데요.”
“음……. 승수가 이장님 아들이긴 한데. 그래서 그렇게 말한 건가?”
이장님 아들이었군. 그런데 황태자라니 너무 거창하다.
“……황위를 계승해봤자 차기 이장이라는 소리 아니에요?”
진혁은 대답 대신 그냥 픽 웃고는 문 앞쪽으로 가더니 밖에 잔뜩 쌓여 있는 박스를 옮기기 시작했다. 공부하고 있던 희원이 도우려고 일어나자 그는 그럴 것 없다고 사양했다.
대신 희나가 고개를 쏙 내밀면서 물었다.
“일 시작하는 거예요? 나 뭐 하면 돼요?”
“어, 잠깐 이쪽으로 와줄래?”
아르바이트 첫날인 데다 무려 진혁의 밑에서 하는 거니 희나는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시키는 대로 옆으로 다가가자 진혁이 검은 가방에서 파일 철을 꺼냈다. 그 안쪽을 본 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뭐예요?”
“처방전.”
처방전인 것은 희나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처방전이 엄청나게 두툼하다. 약국은 파리 날리는데 대체 언제 받은 건지 50장도 훨씬 넘을 것 같은 처방전들을 보고 희나가 물었다.
“언제 이렇게 받은 거예요?”
“다 동네 분들이시라…… 약국 자리 비우면 집에 막 두고 가셔. 나중에 찾으러 오시기도 하고 아니면 집으로 가져오라고.”
희나는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 집에 있다 보면 아무렇게나 거실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지. 물이라도 마시러 온 일꾼인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구나.
약국에 줄창 찾아올 때도 슥 들어왔다가 선생님이 나오기도 전에 그냥 휙 가 버리는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계셔서 놓치는 손님이 좀 있나 보다,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런 게 아니었구나.
“희나야, 여기에 있는 이름 하나하나 봉투에 좀 적어줄래? 그리고 처방전도 접어서 봉투 안에 같이 넣어줘.”
생각에 잠겨 있는 희나에게 진혁이 말했다. 희나는 시키는 대로 봉투에 이름을 적고, 처방전에 적힌 글자를 쓰고, 옆에서 약 상자를 까고 쓰레기를 정리하고 꺼내 오라는 약들을 꺼내 왔다. 처음이어서 위치를 몰라 많이 헤맸지만 진혁은 짜증 내는 기색도 전혀 없이 하나하나 차분하게 설명해주었다.
생각 외의 대작업이어서 전부 끝냈을 때는 거의 정오가 되어 있었다. 약 봉투는 하나같이 상당히 두툼했다.
개중에는 미래의 이름이 적힌 것도 있었는데, 그것만 다른 것들과 모양이 달랐다.
대강 일이 갈무리되자 다 같이 우선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했다.
희나는 희원의 식사량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일당을 받기는커녕 식비를 지불해야 될 것 같았다. 여기서 3달만 있으면 체중이 어마어마하게 불어날 것 같다.
식사를 하면서 희나가 진혁에게 물었다.
“아까 그 처방전이 3일간 받은 거예요?”
“응. 평소보다 좀 많지만.”
“동네에 환자가 이렇게나 많아요? 사람도 별로 없는데…….”
“아무래도 주변에 노인분들이 많으시니까 약을 장기 복용하시는 분들이 많으시거든. 그런데 마을 어르신들은 외지 사람들이 하는 병원이나 약국은 잘 안 가려고 하셔서.”
그 정도면 온 동네가 종합 병동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이 파리 날리는 약국에 알바를 쓸 수가 있는 거였군. 희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물었다.
“그럼 이 약들은 언제 전달해요?”
“지금까지는 댁으로 찾아가서 직접 드렸어.”
헤에- 하고 입을 벌리며 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리가 날렸던 이유가 배달 위주였기 때문인 거다. 배달 약국은 처음 들어보지만 왠지 그럴싸했다.
“그럼 밥 먹고 약 갖다주러 가는 거예요?”
희나의 질문에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할 일 하세요-! 내가 선생님 대신 약 배달할게요.”
“대신은 무슨, 너 차 없잖아.”
“집들이 여기서 멀어요?”
“많이 멀진 않아도 걸어 다니긴 힘들지.”
그러면서 진혁은 고개를 저었지만 희나는 의욕적으로 제안했다.
“나 배달도 할래요. 재미있을 거 같아요!”
“재미있을 거 같아?”
“아무도 안 오는 약국에서 멍 때리는 거보다 훨씬 낫네요. 별거도 아닌데 당연히 괜찮죠.”
“음, 별거도 아니진 않을 텐데…….”
걱정스러운 듯 말하는 진혁을 향해 희나가 자신만만하게 장담했다.
“어쨌든 나도 데려가요-! 방해 안 할게요!”
“어차피 그러려고 했어.”
진혁은 픽 웃으면서 의욕 넘치는 희나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러니까 빨리 밥 먹어.”라고 하는 그의 말에 희나는 열심히 숟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자, 가자.”
식사를 마친 희나는 진혁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
마당을 벗어난 하얀 차가 과수원 안쪽으로 달리자 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항상 도로 방향으로 나오기만 했기 때문에 안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는 건 처음이었다.
“과수원으로 들어가요?”
“이쪽으로 가면 마을로 이어져.”
도로변에서는 과수원밖에 보이지 않아서 몰랐는데 안쪽에 민락이 있는 모양이었다. 희나는 승수가 올 때 항상 안쪽에서 걸어 나왔던 걸 떠올렸다.
그리고 신기한 표정으로 바깥을 보았다. 날씨가 좋아서 창문을 열고 달리니 풀 냄새가 나는 것이 기분 좋다.
한참을 달려 푸르른 과수원을 빠져나오자 곧 제법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이 나왔다.
“우와, 이런 데가 있었네요?”
희나는 신기한 듯 쳐다보며 입을 헤- 벌렸다.
안쪽 마을은 진혁의 집처럼 완전 띄엄띄엄 있는 게 아니라 제법 밀도 있게 집들이 위치하고 있었다. 어린이집 부근처럼 개발되어서 한쪽에는 대단히 오래되어 보이는 연립 주택까지 있었다.
나무도 많고 시골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긴 하지만 사람이 꽤 사는 것 같다.
도로 부근이 워낙 휑해서 대체 주민들은 어디에 살고 있나 했는데 여기 이렇게 큰 마을이 있을 줄이야.
“어, 이러면 좀 곤란한데…….”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는 희나의 귀에 진혁의 난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해서 돌아보니 진혁이 연립 주택의 입구 부근을 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시골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오래된 슈퍼마켓 건물과 함께 커다란 버드나무가 있고 평상과 플라스틱 의자들이 놓여 있었는데 7~8명 정도 되는 마을 사람들이 옹기종기 나와서 장기나 바둑 같은 것을 두고 있었다.
그냥 목가적 풍경일 뿐 딱히 이상할 것이 없었기에 희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네? 왜요?”
“아무래도 조금 있다가 혼자 다시 오는 게…….”
그러나 후진을 시도하기도 전에 평상에 앉아 있던 주민들이 이쪽을 발견해버렸다. 진혁의 하얀 차를 보고 장기를 두고 있던 주민들의 얼굴에 잔뜩 화색이 돌았다.
“아이구, 진혁이 왔냐!”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희나는 당황해서 조금 움찔했다.
진혁은 이마를 짚으며 살짝 한숨을 내쉬고는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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